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비행선 >
==================
반태수는 옥상에 착륙한 비행선을 찬찬히 살펴봤다.
길이는 30미터에 폭이 10미터쯤 되는 듯했다.
전체적인 모양은 직사각형인데, 모서리나 꼭짓점을 둥글게 처리해서 약간 부드러워 보였다.
문이 열려 있었는데, 그것이 바닥으로 이어지는 계단 역할까지 했다.
계단 양옆에는 비행선의 승무원과 조종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조종사 세 명에 승무원 여덟 명이었다.
24시간 비행이 가능하도록 구성된 인원이었다.
"대단하군.”
반태수를 따라온 고스탁 메르서가 감탄했다.
"이 비행선 타보신 거 아닙니까?”
여기서 살라자 샤마쉬가 유물을 이용해 거대 마수를 가두는 걸 봤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는 이렇게 볼 겨를이 없었네. 워낙 급하게 일정이 결정되어서.”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상대는 5대 가문의 직계, 게다가 다짜고짜 비행선에 태워서 거대 마수를 잡으러 갔으니 제정신을 유지한 게 다행이다.
아마 8서클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으리라.
"그나저나 그분이 안 보이는군.”
고스탁 메르서의 말에 승무원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그분께서는 비행선만 보내셨습니다.”
반태수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혹시 같이 다니자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그분께서 반 마법사님을 자신처럼 모시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뭐든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럼 일단 안내부터 부탁하죠.”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고 고스탁 메르서를 쳐다봤다.
"교수님도 같이 가시죠? 비행선 구경은 해보셔야 할거 아닙니까.”
고스탁 메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지난번에는 그저 비행선에 타고 있다가 거대마수 잡는 걸 구경만 하고 끝났는지라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조차 못했다.
아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두 사람은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비행선에 올라탔다.
비행선 내부는 굉장히 멋있었다.
화려하면서도 고아함이 가득한 인테리어였다.
비행선 내부는 넓고 쾌적했다.
가장 먼저 구경한 곳은 조종실이었다.
반태수는 조종실을 보며 눈을 번득였다.
예전 유적에서 본 제어실의 느낌이 확 풍겼다.
물론 그 정도로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마도구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걸 이용해 비행선을 조작하는 모양이었다.
마도구와 연결된 각종 계기판들을 보니 마법과 과학의 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를 볼 때도 느꼈지만, 이면세계는 마법을 이용한 부품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섞어서 쓴다.
그것이 극대화된 곳이 바로 여기 비행선의 조종실이었다.
반태수는 이 안에 있는 마도구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은 다음 밖으로 나갔다.
아직 시간은 많다. 남은 열흘 동안 여기 있는 모든 마도구를 낱낱이 파헤쳐 주리라.
조종실 다음으로 간 곳은 식당이었다.
굉장히 훌륭한 식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5대 가문의 직계를 태우고 다니는 비행선이니 당연하다,
식당뿐 아니라 모든 시설이 번쩍번쩍 빛났다.
비행선은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로 지내는 곳은 2층이고, 3층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가는 곳이었다.
3층은 일종의 전망 시설이었다. 그리고 거대 마수를 상대할 때 쓰는 장소이기도 했다.
3층은 말하자면 옥상이었다. 사방은 물론이고 천장까지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졌는데, 모든 유리를 개폐할 수 있었다.
맨몸으로 비행선 꼭대기에 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난간 같은 안전장치는 되어 있었다.
고스탁 메르서도 3층에 와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살라자 샤마쉬가 고대 유물을 이용해 거대 마수를 가두는 광경을 본 것이고.
사실 반태수는 3층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1층에 관심이 많았다.
1층에 가려면 2층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아니면 외부에서 1층으로 통하는 문을 열거나.
1층은 일종의 창고였다.
화물을 보관하거나, 식자재를 보관하는 창고 말이다.
그리고 주방이기도 했다.
비행선에서 먹는 요리는 1층에 있는 주방에서 만든다. 그걸 2층의 식당으로 올려 대접하는 것이다.
승무원들의 숙소도 1층에 있었다.
창고라고 해서 1층의 시설이 열악한 건 아니었다. 승무원들의 숙소도 충분히 훌륭했다. 다만 2층 시설에 비해 좀 부족할 뿐이지.
하지만 세상 어떤 걸 비행선 2층의 시설과 비교해도 부족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뭐든 최고로 갖다 맞췄는데.
비행선을 그야말로 샅샅이 구경했다.
반태수가 비행선에서 가장 특이하게 본 것은 살라자 샤마쉬의 개인 연구실이 있다는 점이었다.
살라자 샤마쉬는 자신의 개인 연구실조차 반태수에게 마음껏 써도 좋다고 했다.
안에 있는 장비들은 돈 주고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귀한 것들이었다.
반태수는 던전에서 보물 상자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장비들만 연구해서 재현할 수 있어도 이번 일에 대한 보상으로는 차고 넘칠 듯했다.
연구실에 들어갔을 때, 고스탁 메르서는 굉장한 고민에 빠졌다.
비행선을 빌린 열흘 동안 연구실에서 살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결국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아직 실험할 것이 없었으니까.
새 주제를 잡아야 하는데, 그건 이런 실험을 위주로 하는 연구실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책과 논문이 쌓인 곳에서 해야 하는 일이다.
비행선 구경을 끝낸 고스탁 메르서는 연구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인생에서 큰 충격을 주었던 커피와 쿠키를 잔뜩 선물로 받지 않았나.
아마 당분간, 그러니까 커피와 쿠키가 떨어질 때까지는 굉장히 행복한 연구 생활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고스탁 메르서를 내린 비행선이 문을 닫고 천천히 떠올랐다.
그때부터 반태수의 분석이 시작되었다.
***
‘재미있네.’
비행선을 분석하는 것은 굉장히 재미있었다.
지금까지는 단일 마도구나 유물을 분석했다.
보안을 뚫고 그 안에 새겨진 술식을 뽑아내 분석하고 그걸 토대로 자신의 마법에 한 줄의 지식을 더하고.
그 정도가 다였다.
한데 비행선의 분석은 그렇지 않았다.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술식 하나 분석한다고 끝나지 않았다.
그 술식이 다른 술식과 이어지고, 그렇게 이어진 술식이 전혀 다른 기능을 발현하며 발현한 기능이 또 다른 곳에 영향을 미친다.
그걸 하나하나 추적해 나가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마치 복잡한 수학 문제를 푸는 것 같기도 하고, 꼬일 대로 꼬인 퍼즐을 푸는 것 같기도 했다.
일단 비행선의 가장 기본은 부유 마법이었다.
허공에 떠오르는 마법. 사실 반태수도 할 수 있는 마법이다.
한데 이 부유 마법의 술식을 새겨 마도구로 만드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부유 마법의 술식은 다른 마법에 비해 특히나 간섭이 심하다.
부유 마법과 부유 마법 사이의 간섭뿐 아니라 부유 마법과 다른 마법 사이의 간섭도 심하다.
그래서 제대로 처리를 하지 않으면 오작동을 일으킨다.
그것이 비행선의 크기가 커지는 이유 중 하나였다.
부유 마법의 술식을 마법진으로 구성하면 마법진의 크기가 굉장히 커진다.
한데 부유 마법이 새겨진 마도구 하나만으로 비행선을 띄울 수는 없었다.
부유 마법진 하나만으로는 비행선의 고도를 조절할 수 없었다.
부유 마법이 올라갈 수 있는 한계는 명확했다. 비행기보다 훨씬 낮은 높이까지밖에 올라가지 못한다.
그냥 한계까지 올라간 채로 비행을 한다면 별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보다 낮게 날아야 한다면 무게를 이용해 고도를 낮춰야 한다.
그러려면 부유 마법진을 여러 개 운용하고 상황에 따라 마법진 몇 개를 끄면 된다.
그러니 여러 개의 부유 마법진이 필요한 것이다.
예전 반태수가 지나가듯 봤던 비행선의 부유 마법진은 굉장히 컸다.
그 정도 마법진을 여러 개 배치하는데, 다닥다닥 붙일 수도 없고 일정 간격 이상을 띄워야 하니 비행선의 크기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 특수 비행선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도 부유 마법진을 쓴 건 맞다. 한데 예전 반태수가 봤던 다른 비행선에 쓴 부유 마법과는 아예 달랐다.
파생되거나 개량한 마법이 아니라, 애초에 시작부터 다른 마법이었다.
이 역시 보통 마법이 아니었다. 당연히 보안도 철저했고.
하지만 아무리 보안을 철저히 한다고 해도 아공간 팔찌의 보안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반태수는 보안을 가볍게 뚫고 부유 마법을 분석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반태수가 쓰는 부유 마법과 비슷했다.
중력에 역으로 작용하는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높이 올라가면 힘이 약해진다.
마법이기에 가능한 방식이었다.
반태수의 마법도 아예 술식의 기본 원리부터 달랐다.
그러니 총 세 가지 부유 마법이 있는 것이다.
일반 비행선에 쓴 마법, 특수 비행선에 쓴 마법, 그리고 반태수가 만든 마법.
이 중 가장 효율이 높은 것은 반태수의 마법이었다. 단, 개인이 스스로에게 마법을 쓸 때에 한해서.
실제로 물건을 나르거나 비행선을 띄우거나 할 때는 단연 특수 비행선의 마법이 뛰어났다.
반태수는 그 뛰어난 마법을 남김없이 싹싹 훑어서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했다.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비행선에는 부유 마법 말고도 빼먹을 마법이 수두룩했다.
일단 부유 마법과 직접 연결된 조종실의 마법부터 뽑아 먹어야겠다.
***
반태수가 비행선에 탄 지 꼬박 나흘이 지났다.
비행선의 승무원들은 반태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반태수는 가끔 어슬렁거리며 비행선 안을 돌아다니다가 어딘가에 멈춰서 의자를 갖다 앉은 채 시간을 죽였다.
그래, 그건 분명히 시간을 죽이는 거다.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으니까.
하지만 당사자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모양이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럴 거면 비행선은 왜 빌렸단 말인가.
만일 자신이라면 비행선을 타고 평소에는 가기 어려웠던 장소를 가볼 것이다.
그동안 가봤던 장소들 중 인상 깊었던 곳들이나, 말로만 들었던 곳들 말이다.
지금 비행선은 도시 듀라디스를 중심으로 큰 원을 그리며 회전하고 있었다.
그러니 다들 의아해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비행선의 부유감을 느끼고자 탄 거라면 이 특수 비행선을 타지 말았어야 한다.
이 특수 비행선은 아무리 빨리 날아도 땅에 멈춰 있는 것처럼 안정적이니까.
그리고 그런 승무원들의 기색을 반태수도 슬슬 눈치챘다.
보통은 이럴 때, 승무원 쪽에서 반태수에게 어디로 갈 것인지 물어보기라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반태수를 살라자 샤마쉬와 똑같이 생각하며 모시는 중이었다.
어디로 갈지는 언제나 살라자 샤마쉬가 정한다. 승무원들에게는 그걸 물어볼 권한조차 없었다.
반태수는 마침 지나가는 승무원을 잡았다.
승무원이 긴장한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비행선을 타고 어디 갈 만한 곳 없습니까? 남은 6일을 전부 소모해서 다녀올 정도면 좋겠는데."
승무원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마치 별이 눈에서 쏟아지기라도 하는 듯했다.
"당연히 있습니다. 그것도 제법 여러 군데가 있습니다.”
승무원은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설명이 귀에 쏙쏙 들어올 정도로 말을 잘 했다.
굉장히 많은 장소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 중에서 반태수의 호기심을 강하게 끈 건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세계수.
진짜 세계수가 아니라 살라자 샤마쉬가 붙인 이름이었다.
그 정도로 거대한 나무라고 했다.
나무 근처에는 일반인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당연히 마력도 넘쳐흘렀고.
그리고 그 생명력과 마력에 홀려 모여든 마수들이 엄청나게 많다고 했다.
마수들이 서로 영역을 구분해서 서식하는 모습을 세계수 꼭대기에서 보면 그렇게 장관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동굴 폭포.
어마어마한 규모의 폭포였다. 길이가 수십 킬로미터에 높이가 수백 미터라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한데 그게 끝이 아니라 폭포 뒤쪽에 무수한 동굴이 뚫려 있다고 한다.
살라자 샤마쉬도 그곳의 동굴 몇 군데를 탐험했는데, 동굴마다 넓이도 깊이도 다 다르고, 어떤 동굴에는 마수나 동물도 살고 있다고 한다.
한데 동굴에 인위적인 흔적이 제법 많다고 하니, 어쩌면 누군가 그 동굴을 전부 뚫었을지도 모른다.
수십 킬로미터의 길이에 수백 미터 높이의 절벽에 무수히 동굴이 있으니 그 수가 몇이나 되는지도 모른다.
그런 동굴을 누군가 인위적으로 뚫었다니 없던 호기심도 생길 지경이었다.
세 번째는 벼락숲이다.
벼락숲은 1년 내내 벼락이 비처럼 쏟아지는 곳이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당연히 위험하지만, 아니, 그저 위험하다는 말로는 끝나지 않겠지만, 밖에서 지켜보기만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무수한 벼락이 쏟아지는 장면을 깜깜한 밤에 지켜본다면 대체 얼마나 장관이겠는가.
벼락이 워낙 많이 떨어져서 근처에는 별다른 마수도 없다고 하니, 구경하기에도 좋고, 며칠 지내기에도 좋다고 한다.
그밖에도 대단히 큰 강이나 호수, 아니면 휴양이나 볼거리가 많은 도시까지 있었지만, 반태수의 흥미를 강하게 끈 것은 셋뿐이었다.
이 중에서 반태수가 선택한 것은 동굴폭포였다.
인위적인 동굴이 잔뜩 있는 곳이니 당연히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반태수는 동굴폭포의 얘기를 듣는 동안 고대 유적의 느낌을 진하게 받았다.
시간은 별로 없지만, 일단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중에 혼자서라도 오면 되니까.
생각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