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 동굴폭포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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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폭포 뒤 절벽에 있는 글을 쭉 읽었을 때, 어느 순간부터 마치 머릿속에 술식과 지식을 마구 때려 박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뇌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을 때, 두뇌를 하나 더 할당했다. 반태수가 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비행선에서 열심히 빨아들였던 술식들이 거기 뒤섞였다.
그 와중에 글은 계속 읽고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그리고 폭포를 보면서 받은 영감이 거기에 스며들었다.
폭포의 모든 글을 읽었을 때, 머리에 새기듯 기억한 모든 문구와 문자들이 뒤섞이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그것들이 낱낱이 흩어졌다가 다시 조립되면서 반태수는 벽을 넘었다.
그동안과 달리 무아지경에 빠져서 벽을 넘은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면서 벽을 넘었다.
그래서 벽을 넘을 때 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제대로 관찰할 수 있었다.
코어가 성장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봤고, 그렇게 성장한 코어 때문에 달라진 마력의 흐름을 감당할 수 있도록 육체가 변화했다.
몸에서 나오는 노폐물은 그 과정에서 나오는, 쓰고 남은 마력 찌꺼기와 몸에 알게 모르게 쌓인 노폐물, 그리고 육체가 변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폐세포들이 뒤섞인 결과물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벽을 넘자마자 폭포로 날아가 대충이라도 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무튼 이번에 벽을 넘는 과정에서 폭포와 폭포 뒤에 쓰인 글귀들이 중심이 되어서인지, 좀 특이한 경험을 했다.
머릿속에 폭포 뒤에 동굴을 뚫는 과정이 떠오른 것이다.
그러니까 폭포 뒤에 동굴을 뚫은 사람의 기억 일부가 반태수의 머릿속에 흘러 들어왔다.
동굴폭포를 처음 봤을 때는 저런 미친 짓을 하려면 막대한 자원과 노동력이 필요했을 거라고 여겼다.
한데 머릿속에 들어온 기억을 확인하고 나니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저 동굴을 뚫은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폭포 밖, 허공에 둥둥 뜬 채 마법을 써서 마치 글을 쓰듯 동굴을 뻥뻥 뚫었다.
길이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고, 높이가 수백 미터나 되는 절벽에 저 모든 글을 완성하는 데까지 고작 몇 시간 걸렸다.
이 기억이 만일 동굴을 뚫은 사람이 남긴 것이라면, 대체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달라는 건가? 아니면 세상에 자신의 위대함을 널리 퍼트려 달라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런 걸 원했다면 본인이 얼마든지 알아서 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그런 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을까?
"어? 이건 또 모르지.”
생각해보니 반태수도 이면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
이제 조금씩 지식과 견문이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제대로 이면세계에 대해 알려면 아직 멀었다.
아무튼 돌아가면 이 자에 대해서 좀 알아봐야겠다.
솔직히 폭포 뒤에 있는 내용의 절반만 사실이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설적인 인물로 남았을 것이다.
언제쯤 활동하던 사람인지는 몰라도 아마 분명히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다.
설사 고대에 살던 사람이라도 이 정도면 어딘가에 기록이 한 줄이라도 있지 않을까?
유적도 많이 발굴했으니 자료도 좀 쌓였을 테고.
'그 자료를 볼 수 없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유적에 관한 것은 5대 가문이 모든 것을 통제한다.
특히 벽화나 책자는 더더욱 철저히 관리한다.
차라리 유물에 대한 관리는 좀 허술한 편이다. 그러니 반태수도 선물로 유물을 몇 개나 받을 수 있었던 것이고.
아무튼 그런 상황을 토대로 유추하면, 고대에 관한 지식이나 소문, 기록을 확인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물어볼 사람은 오스윈 프리든뿐이다. 엄대협에게도 묻긴 하겠지만, 기대는 하지 않는다.
반태수는 자신의 기억에 자리 잡은 장면을 몇 차례 감상하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폭포 위에서 자는 거지만, 마도구 덕분인지 그리 습하지도 않고 정말 쾌적하고 안락한 잠자리였다.
***
다음날 아침.
반태수는 느긋하게 일어났다. 그런데도 아직 시간은 새벽에 가까운 아침이었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니 승무원들과 조종사들은 벌써 일어나서 잠자리를 정리하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뭘 하나 봤더니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식사 준비가 거의 끝났습니다. 원하실 때 말씀하시면 바로 차려드리겠습니다.”
반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승무원들이 달려들어 잠자리를 싹 정리해 버렸다.
“전 좀 씻고 오겠습니다.”
이런 데 왔으니 폭포를 맞으며 씻는 것도 괜찮겠지만, 그건 나중에 혼자 왔을 때 해보기로 했다.
반태수는 비행선으로 들어가 그곳에 설치된 샤워실에서 간단하게 몸을 씻었다.
개운한 표정으로 비행선에서 나오자,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승무원들이 어느새 커다란 테이블에 음식을 잔뜩 차려놨다.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힘을 준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좋은 곳에 와서 그런 모양이었다.
폭포를 보며 먹는 아침은 각별했다.
음식도 맛있었고, 폭포를 비롯해 광활하게 펼쳐진 숲과 강을 보면서 먹으니 기분도 더 좋았다.
승무원들과 조종사들은 따로 먹었다. 그들은 항상 반태수의 시야에 닿지 않는 곳에서 식사를 했다.
비행선에서야 그들이 먹는 식당이 따로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여겼는데, 이렇게 탁 트인 야외에서도 그런 걸 보니, 애초에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은 모양이었다.
같이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굳이 거기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
여기는 여기만의 규칙이 있는 법이다. 이제 며칠 후면 사라질 사람이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었다.
식사를 마친 반태수에게 비서처럼 따라다니던 승무원이 다가왔다.
반태수는 그에게 물었다.
"시간에 맞춰 도착하려면 여기서 언제쯤 출발하면 됩니까?”
"늦어도 내일 정오가 되기 전에는 출발해야 합니다.”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자신이 여기서 확인하려는 동굴은 딱 두 개뿐이었으니까.
사실 더 많은 동굴을 보고 싶지만, 그건 나중에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때 가보기로 했다.
"오늘은 동굴을 살펴볼 겁니다.”
"혼자 가십니까? 저희도 나름대로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데려가십시오.”
승무원의 말에 반태수가 그들을 슥 훑어봤다.
승무원들은 전부 능력자였다. 조종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비행선에는 저들이 쓸 수 있는 전투장비가 잘 갖춰져 있었다.
마도구도 있었고, 유물도 몇 개 있었다.
승무원들의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동굴에는 마수가 있을 수도 있는데 저러는 걸 보면 전투경험이 제법 된다는 뜻이다.
어쩌면 지난번 동굴폭포에 왔을 때, 동굴 속 마수를 상대해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태수는 저들을 데리고 다닐 생각이 없었다.
"혼자서 갈 겁니다.”
승무원이 굉장히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굴 안에 마수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시지요?”
"압니다. 동굴이 작으니 거대 마수는 없을 테고, 그 정도면 대처가 가능합니다.”
사실 거대 마수가 섞여 있어도 이제 어지간해서는 위험할 일이 없을 듯했다.
물론 레벨이 높은 거대마수는 아직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전에 상대했던 바늘거인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육체 능력도 벽을 넘을 때마다 좋아져서 이젠 마력을 안 쓰더라도 하급 마수 정도는 쉽게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아무튼 그러니 굳이 감시자를 주렁주렁 달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그럼 혼자 가시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저희는 반 마법사님께서 동굴을 탐험하시는 동안 쉬면서 점심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혹시 따로 지시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가기 전에 차나 한 잔 마시고 싶군요.”
"네.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차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제법 괜찮은 원두가 있는데 커피로 드릴까요?”
반태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면세계 최고의 원두를 가져와도 아마 못 먹을 것이다.
사실 커피가 살짝 당기긴 하는데, 굳이 여기서 커피를 마실 생각은 없었다.
비행선 내부는 살라자 샤마쉬가 전부 지켜보고 있다고 여겨야 한다.
"그럼 그분께서 즐겨 드시는 차가 있는데, 그걸로 가져가 드릴까요? 드몬트 잎으로 만든 차입니다. 약으로도 쓰는 귀한 약재인데 그 중에서도 붉은 잎으로만 만들었습니다. 굉장히 귀하죠.”
설명만 들어도 혹한다. 반태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걸로 하죠.”
승무원이 빙긋 웃었다.
"드셔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나중에 좀 챙겨드리겠습니다.”
"그럼 고맙죠.”
승무원은 기쁜 얼굴로 비행선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차를 가지고 왔다.
은은한 붉은 빛이 맴도는 차였다.
반태수는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은 다음 천천히 삼켰다.
향이 정말 좋았다. 물론 커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맛도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그것 역시 커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동안 마신 차 중에서는 최고였다.
반태수는 조용히 차를 마시며 폭포를 구경했다.
같은 폭포인데 어제 봤을 때와는 좀 달랐다. 어제는 압도되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벽을 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벽을 넘을 때 기본이 되었던 영감을 폭포로부터 받았기 때문이었다.
반태수의 코어에 폭포로부터 얻은 영감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것이 폭포를 좀 더 친근하게 만들었다.
폭포를 구경하다보니 차를 다 마셨다. 빈 찻잔을 승무원에게 주며 말했다.
"좋은 차네요. 마음에 듭니다.”
승무원이 빙긋 웃었다.
"챙겨놓겠습니다.”
비행선의 승무원들은 정말 친절하고 헌신적이다.
반태수는 문득 저들에게 커피를 대접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게 좀 아쉬웠다.
‘자, 그럼…… 동굴 탐험을 시작해 볼까?’
반태수는 마법을 써서 훌쩍 날아올랐다.
***
반태수는 폭포 안쪽으로 들어간 다음, 아래쪽으로 쭉 내려갔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비행선의 승무원들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다른 동굴은 몰라도 지금 가려는 동굴은 들키기 싫었다.
이 동굴은 다른 곳과 달리 폭포 아래쪽 물속에 있었다.
절벽에 쓰인 글에 등장하는 동굴이었다.
다른 모든 동굴은 그 글의 주인공이 뚫었는데, 이 동굴은 원래부터 있던 동굴이라고 했다.
위치를 워낙 정확히 기록해서 찾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촤악!
반태수는 정확한 위치에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래로 10미터쯤 내려가니 수중동굴이 보였다. 망설이지 않고 바로 동굴로 들어갔다.
당연히 동굴 속도 물로 꽉 차 있었다.
하지만 안으로 쭉 들어가니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푸하!”
반태수는 위로 올라가 숨을 들이마셨다.
지하인데도 공기가 생각보다 쾌적했다.
반태수가 있는 곳은 작은 호수였다. 거대한 동공이 호수를 감싸고 있었다.
일단 호수에서 나가 주위를 둘러봤다.
다른 곳으로 가는 동굴을 찾아야 한다. 이는 모두 절벽의 글에 나오는 정보였다.
동굴은 금방 찾았다. 입구가 크기도 했고, 동공 안이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태수는 호수를 빙 돌아 동굴로 향했다.
그러면서 왜 별로 어둡지 않은지를 생각해봤다.
‘어딘가에서 빛이 들어오고 있어.’
그런데 그게 어디인지 바로 알 수가 없었다. 빛이 비추는 곳이라도 보여야 알아낼 텐데,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반태수는 동굴 입구에 서서 다시 한 번 동공을 찬찬히 살펴봤다.
이번에는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동공에 흐르는 마력에 집중했다.
역시 마력의 흐름이 미묘하게 부자연스러운 지점이 몇 군데 있었다.
즉, 동공 안에 마법이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력의 흐름을 역추적해서 어떤 마법인지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반태수는 차근차근 이 동공에 펼쳐진 마법을 역추적 했다.
굉장히 어려웠다. 아마 어제 벽을 넘지 못했다면 실패했을지도 모르겠다.
반태수는 끝까지 끈기를 잃지 않고 추적한 끝에 마법을 역산해냈다.
단지 빛을 뿜어내는 마법이었다. 한데 단순히 빛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동공 전체에 빛을 엷게 퍼트리는 마법이었다.
상당히 수준이 높은 마법이었다.
반태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역산에 성공한 마법의 술식을 차근차근 되새겼다. 진한 성취감이 온몸을 적셨다.
"재미있네.”
이럴 때마다 마법사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이런 재미를 전혀 몰랐을 것 아닌가.
반태수는 즐거운 표정으로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은 단순했다. 외길이었고, 직선이었다.
그저 그 끝에 유적의 입구가 있을 뿐이었다.
폭포 뒤 절벽에 동굴을 뚫은 자가 만든 유적이었다.
그자는 유적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며 부디 재미있게 즐기라고 첨언했다.
반태수는 그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아치형의 문이 있었고, 그 문에 고대문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즐긴 만큼 얻게 되리라.”
문에 새겨진 고대문자를 해석하면 딱 그랬다.
반태수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문에는 고대문자 말고도 제법 커다란 마법진이 음각되어 있었다.
"이것 봐라?”
그냥 마법진이 아니라 잘못된 마법진이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낙서나 다름없다.
마법진을 유심히 살피니 각 부분을 회전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총 32개의 회전축을 가진 마법진이었다. 그걸 회전시켜 제대로 된 마법진을 만드는 퍼즐문제였다.
반태수가 눈을 반짝이며 빠르게 마법진을 이리저리 돌렸다.
순식간에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거기에 마력을 불어 넣으니 입구가 천천히 열렸다.
밖에서는 유적 안쪽을 아예 볼 수가 없었다. 그냥 새까맣기만 했다.
반태수는 그 어둠 속으로 성큼 발을 내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