120화. < 폭포의 유적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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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은 다음, 적당한 자리에 앉아 오전에 마셨던 붉은 드몬트 잎으로 만든 차를 마셨다.
오전보다 향이 훨씬 좋아진 느낌이 들었다.
반태수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본 승무원이 빙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차향이 아까보다 더 괜찮지요? 드몬트 차의 특징입니다. 아침보다는 낮에, 낮 보다는 저녁에 더 맛이 좋죠. 밤에는 별로입니다. 기다렸다가 아침에 먹는 게 찻잎을 아끼는 길이죠.”
반태수는 신기한 눈으로 찻잔에 담긴 차를 살펴봤다.
시간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지는 차가 있다니. 대체 원인이 뭘까?
보통 이런 신기한 일의 원인에는 마력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든 마력이 개입하면 특이한 변화가 생긴다.
그러니 찻잎을 살펴보면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태수는 살라자 샤마쉬에게 대가로 비행선을 태워달라고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열흘짜리 여행 하나로 얼마나 많은 걸 얻었단 말인가. 그것도 아주 편안하게.
‘이거 5대 가문 대하는 자세를 좀 바꿔야 하나?’
그동안은 무작정 피하려고만 했다. 한데 막상 엮이고 나니 얻는 것이 너무 많았다.
물론 진짜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살라자 샤마쉬가 좀 특별한 케이스일 테니까.
모험을 걸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오후에도 동굴 탐험을 계속 하실 계획이십니까?”
승무원의 물음에 반태수가 그를 쳐다봤다.
지금까지 저런 식으로 먼저 나서서 다음 일정에 대한 질문을 한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태도가 바뀐 것이다.
"일단은 그럴 생각입니다.”
"오후에도 혼자서 가시는 겁니까? 걱정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과연 걱정 때문일까? 반태수는 아니라고 봤다. 아마 시야에서 너무 오랫동안 벗어났기 때문에 살라자 샤마쉬에게 한 소리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감시자를 달고 갈 생각은 없었다.
오후에 갈 동굴 역시 절벽의 글귀에서 얻은 정보를 통해 찾아낸 거니까.
"혼자 갈 겁니다. 위험한 상황이 오더라도 몸 하나 뺄 자신은 있습니다.”
승무원은 별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반태수는 오후에 갈 동굴에 대해 생각했다.
절벽의 마법사는 그 동굴을 마수동굴이라고 불렀다.
자신이 직접 선별한 마수를 동굴에 가둬뒀다고 했다. 유적과 마찬가지로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강력한 마수가 나타나는 방식이었다.
고대에 만들었으니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겠는가.
보통은 마수가 죽고 썩어서 뼛조각도 남지 않았겠지만, 특별한 마법을 곁들였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어쩌면 유적을 지키는 마수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유적의 마수들이 그런 식 아닌가. 아주 오래전에 유적에 갇혔는데 아직까지 살아서 활동하니까.
마수 자체에 무언가를 심어서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유적에서 작용하는 힘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유적에서 싸웠던 갑각 트롤을 연구한 바가 있지 않은가.
거기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마수 자체를 연구해 생체 조직 연구를 조금 더 발전시켰을 뿐이다.
뭔가를 더 하려면 유적 자체를 연구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하니 어쩔 수 없이 그 부분에 관한 연구는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유적은 다르다.
나중에 살라자 샤마쉬가 발견할 수도 있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자신이 유적을 발굴했다는 걸 알 방법이 없다.
폭포 아래의 유적도 그렇고 지금 가려는 마수동굴도 마찬가지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시다 보니, 어느새 잔이 비었다.
"혹시 저녁 먹을 시간까지 안 오면 밥은 먼저 드십시오. 전 늦으면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어차피 아공간에 음식은 쌓여있다. 메뉴도 워낙 다양해서 질릴 일도 없었다.
하지만 승무원이 그걸 알 리 없지 않은가.
"그럼 도시락이라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반태수는 도시락을 담은 가방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훌쩍 날아 폭포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승무원 몇 명이 가만히 바라봤다.
반태수의 모습이 사라지자, 승무원 중 한 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한 소리 듣겠네.”
"그래도 일단 보고는 해야지.”
"같이 가면 좋잖아. 왜 혼자 다니려고 하는 거지? 뭔가 감추는 거라도 있나?”
"그게 아니면 굳이 혼자 다닐 이유가 없지. 같이 가면 우리가 얼마나 잘 챙겨줄지 알 텐데.”
"그나저나 혼자서 정말 괜찮을까? 전에 만났던 마수, 만만치 않았는데.”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법사인데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 못 이기겠다 싶으면 날아서 도망치겠지."
"동굴 안에서?”
동굴에서 도망치려면 날아다니는 것보다 속도가 더 중요하다.
"불안하네.”
"몰래 쫓아가 봐야 하는 거 아냐?”
"그랬다가 들키면?”
"안 들키면 되지.”
"그것도 불안한데……."
하지만 몰래 쫓아가자는 말을 꺼낸 승무원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품에서 마도구 하나를 꺼냈다.
"이걸 쓰면 돼. 세 개 있으니까 딱 세 명만 같이 가보자고.”
소리와 기척을 없애는 마도구였다. 모습까지 안 보이면 좋지만 그건 유물에서나 찾을 수 있는 기능이었다.
그런 유물은 부르는 게 값이다. 아니, 5대 가문에서도 제법 귀한 편이다.
당연히 밖으로 나도는 살라자 샤마쉬에게까지 차례가 돌아가기가 어려운 유물이었다.
그리고 설사 있다고 해도 살라자 샤마쉬가 그런 귀한 유물을 비행선 안에 방치할 리가 없었다.
그런 건 항상 휴대하고 다녀야 할 유물이다.
"가보자. 더 늦기 전에.”
반태수는 날아서 폭포 뒤로 갔다. 그러니 동굴에 들어가 버리면 찾기가 정말 어려워진다. 아니,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복권에 당첨될 정도의 운이 따르지 않는 한.
세 명의 승무원이 손발에 장비를 착용했다. 절벽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장비였다.
당연히 마도구였다.
그들은 비행선과 연결된 로프를 타고 폭포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바로 절벽에 착 달라붙은 다음, 로프를 제거했다.
그 다음, 반태수가 동굴로 휙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했다.
다만 너무 멀어서 정확히 어느 동굴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근처에 가서 직접 동굴에 하나하나 들어가 확인해 봐야 할 듯했다.
세 명이니 확인은 빠르게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마치 네 발 짐승이 절벽을 달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
반태수는 동굴에 들어간 다음 부유 마법을 중지했다.
동굴 위치는 이 동굴에 대한 설명이 있는 부분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바로 찾지는 못했지만, 비교적 쉽게 찾았다.
영역화를 통해 동굴 안쪽의 정보가 차근차근 밀려오고 있었다.
한데 어느 지점 이상을 넘어가지는 못했다. 무언가가 강제로 영역화가 뻗어나가는 것을 막는 느낌이었다.
예전 유적에서 경험했던 것과 비슷했다.
유적 내부에 있던 문 앞에서 영역화가 차단당했던 경험 말이다.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걸음 걸었을 때, 영역화에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반태수는 걸음을 멈췄다.
방금 영역화에 걸려든 것은 동굴 바깥쪽이었다. 비행선이 있는 쪽에서 사람들이 폭포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세 명.’
누군지도 알 것 같았다. 비행선의 승무원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손발에 끈끈이라도 달린 것처럼 절벽에 붙어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반태수는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했다.
영역화를 통해 그들이 마도구를 장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기척과 소리를 감추는 마도구였다.
최근 워낙 마법에 대해서 파고들었더니 저런 간단한 마도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분석할 수 있었다.
저들의 목적은 뻔하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감시하려는 것이다.
그걸 전부 살라자 샤마쉬에게 보고하겠지.
그렇다고 저 승무원들에게 나쁜 감정이 드는 건 아니었다. 솔직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저들이 자신을 얼마나 잘 대해주었는데 고작 저런 걸로 기분이 상한단 말인가.
그냥 자신이 잘 조치하면 된다.
반태수는 마법을 펼쳤다. 동굴 입구를 가리기로 한 것이다.
동굴 입구를 절벽처럼 보이게 만들면 그만 아닌가. 그 정도는 아주 간단했다.
동굴 입구를 환영 마법으로 가린 다음, 혹시 저들이 환영에 손을 댈 경우를 대비해 약간의 물리력을 부여해주었다.
마력 역장을 가볍게 펼치고 거기에 물리 속성을 가미하면 끝이다.
주변 절벽과 약간의 질감 차이가 나겠지만, 저들이 손발에 착용한 마도구 때문에 아마 가려질 것이다.
반태수는 그렇게 조치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저렇게 해뒀는데도 동굴을 찾아서 들어오면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여긴 유적도 뭣도 아니고 그저 마수가 사는 동굴일 뿐이니 별로 거리낄 것도 없었다.
다만, 자신의 실력이 너무 과하게 노출되는 것이 좀 부담스러울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영역화를 통과시키지 않는 지점에 도착했다.
"그 양반, 진짜 저런 거 좋아하네.”
정확히 영역화가 막힌 지점부터 새까만 어둠이 안쪽으로 쫙 깔려 있었다.
아예 안 보였다.
어쩌면 어둠이 깔린 게 아니라 검은 장막으로 통로를 막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반태수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어둠 속으로 성큼 들어갔다.
감각 교란이 올 거라고 예상했으나, 그런 건 없었다. 정말로 검은 장막이었다.
어둠 속으로 들어 왔는데 단 한 순간도 어둡지 않았다.
반태수는 뒤를 돌아봤다. 동굴 입구까지 아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밖에서 안쪽을 보는 것만 막아내는 모양이다.
영역화를 이용해 그 검은 막의 정보를 빨아들이면서 다시 안쪽으로 향했다. 거기에 두뇌를 하나 할당했다.
처음 나타난 마수는 갑각 트롤이었다.
반태수는 반가운 마음까지 들었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갑각 트롤이란 말인가.
정보를 확인하니 그냥 갑각 트롤이 아니라 변종 갑각 트롤이었다. 얼마 전 발굴한 유적을 지키던 갑각 트롤과 똑같은 놈이었다.
반태수는 일단 내구력 강화부터 걸었다.
그리고 마력의 실을 뽑아 빠르게 마법진을 그렸다. 관통과 침습, 그리고 전격을 하나로 엮은 술식이었다.
반태수가 마력을 움직이자마자 갑각 트롤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유적에 있던 놈들은 자리를 지켰는데, 저놈은 그게 아니다. 원래 마수는 저게 정상이다. 사람을 보면 당연히 달려들어야 할 것 아닌가.
갑각 트롤의 속도는 제법 빨랐지만, 반태수가 술식을 완성하는 속도보다는 훨씬 느렸다.
꽈르르릉!
한 줄기 벼락이 쏟아져 나가 갑각 트롤의 명치를 직격했다.
내부로 스며든 강력한 전격이 갑각 트롤의 내부를 그대로 구워 버렸다.
발끝부터 뇌까지 전부 익어 버렸으니 갑각 트롤이 살아날 방법은 없었다. 재생력이고 뭐고 한 방에 끝나 버린 것이다.
쿠웅.
갑각 트롤이 달려오던 힘 때문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반태수는 갑각 트롤을 유유히 지나갔다.
조금 더 가니 또 검은 막이 나왔고, 그걸 지나니 갑자기 무언가가 후두둑 날아왔다.
아무리 내구력 강화를 쓰고 있다 해도 굳이 저런 걸 맞아줄 이유는 없었다.
순식간에 완성된 실드가 날아오던 것들을 막아냈다.
투두두두둑!
확인해보니 길쭉하고 가느다란 침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거대한 벌 한 마리가 허공에 떠 있었다.
그리고 꼬리를 바짝 세워 앞을 겨누고는 계속해서 침을 쏟아냈다.
투두두두둑!
끊임없이 실드에 침이 날아와 튕겨났다.
반태수는 영역화를 통해 들어오는 거대한 벌의 정보를 확인하며 아까 갑각 트롤에게 쓴 마법을 똑같이 썼다.
꽈르르릉!
벼락이 날아가 거대 벌의 꼬리에 꽂혔다.
빠지지지지직!
거대 벌이 허공에서 경련하더니 바닥에 툭 떨어졌다.
처음 기습 말고는 정말 별 거 없었다.
반태수는 거대 벌을 아공간에 챙겼다. 처음 보는 마수니 한 번쯤 연구를 해봐도 괜찮을 듯했다.
마수를 챙긴 반태수는 바로 다음 단계로 건너갔다.
이 동굴에 기묘한 마력이 흐르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마력이 아마 마수들을 오랜 세월 동안 버틸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반태수는 이미 두뇌 하나를 할당해 그 마력을 분석 중이었다.
‘그나저나 마수가 너무 싱거운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마수가 점점 강해진다고 하니 좀 더 들어가면 격렬한 싸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반태수는 그런 기대를 하며 다음 마수가 있는 곳으로 넘어갔다.
***
"이번이 몇 번째지?”
"다섯 번째.”
한 번에 세 명이 각각 하나의 동굴을 맡아서 들어갔으니, 벌써 15개의 동굴을 확인한 셈이다.
하지만 아직도 반태수를 찾지 못했다.
분명히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거리가 워낙 멀어서 약간의 착시가 있었던 모양이다.
"슬슬 돌아가는 게 어때? 왠지 괜한 일을 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일단 시작했으면 끝은 봐야지. 그리고 혹시 알아? 곤란을 겪고 있을지.”
"그 마법사가 곤란을 겪으면 우리가 가도 안 될 거 같은데.”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자고. 우리가 가서 실낱같은 기회를 만들 수도 있는 거잖아?”
그 말에 남은 두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쩌겠는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같이 해야지.
그들은 그 뒤로도 주변 동굴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반태수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처음부터 잘못 생각한 거 같아.”
"우리가 아니라 너겠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무튼 눈에 보이는 동굴은 찾아봐야 의미가 없지 않을까?’’
"그건 또 무슨 소리지?”
"마법사니까 환영 마법 같은 걸로 동굴 입구를 가리지 않았을까?”
"우리가 쫓아올까봐?”
"마법사는 원래 항상 조심하는 자들이잖아. 가능성 있다고 보는데?”
"시간 얼마 없다. 할 거면 빨리빨리 움직여.”
그들은 즉시 움직였다. 동굴이 아니라 벽을 짚어가며 환영 마법이 걸린 동굴을 찾았다.
그리고 결국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다.
"여기 같은데?”
"그냥 단순한 환영 마법이 아니라 뭔가로 막아놨어.”
“실드 아닐까?”
"일단 부숴야 하는데, 그럼 몰래 가는 의미가 없어지는 거 아냐?”
그들은 잠시 고민했지만, 그래도 부수고 들어가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살라자 샤마쉬에게 보고할 거리 하나 정도는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마법사님이 좀…… 서운해 하시거나 화를 내실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지.”
그들은 마력을 동원해 동굴 입구를 막은 실드를 부쉈다.
쩌어어어엉!
실드가 산산이 부서지며 큰 소리를 냈다.
“들켰겠네. 마도구 꺼도 되겠다.”
"안에 마수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마도구는 일단 끄지 마.”
그들은 그런 말을 나누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