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 타노로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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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수 일행은 약간 찝찝한 마음을 안고 스태플레톤을 떠나야 했다.
비행기가 워낙 띄엄띄엄 있어서 이번 비행기를 놓치면 또 한참을 기다려야 하기에 일정을 조정하기가 난감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일행만의 공간을 배정받아 편안하게 오카리타로 갈 수 있었다. 비행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오카리타에 도착할 때까지 일행 사이에는 거의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다들 생각이 많았는지 각자의 자리에서 침묵을 유지한 채 앉아 있기만 했다.
오카리타에 도착해서 비행기를 갈아탔는데, 반태수는 키에라 나서스가 오카리타에 도착하면 바로 연락하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하지 않았다.
너무 머리가 복잡해서 굳이 키에라 나서스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키에라 나서스도 골치 아픈 존재였으니까.
오카리타에서 크랙톤으로 가는 동안, 반태수는 비행기 안에 마련된 침대에 누워 스태플레톤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떠올려봤다.
애초에 유적을 탐사하러 간 도시였다.
한데 유적 탐사에 대한 기억보다 발드릭과 싸웠던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았다.
생각해보면 유적에서 얻은 원격 제어장치도 대단한 성과였다.
그걸 연구하면서 유적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엄청날 것이다.
반태수는 이 유적을 연구하다보면 지금 자신을 가로막은 벽 중에서 가장 높은 벽을 부술 수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런데도 신경은 오히려 발드릭 쪽에 더 쓰이니 당시의 경험이 강렬하긴 했던 모양이다.
‘발드릭의 원래 목적지가 그 공원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존재를 알고 그쪽으로 유인한 거였을까?
한참 고민한 끝에 반태수는 전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아마 그 공원은 미리 준비해 놓은 발드릭만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지하에 그런 장소를 미리 만들어 놓았을 리가 없다.
반태수가 보기에 폭발과 함께 드러난 지하 공간은 애초에 발드릭이 쓰던 아지트가 분명했다.
당시 거기서 언뜻 본 장비나 물건들이 그걸 증명한다.
그리고 나중에 이동한 지하 깊은 곳의 공간은 일종의 탈출구 같은 곳이리라.
거기서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그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고.’
그렇다면 타노로스의 조직원들은 그런 식으로 도시마다 아지트를 마련해 놓은 것일까?
'쉽지 않을 거 같은데.’
스태플레톤 같은 도시라면 얼마든지 그런 시설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크랙톤이나 오카리타에서 그와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뭐……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겠네.’
어차피 공사일 뿐이니까. 또한 발드릭처럼 공원에 그런 장소를 조성하지 않고 건물에 조성한다면 훨씬 간단할 수도 있고.
반태수의 생각은 마력 반응으로 이어졌다.
당시 공원에서는 마력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유일하게 발드릭만 마력을 보유했고, 그걸 움직였다. 물론 그걸 통해 뭔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이면세계 마력 특유의 움직임일 뿐이었지.
즉, 당시 공원에서 벌어진 모든 일에는 마력이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반태수가 서 있는 위치를 알아낸 건, 아마도 압력을 감지해 파악했을 것이다. 거기서도 마력 반응은 없었다. 있었으면 반태수가 바로 알아차렸을 테고.
그리고 이상한 보라색 액체를 뿜어낸 것, 그리고 공원 전체를 폭발시킨 것까지.
거기에 더해 지하를 붕괴시켜 공원을 몽땅 무너뜨린 것에서도 마력 반응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보라색 액체를 뿌린 다음, 발드릭이 그걸로 뭔가를 하려고 했지.'
당시 발드릭은 손잡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그때 발드릭의 표정과 말투, 분위기를 보면, 그는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히려 결과가 드러났을 때 크게 당황했다. 당연히 벌어져야 할 일이 벌어지지 않아서.
반태수는 아공간에 보관한 보라색 액체를 연구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그걸 함부로 꺼내기에는 불안했다.
당시 발드릭의 반응을 보면 그 액체를 통해 위치도 추적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이야 아공간에 있어서 외부와 차단되는 바람에 위치 추적이 안 되지만, 그걸 꺼내는 순간 단숨에 위치가 들통 날 수 있었다.
‘천천히. 서두를 필요 없어.’
반태수는 일단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면세계에서 아무리 충동적이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움직인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래선 안 된다.
급할수록 위험해진다. 그러니 천천히, 차분히 대응해야 한다.
반태수는 보라색 액체는 나중에 조사하고, 일단 닥친 문제부터 하나씩 해결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남은 문제는 이제 별로 없다.
가장 큰 일이었던 유적 탐사는 끝났고, 키에라 나서스가 준 유물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일이 남았다.
사업을 비롯한 자잘한 일은 엄대협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그렇게 하나하나 따져보니 할 일이 거의 없었다.
업대협이 새 의뢰를 물어오지 않는 한 말이다.
반태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이대로 크랙톤에 도착할 때까지 누워서 쉴 생각이었다.
물론 남은 두뇌를 활발히 움직여 당장 필요한 연구는 계속 진행하고 말이다.
이제 영역화의 수준을 올릴 때가 되었다.
유적에서 쓸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고, 마력 반응이 없더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뽑아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지금도 마력 반응이 없는 장치들로부터 정보를 뽑아내긴 하지만, 워낙 초보적인 수준인지라 개선이 필요했다.
‘적어도 그 공원 같은 장소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알아낼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해.’
반태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남은 비행시간을 휴식과 연구로 보냈다.
***
크랙톤에 도착하기 무섭게 전화가 왔다.
반태수는 발신인을 확인하고 잠시 망설였다. 키에라 나서스였다.
그런 반태수의 모습에 근처에 있던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데 그러세요?”
페일라 린치필드가 좀 더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반태수는 감출 이유가 없었기에 전화기를 들어 발신인을 보여줬다.
페일라 린치필드의 입매가 살짝 비틀렸다.
오스윈 프리든은 담담하면서도 차갑게 말했다.
"불편하면 받지 마시죠. 나중에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반태수는 왠지 엄청 든든한 마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면세계에 와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를 꼽으라면 오스윈 프리든과 친해진 것이리라.
정말로 언제 어디서나 큰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반태수는 전화기를 다시 품에 넣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제 가시죠.”
다들 공항 밖을 향해 이동했다.
가는 동안 반태수 옆에서 나란히 걷던 오스윈 프리든이 지나가는 듯 슬쩍 말했다.
"같이 있던 제 부하들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입단속 철저히 해놓겠습니다. 그들로 인해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고 확신하셔도 됩니다.”
왠지 그 말을 하는 오스윈 프리든의 분위기가 무서웠다. 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저리도 확신하는 걸까.
물론 반태수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믿고 있습니다.”
오스윈 프리든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맺혔다.
그렇게 잠시 걷다 보니 어느새 공항을 나섰다.
반태수는 공항에서 나가자마자 익숙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저 멀리서 엄대협이 안절부절못하고 이쪽 눈치를 보는 모습이 보였다.
엄대협은 여전히 오스윈 프리든이나 페일라 린치필드를 어려워하고 두려워했다.
마치 말이라도 섞으면 어딘가로 끌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할 것 같은 기분이라도 드는가보다.
그러지 말라고, 좋은 사람들이라고 몇 번이나 말해봤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튼 엄대협이 왔으니 일행들과는 슬슬 혜어져야 할 타이밍이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피로 좀 풀어야 할 것 같아서요.”
반태수의 말에 다들 얼른 가보라고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물론 아쉬움이 눈빛에 남아 있었지만 반태수는 애써 외면하고 엄대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는 그런 반태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런 두 사람에게 안드렐라 윌렉스가 물었다.
"두 분은 안 가시나요? 저도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페일라 린치필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안드렐라 윌렉스를 바라봤다.
"저도 갈 거예요. 아 참. 제가 당분간 신세를 좀 지고 싶은데, 괜찮죠?”
안드렐라 윌렉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안 된다고 말하겠는가. 상대는 린치필드 가의 후계자나 다름없는 사람인데.
"물론이죠. 그럼 가실까요?”
윌렉스 가에서 보낸 차량이 바로 근처에 있었다. 두 사람은 그쪽을 향해 이동했다.
오스윈 프리든은 멀어져가는 페일라 린치필드와 잠깐 눈을 마주쳤다. 의미심장한 눈빛이 오갔다.
***
발드릭은 천천히 눈을 떴다.
사방이 막힌 밀실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놓인 침대에서 자고 지금 깬 것이다.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놓고 앉았다. 그리고 마른세수를 몇 번 했다.
"젠장.”
분노가 확 솟구쳤다.
어떻게 조성한 아지트인데 그걸 싹 날려 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 그 기묘한 놈에게 붙잡혀 어떤 꼴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대체 뭐 하는 놈이지?”
마법사인 건 분명했다. 그래서 드는 합리적 의심. 혹시 5대 가문이 키워낸 비밀병기 같은 놈은 아닐까?
"아니, 그건 아니야. 그랬다면 타노로스를 모를 리 없지.”
발드릭이 타노로스라는 말을 꺼냈을 때, 상대가 보인 반응이 정말 의외였다.
보통 그 말을 들으면 테러조직이라는 말이 먼저 나와야 한다. 한데 반응을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세상에 타노로스를 모르는 자가 있다니.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그걸 벗어난 거지?”
발드릭은 품에서 손바닥 두 개만 한 패드를 꺼내 전원을 켰다. 그리고 추적 앱을 실행시켰다.
화면에 지도가 떠오르고 추적 프로그램이 작동했다. 하지만 아무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젠장. 아깝게 나노머신만 잔뜩 잃었네.”
나노머신이 아깝다고 투덜거리지만, 사실 진짜 아까운 건 아지트였다.
자기 손으로 날려버린 아지트.
다시 그런 아지트를 만들려면 몇 년은 개고생을 해야 하리라.
조직에서 지원해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나노머신이야 임무 몇 번 성공하면, 아니, 이번 임무에 대한 대가로 받아도 그만이다.
하지만 아지트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더구나 탈출 큐브까지 장착한 아지트를 조성하려면 더더욱 그렇다.
지금 발드릭이 있는 이 밀실이 바로 탈출 큐브였다.
아지트 밑에 달려 있고, 아지트를 폐기할 때, 그 폭발력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추진력으로 쓴다.
그래서 더욱 깊은 땅속으로 처박아 버린다. 그 와중에 땅이 붕괴되고, 특수 방해 파장이 생성되어 추적이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
단점은 탈출 큐브 판매자가 여기를 추적해 다시 꺼내줄 때까지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발드릭은 패드를 조작해 임무 목록을 띄웠다.
타노로스는 굉장히 광범위한 조직이다. 그리고 조직에 속한 자들도 반드시 충성하는 건 아니었다.
발드릭이 대표적인 예다.
진짜 타노로스의 상층부는 생각이나 성격이 좀 다를 수도 있지만 발드릭처럼 밑에서 구르는 자들의 생각은 훨씬 단순하다.
첫 번째로 돈.
이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는가. 또 얼마나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
두 번째가 미래.
나중에 타노로스가 진짜로 세상을 뒤엎었을 때, 과연 어떤 위치에 오를 수 있는가.
혹은 타노로스 활동을 하면서 기회를 잡아 제대로 된 귀족이 될 수 있는가.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희망하며 활동한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불가능하다고 코웃음 칠지 모른다. 하지만 발드릭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실제로 타노로스로 활동하다가 운이 맞아 떨어져 귀족이 된 동료가 있다.
그는 여전히 타노로스로 활동하며 부와 명예를 함께 누린다.
이 얼마나 이상적인가. 발드릭의 목표가 바로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타노로스의 대의에는 동참한다.
5대 가문이 이 세상의 해악이라는 건 명확하다. 그러니 그들의 손발을 잘라내는 건 세상을 위한 일 아니겠는가.
그리고 솔직히, 발드릭은 타노로스를 완벽히 믿지 않는다.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데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막말로 대의만 앞에 내세우고 뒤로는 호박씨를 까고 있을 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실제로 그런 조짐이 좀 보이기도 하고.’
발드릭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다 무슨 상관인가. 얼른 여기서 나가 새 아지트를 만들 돈과 포인트를 벌어야지.
좋은 임무를 해결해야 많은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그래야 타노로스로부터 원하는 기술 지원을 받을 수 있고.
발드릭은 신중한 표정으로 패드에 띄운 임무 목록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다음 아지트는 안전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