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연구보조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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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탁 메르서라고 하네. 내가 의뢰를 넣었지.”
"반입니다.”
"반? 성은?”
"없습니다.”
"특이하군. 원한다면 내가 행정 과정을 도와줄 수도 있는데, 어떤가?”
"괜찮습니다.”
고스탁 메르서는 신기한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그런데 자네, 정말 마법사 맞나?”
반태수는 그가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 안다. 몸을 휘감고 있는 이면세계의 마력 때문이다.
대부분의 능력자나 마법사들은 반태수를 능력자라고 판단한다.
아직까지 이면세계의 마력을 꿰뚫고 그 안에 있는 진짜 반태수의 코어를 확인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8서클 마법사쯤 되면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반태수의 코어를 보지 못했다.
고스탁 메르서의 뒤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일반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마법사였다.
‘5서클이네.’
5서클의 마법사는 예전 아쉬덴 길드와 함께 유적을 탐사할 때 만났던 헬뮤트 보겔과 오스윈 프리든 두 사람을 겪어봤다.
헬뮤트 보겔과 오스윈 프리든은 같은 5서클임에도 코어 자체의 차이가 확연했다.
한데 지금 눈앞에 있는 저 5서클 마법사도 상당히 양질의 코어를 가지고 있었다.
오스윈 프리든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였다.
반태수는 그의 코어를 잠시 관찰하다가 다시 고스탁 메르서가 가진 8서클 코어를 확인했다.
여덟 개의 마력 원통이 느릿느릿 회전하고 있었다. 여덟 개의 원통이 겹쳐 있으니 간격이 굉장히 촘촘했다.
5서클 코어와 8서클 코어를 직접 비교하니 대충 서클이 늘어나면서 코어가 어느 정도로 촘촘해지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코어가 12개쯤 있으면 꽉 차겠는데?’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성장하는 걸까?
아무래도 그걸 알려면 이면세계의 마법사들이 코어를 형성하는 방법에서부터 그걸 성장시키는 과정까지 면밀히 관찰하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고스탁 메르서가 뒤에 있는 마법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마티아스 파사르라고 하네. 5서클 마법사지.”
"마티아스 파사르입니다.”
"반입니다.”
마티아스 파사르는 담담한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고, 반태수는 그 손을 맞잡았다.
순간 은밀한 마력이 손바닥을 통해 스며들어왔다. 물론 그 마력은 반태수의 몸을 휘감고 있는 마력에 튕겨 되돌아갔지만.
마티아스 파사르는 순간 어금니를 꽉 물었다. 마력이 반탄되어 몸을 파고드는 충격 때문에 큰 고통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걸 티낼 수는 없었다.
반태수는 별 내색하지 않고 맞잡은 손을 몇 번 흔들고는 놔주었다.
방금 마티아스 파사르가 보여준 행동은 명백한 적대감이었다.
표정이나 눈빛이 담담해 보이긴 하지만, 좀 더 깊이 파고들면 그 안에 적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처음 보는 놈이 왜 적대감을 갖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반태수는 고스탁 메르서가 뒤이어 소개한 사람과도 악수를 했다.
그 사람은 이곳 연구소의 운영실장이었다.
한 마디로 이 연구소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사람이었다.
8서클 마법사가 세 명이나 있는 연구소지만, 마법사들은 연구 외에는 다른 일에 심력이나 시간을 쏟는 걸 굉장히 꺼려한다.
그건 자신의 연구 결과물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연구만 하고 그 뒤의 일은 운영실장이 전부 처리하는 것이다.
이건 다른 연구소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각 연구소의 운영실장들이 실질적으로 연구소를 이끈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그렇게 대충 인사를 마무리하자, 운영실장이 나섰다.
"일단 임시 패스워드를 정식 등록하고 연구가 진행될 동안 머무실 숙소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스탁 메르서는 반태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럼 잘 다녀오게. 귀찮더라도 우리 운영실장님께 잘 협조해 드리게. 절차가 마무리 되면 내 연구실로 바로 오면 되고.”
"그러죠.”
반태수는 고스탁 메르서가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걸 보며 운영실장 옆으로 다가갔다.
마티아스 파사르가 쏟아질 것 같은 눈으로 노려보는 것은 덤이었다.
반태수는 피식 웃고는 운영실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연구소에 연구보조로 등록하는 절차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았다.
그냥 대충 패스워드나 정식 등록하고 숙소나 알려주면서 끝날 줄 알았는데, 신분증을 통해 확인한 소속 도시에 연락해 진짜 그 도시의 일원인지, 주소는 맞는지, 그리고 사용하는 스마트폰이 본인 명의인지까지 확인했다.
진짜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라, 향후 문제가 생겼을 때에 대응하기 위한 절차였다.
아무튼 거기까지 한 다음 숙소를 배정 받았는데, 연구소 내에 마련된 숙소와 외부에 마련된 숙소 중에 선택할 수 있었다.
반태수는 외부를 선택했다.
연구소 주변에 너무 아무것도 없어서 숙소까지 연구소에 두면 쉬는 시간을 빼앗길 수도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외부 숙소는 호텔이었는데, 여기서 차를 타고 20분쯤 가야 한다.
그게 귀찮아서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숙소를 연구소 내에 마련한다고 한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연구소에 마련된 숙소를 확인했는데, 보자마자 호텔로 정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좁고 시설도 대단치 않았다.
딱 잠만 자는 용도로 쓰이는 숙소였다.
숙소를 외부로 정하는 순간, 운영실장이 호텔 이름을 알려주었다.
연구소와 연계된 호텔이었는데, 찾아가면 정해진 수준의 객실을 대여할 수 있다고 했다.
아마 업그레이드도 가능할 것이다. 개인이 돈을 지불한다면.
그거야 호텔에 가서 확인해도 되니, 이제 슬슬 고스탁 메르서의 연구실로 가도 될 듯했다.
"한데 짐이 아예 없으시군요.”
운영실장이 신기한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불과 얼마 전에 도착한 다른 연구보조 마법사인 마티아스 파사르만 해도 얼마나 많은 짐을 들고 왔는지 모른다.
그래서 숙소에 짐을 다 넣으니 진짜 딱 잠잘 공간만 남았다.
마티아스 파사르는 그걸 또 당연하게 여겼고. 아니, 그 뿐 아니라 대부분의 연구 마법사들이 비슷했다.
한데 눈앞에 있는 이 반이라는 마법사는 다른 마법사와 참으로 많은 것이 달랐다.
아직까지 성이 없이 이름만 쓰는 걸 봐도 알 수 있었다.
성을 받지 않은 마법사는 이번에 처음 봤다.
그리고 숙소를 외부로 잡는 마법사도 손꼽힐 정도였다.
짐이 아예 없는 마법사도 처음이었고.
"혹시라도 불편한 점이나 원하는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시면 됩니다. 24시간 연락 가능한 번호입니다."
운영실장은 그렇게 말하며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새까만 명함에는 딱 전화번호 하나만 새겨져 있었다.
반태수는 명함을 받고 연구실로 향했다.
물론 연구실까지는 운영실장이 안내해 주었고.
***
연구실에 들어선 반태수는 반짝이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곳곳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눈만 돌리면 거기에 마도구가 있었다.
그냥 마도구가 아니라 마법 연구나 실험에 필요한 마도구들이었다.
그 연구실 한가운데에 고스탁 메르서와 마티아스 파사르가 앉아 있었다.
고스탁 메르서는 반태수가 들어오는 걸 보고는 손을 번쩍 들어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반태수가 다가가자, 그가 말했다.
"얼른 오게. 굳이 같은 영상을 두 번 보지 않아도 되겠군. 얼른 와서 이것 좀 보게.”
반태수는 빠르게 다가가 테이블 위에 놓인 제법 큰 태블릿을 확인했다.
큰 화면에 영상이 재생되는 중이었다.
"내가 이번 연구에서 이루고자 하는 지향점일세.”
무언가를 촬영한 화면이 아니라 시뮬레이션을 통해 만들어진 영상이었다.
가상의 마을이 화면 안에 있었고, 그 마을에 푸른 물감 같은 것이 스며들고 있었다.
반태수는 그걸 보자마자 대번에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유적지를 감싸던 바로 그 마력에 대한 기억이.
거의 흡사한 움직임이었다.
푸른색이 마을을 완벽하게 감쌌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빠르게 붉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을 전체가 붉은 장막에 가뒤졌다.
"푸르고 붉은 색은 마력을 의미하네. 붉은 마력 장막이 마을 외부와 내부를 차단하는 것이지. 그저 물리력으로 차단하는 게 아닐세 좀 더 고차원적인 차단막이지.”
고스탁 메르서는 그렇게 말하고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반태수와 마티아스 파사르를 번갈아 바라봤다.
"저걸 완성하는 것이 이번 연구의 목표일세. 어떻게, 가능할 것 같은가?”
마티아스 파사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오, 그런가? 자신감이 넘치는군.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판단했나?”
고스탁 메르서의 질문에 마티아스 파사르는 순간 당황했지만 차분히 대답했다.
"교수님의 능력이 저걸 구현하지 못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전 모자라는 손을 돕기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고스탁 메르서가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연구보조를 모집할 때는 분명히 자신의 생각도 저 말과 똑같았다.
"뭐, 그렇긴 하지. 한데 왜 자네는 대답을 안 했나? 설마 자신이 없나?”
반태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술식도 안 보고 연구 진행상황도 확인하지 않았는데 될지 안 될지 어떻게 압니까? 그냥 물리적 차단도 아니고 더 고차원적인 차단이 뭔지도 아직 감이 안 잡히네요.”
짐작하는 바는 있지만, 그게 진짜로 그건지 확신이 되지 않았기에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다.
반태수의 말에 고스탁 메르서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마티아스 파사르는 비웃음과 질투가 뒤섞인 눈으로 반태수를 반쯤 노려보다시피 했다.
"하긴. 일단 그것부터 확인하는 것이 순서이긴 하지.”
고스탁 메르서는 눈을 번득이며 반태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전에…… 한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네.”
반태수는 그게 뭐냐는 듯 쳐다봤다.
"내가 마법사 전용 웹에 올렸던 문제, 어떻게 생각하나?”
반태수가 어깨를 한 차례 으쓱 했다.
"마법사 전용 웹에 접속할 때 푸는 문제랑 비슷한 거 아닙니까? 논리구조가 명확한 마법진을 만들어서 빈 술식 채우기."
그 말에 반응한 것은 고스탁 메르서가 아니라 마티아스 파사르였다.
"뭐? 그걸 어떻게 거기에 비교해? 지금 장난해? 누가 봐도 차원이 다른 문제인데!”
반태수가 피식 웃었다.
"지금 난이도 얘기 하는 건가? 어차피 같은 계열인데 난이도 올려봐야 시간이 더 들어가는 거 말고 달라지는 게 뭐지?”
"단순한 난이도 문제가 아니야! 그 안에 들어가는 술식에 적용되는 법칙부터 차이가 난다고!”
술식의 법칙? 반태수는 잠시 그게 뭔지 생각해봤다. 자신은 지금까지 그런 건 생각해보지도 않고 마법을 써 왔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문제는 술식의 논리구조 문제였다. 이런 건 아무리 복잡해봐야 푸는 방법은 정해져 있다.
적어도 반태수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게 아니면 답이 안 나오는 문제다. 애초에 모르는 술식의 빈 부분을 채운다는 것이 말이 안 되니까.
실제로 문제로 낸 마법진의 술식을 모두 완벽하게 완성한다고 해도 그게 대단한 마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건 그냥 발광 마법이다. 빛이 얼마나 오랫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뿜어져 나오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른 마법으로도 비슷한 논리구조의 술식을 구성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반태수가 보기에 발광 마법이 가장 편하고 안전하다.
아무튼 이건 문제를 위한 마법이지, 진짜 마법을 위한 마법이 아니었다.
그게 반태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티아스 파사르는 생각이 아예 다른 모양이었다.
반태수는 굳이 이런 쓸데없는 문제로 어설픈 마법사와 논쟁할 생각이 없었다.
"좋을 대로 생각해. 난 별로 관심도 없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 것 같은데?”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고스탁 메르서를 쳐다봤다.
그는 지금 굉장히 흥미로운 표정으로 반태수와 마티아스 파사르의 대화를 지켜보던 중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로 마법사 전용 웹의 오류가 아니라 실력으로 그 짧은 시간에 문제를 풀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비슷한 문제를 내가 하나 낼 테니 또 풀어볼 수 있겠나?”
고스탁 메르서의 물음에 반태수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실력 테스트는 끝난 걸로 아는데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습니까?”
고스탁 메르서가 손가락 하나를 들며 씨익 웃었다.
"자네 실력이 진짜라면 시간은 별로 안 들 걸세. 문제는 이미 있거든.”
그가 태블릿 하나를 내밀었다.
아까 말했던 그 술식 채우기 문제였다.
반태수는 피식 웃고는 테블릿 위에 그려진 미완성 마법진을 슥슥 완성시켰다.
시간을 굳이 재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길어봐야 몇 분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마티아스 파사르의 표정이 확 굳었다.
반태수는 슬쩍 시선을 돌려 마티아스 파사르를 쳐다봤다. 이제 자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느냐는 듯이.
그리고 고스탁 메르서는 굉장히 놀란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술식 계산 속도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아까 반태수와 마티아스 파사르의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본 것은 반태수가 이 술식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러려면 마법 실력이 그에 합당한 수준에 올라야 한다.
‘최소 7서클 이상이야.’
이걸 꿰뚫어 봤다는 것이 7서클 이상이라는 뜻이다. 그 이하에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
7서클에 오르면서 마력 세계를 보는 시야가 확장되어야만 한다.
7서클 이상인데 술식 계산 속도는 8서클을 상회해!’
이런 인재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고스탁 메르서는 자신도 모르게 반태수에게 말했다.
"자네, 혹시 우리 연구소에서 정식으로 일할 생각 없나?”
반태수에게 물었는데 반응은 마티아스 파사르에게서 튀어나왔다.
"말도 안 돼!”
반태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이번 연구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마티아스 파사르는 저러다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획 돌려 반태수를 바라봤다.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여긴 바르캄스테드 마법 연구소다. 마법사라면 누구든 들어가고 싶어서 목을 매는 곳이다.
한데 그걸 저렇게 거절한다고? 아니, 보자마자 영입제안을 한다고? 저 고스탁 메르서가?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오기 힘든 곳이 바로 여기 바르캄스테드 마법 연구소다.
마티아스 파사르의 눈이 질시와 분노로 물들었다. 그는 반태수를 노려보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고스탁 메르서는 마티아스 파사르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금 그의 모든 호기심을 반태수가 빨아들인 것이다.
그는 반태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대체 몇 서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