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연구보조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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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탁 메르서는 화면에 무수히 떠오르는 불합격 메시지를 보며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 연구는 손이 제법 많이 가서 더 이상은 혼자 진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연구를 보조할 마법사를 한 명 뽑기로 했다.
원래는 아는 마법사들을 통해 인재를 조달받으면 되지만, 그렇게 해서 오는 마법사라고 해봐야 다 거기서 거기였다.
전부 아는 놈들일 텐데, 그놈들이 이번 연구를 보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의 능력은 자신이 아주 충분히 알고 있으니 이 판단은 전적으로 옳다.
아무튼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이 마법사 전용 웹이다.
이곳 의뢰 게시판에서 연구보조를 뽑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실력을 봐야 하니 마법사 전용 웹의 기능을 이용해서 테스트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이 문제였다.
마법진에서 빈 술식을 채우는 문제인데,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였다.
하지만 이 정도 문제는 풀 수 있어야 자신의 연구를 도울 수 있다.
고스탁 메르서는 그저 잡일만 하는 마법사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제목 때문인지 내용 때문인지 게시글을 읽는 사람이 넘쳐났고, 테스트에 임하는 사람도 무수히 많았다.
미리 입력해둔 답이 있기에 그것과 어긋나는 건 자동으로 탈락하게 설정해 두었다.
지금 정신없이 울리고 있는 알람이 바로 탈락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가뭄에 콩 나듯이 합격 알람도 울렸다.
화면이 초록색으로 점멸하며 짧은 음악이 흐른다.
오늘이 게시글을 올린 지 사흘 째였다. 슬슬 이 정도로 마무리해도 될 듯했다.
“가만 보자…… 합격자는 총 일곱 명인가?”
합격한 사람들이 제출한 정답은 자동으로 따로 빠졌다.
"자, 그럼 확인해 볼까?”
답이야 맞췄지만, 술식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도 중요했다. 그걸 봐야 이 사람이 마법에 대한 센스가 있는지, 현재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좀 더 세밀하게 판단할 수 있다.
"일단 첫 번째는…… 17시간 34분? 좀 오래 걸렸는데? 아무리 그래도 10시간 안에는 풀어줘야 하는데.”
술식 과정을 확인한 고스탁 메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센스는 나쁘지 않네. 기본도 충실하고.”
고스탁 메르서는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답을 확인했다.
두 번째 정답자는 12시간 정도 걸렸고, 기본이 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세 번째부터 다섯 번째 까지는 20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건 센스고 뭐고 너무 느려서 안 된다. 과정 역시 별 볼일 없었다.
여섯 번째를 확인한 고스틱 메르서의 눈이 커다래졌다.
"다섯 시간? 이걸 다섯 시간 만에 풀었다고? 대단한데? 어디 보자…… 오! 과정도 더 할 나위 없이 깔끔해. 하긴 이렇게 깔끔하니 다섯 시간 만에 풀었지.”
아직 한 명 남았지만 고스틱 메르서는 이 사람을 연구보조로 뽑기로 거의 마음을 굳혔다.
사실 뒤는 볼 필요도 없다. 이보다 더 잘한 사람이 나올 리 없으니까.
하지만 고스틱 메르서는 그럼에도 확인을 했다. 괜히 하나 남기면 뭔가 찜찜해서 계속 신경이 쓰일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마지막 정답자의 풀이 시간을 확인한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뭐9? 4분20초? 이게 뭐야? 오류인가?”
그 복잡한 술식을 고작 4분20초 만에 푼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내가 이걸 풀어도 30분 넘게 걸릴 것 같은데?”
서클이 올라가면 두뇌 회전도 빨라진다. 그러니 저 서클 마법사에 비해 술식 계산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그럼에도 저 술식을 모르는 상태에서 풀려면 30분 정도는 투자해야 한다.
한데 4분20초라니.
"무슨 전설의 대마법사도 아니고.”
고스틱 메르서는 술식 과정을 확인했다. 그건 더 믿을 수 없었다.
대체 왜 이런 순서로 술식을 완성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한 가지 가능성은 있다.
그냥 눈으로 술식을 모두 푼 다음 마지막에 마법진을 완성하는 그림만 그렸다면 말이 된다.
술식을 풀이하면서 하나하나 마법진을 완성해 나간 것이 아니라 통째로 그냥 그리면 이럴 수도 있다.
"아니지. 아무리 머리로 풀었다고 해도 그 과정대로 술식을 그리기 마련인데.”
고스틱 메르서는 혼란에 빠졌다.
"설마 이 문제를 이미 알고 있었…… 을 리가 없지. 이건 내가 테스트를 위해서 바로 만든 문제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된다. 어쩌면 진짜 오류일 수도 있다.
고스틱 메르서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6번과 7번 두 사람 모두를 합격시켰다.
만일 7번이 오류 때문에 합격된 가짜라면 다시 돌려보내면 된다.
‘그게 아니라면…….'
연구 진척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질 것이다. 정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물론 술식 계산속도 하나만으로 마법사의 수준을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거 하나만으로도 고스틱 메르서에게는 큰 도움이 되리라.
고스틱 메르서는 두근두근하는 심정으로 답장을 기다렸다.
“어? 왔다.”
6번의 답장이었다. 당장 출발하겠다는 답이었다. 아마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고스틱 메르서는 이 연구소의 이름과 들어올 때 사용할 임시 패스워드를 알려주었다.
6번의 답은 쉽게 받았는데, 7번은 아직도 답장이 없다.
고스틱 메르서는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달달 떨면서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답은 오지 않았다.
"이거 설마 거절하는 건 아니겠지?”
답이 온 것은 무려 8시간이 지난 후였다.
왜 이렇게 답이 늦었느냐고 물었더니 자느라 몰랐다고 한다.
고스틱 메르서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
반태수는 마법사 전용 웹의 쪽지 기능을 이용해 답장을 보낸 다음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좀 황당하네. 그럼 잠도 안 자고 쪽지를 기다리라는 거야, 뭐야?”
문득 저 마법사는 혹시 자신의 답을 기다리느라 잠을 안 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픽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8서클이나 되는 마법사가 뭐가 아쉬워서 자신의 답을 기다린단 말인가.
커피를 내리고 쿠키 몇 개를 꺼내 협탁에 올려놓자, 또 쪽지가 왔다.
"바르캄스테드 마법 연구소? 그건 또 어디야?”
쪽지에는 바르캄스테드 마법 연구소로 오라는 말과 임시 패스워드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이 도시에 있는 건가?”
반태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검색을 해봤다.
한데 바르캄스테드 마법 연구소라는 곳이 생각보다 유명했다.
"일단 듀라디스라는 도시에 있고, 소속된 8서클 마법사가 셋이나 되네?”
바르캄스테드 마법 연구소가 유명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8서클 마법사가 셋이나 있다는 것.
게다가 7서클 마법사도 다섯 명이나 있다.
그것만으로도 마법 연구소 중에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대단했다.
한데 바르캄스테드 마법 연구소는 마법에 관한 업적도 많았다.
꾸준히 새 마법 이론을 발표하는 걸로도 유명했다.
이래서 따로 주소를 안 보낸 모양이었다. 마법사라면 이름만 들어도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유명한 연구소일 테니까.
“그나저나 듀라디스는 어디 있는 도시야?”
반태수는 듀라디스도 검색해봤다.
“8천 킬로미터? 멀기도 하다.”
검색에 뜬 글을 읽어보니 비교적 평범한 도시였다.
마법 연구소가 좀 많다는 점이 나름의 특색이라면 특색이었다.
아무튼 가기로 했으니 비행기나 알아봐야겠다.
슬슬 움직이려는데, 엄대협이 찾아왔다.
어쨌든 같은 저택 안에서 사니 찾아오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 반태수가 쉴 때도 가끔 기웃거렸다. 당당하게 마주하지는 못했지만.
"뭐야, 또 산책 가?”
엄대협은 반태수를 보자마자 물었다. 반태수가 나갈 차비를 하는 것 같아서였다.
"다른 도시에 갈 일이 있어서.”
"다른 도시? 어디?”
"듀라디스.”
“듀라디스? 잠깐,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엄대협이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아무리 이면세계의 주민이라도 그 많은 도시를 전부 아는 건 아니었다.
가까운 도시, 그리고 유명한 도시는 알지만 듀마리스처럼 평범한 도시는 아는 사람만 안다.
"아, 거기 마법사들 있는 도시잖아. 맞지?”
엄대협의 말에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것 같더라.”
"근데 거긴 왜?”
"의뢰 하나 받아서 해결하러.”
“의, 의뢰? 그걸 네가 직접 받았어? 무, 무슨 의뢰인데?”
엄대협은 의뢰라는 말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물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법 연구보조. 마법사 전용 웹에서 받은 의뢰야.”
"마법?”
"바르캄스테드라는 마법 연구소인데, 의뢰자가 8서클 마법사더라고.”
엄대협이 살짝 안도했다.
"아…… 그렇군. 그럼 마법 공부를 하는 거랑 비슷한 거겠네?”
"그건 가서 해봐야 알지.”
진짜로 가서 만나봐야 안다. 8서클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지식을 어느 정도 깊이로 알고 있는지.
가서 자신이 배워야 할지, 아니면 가르쳐야 할지.
반태수의 태도를 본 엄대협이 또 떨었다.
"그, 그럼 이제 의뢰 받기로 한 거야? 나 또 의뢰 찾아도 돼?”
"일단 이번 의뢰부터 해결하고.”
반태수는 그렇게 말한 다음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비행기표 예약 좀 해줘. 최대한 빠른 걸로."
엄대협이 눈을 번쩍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내가 해줘야지. 듀라디스라고 했지? 바로 예약할게.”
엄대협은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 비행기부터 알아봤다.
"직항은 없는데? 오카리타를 경유해야 할 것 같아.”
오카리타라는 말에 반태수가 반사적으로 키에라 나서스를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도 연락을 안 했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키에라 나서스도 그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할 말은 있었다. 깜빡 했다고.
‘까먹었다고 하면 더 난리겠지?’
반태수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엄대협이 살짝 주눅 든 표정으로 물었다.
"왜? 오카리타 경유하면 안 되는 거야?”
안 된다면 다른 경유지를 알아보면 된다. 물론 시간은 좀 더 걸리고 비행기도 바로 없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가능은 하다.
"아냐. 그냥 해 . 그게 제일 빨리 가는 거지?”
"아무래도 그렇지?”
"그럼 그냥 오카리타 경유해서 가자. 오카리타에서 얼마나 대기해야 돼?”
"세 시간.”
그래도 저번 보다는 좀 나았다. 하지만 아마 그 세 시간 안에 분명히 키에라 나서스가 찾아올 것이다.
반태수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
"표 예약 끝났어. 오늘 비행기고 이따 밤 11시에 출발해.”
그럼 오카리타에 새벽에 떨어지고 거기서 3시간 정도 자다가 비행기 타고 출발하면 된다.
"이거 놓치면 이틀 정도 걸려. 오카리타까지는 문제가 아닌데 듀라디스로 가는 비행기가 자주 없어. 그래도 그 무법도시 스태플레톤 보다야 낫지만.”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서서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쿠키와 함께 엄대협에게 내밀었다.
"오랜만에 커피나 한 잔 하고 가. 이 쿠키랑 같이 먹어본 적 있었나?”
"아니, 처음인데? 설마 이 쿠키도 네가 만든 거야?”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에 든 커피와 쿠키를 엄대협 앞에 있는 테이블에 놓았다.
"커피랑 같이 먹으면 제법 맛있더라고. 먹어봐.”
엄대협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커피 잔을 들었다. 그리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음. 여전히 끝내주네.”
이거 하나만으로도 평생 반태수에게 붙어 있을 만했다.
커피만 꾸준히 제공해준다면 노예 계약서에도 사인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 모금의 커피를 즐긴 후, 쿠키를 집어서 와삭 깨물었다.
쿠키도 미친 맛이었다. 커피를 처음 마셨을 때의 기분이 또 느껴졌다.
대체 이놈은 이런 걸 어떻게 이렇게 뚝딱 만들어내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커피를 또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 순간,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모든 생각이 싹 날아가 버렸다.
엄대협의 머릿속에는 이 커피와 쿠키가 만나 이루어낸 맛과 향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니 머릿속 깊은 곳에 맛과 향의 화인을 쿡쿡 찍어대고 있었다.
간신히 거기서 벗어난 엄대협이 질린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시발, 이거 대체 뭐야?”
엄대협의 반응을 확인한 반태수가 씨익 웃었다.
"어때? 제법 괜찮지?”
"제법? 이런 걸 제법이라고 하면 큰 죄를 짓는 거야.”
엄대협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커피와 쿠키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아껴서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그가 커피와 쿠키를 다 먹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아주 행복한 얼굴이었다.
"앞으로 하는 거 봐서 가끔 줄게.”
반태수의 말에 엄대협이 즉시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꺾었다.
"개처럼 부려주십쇼!”
그런 엄대협의 모습에 반태수가 피식 웃었다. 역시 웃기는 놈이다.
***
반태수는 듀라디스 공항을 천천히 나섰다.
무려 8천 킬로미터를 이동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크게 피곤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퍼스트 클래스를 이용했고, 자신의 자리에 침대 마법 3종 세트를 걸고 진짜 푹 쉬었다.
오카리타에서는 다행히 키에라 나서스가 찾아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긴, 예전에 그녀가 찾아왔을 때는 나서스 가문 전용 휴게실에 있었다.
지금처럼 그냥 오면 아마 작정하고 반태수 주변을 감시하지 않는 한, 그렇게 쉽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반태수는 공항에서 나가자마자 바로 택시부터 잡아탔다.
바르캄스테드 마법 연구소로 가자고 하니, 택시 기사가 바로 알아듣고 출발했다.
반태수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유명한 연구소인 모양이다.
공항에서 연구소까지는 1시간 정도가 걸렸다.
연구소가 있는 곳은 굉장히 한적했는데, 연구소 주변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공원 뒤로 또 연구소가 있었고.
거대한 공원을 조성하고, 그 안에 연구소를 잘 배치해서 지은 듯했다.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 연구소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원인 듯했다.
공원 주변에는 연구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연구만 하라는 건가?’
반태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임시 패스워드를 입력하니 문이 활짝 열렸다.
평범한 로비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서 있자, 로비 끝에 있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몇몇 사람들이 나타났다.
반태수는 그 중에서 이번 연구보조 의뢰를 한 마법사가 누군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무려 8개의 서클이 느릿느릿 회전하고 있었으니까.
저 서클 마법사에 비해 코어의 안정감이 아예 달랐다.
반태수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 마법사를 쳐다봤다.
마법사, 고스탁 메르서도 반태수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