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타노로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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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수는 왜곡을 건 채로 빠르게 공원을 벗어났다.
혹시 있을지 모를 촬영을 염두에 둔 것이다.
왜곡을 푸는 건, 호텔이 있는 프리든 가의 영역에 들어선 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할 것이다.
한창 빠르게 이동하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저녁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문득 아공간에 있는 음식들이 떠올랐다. 고대 제국에서 만든 식량창고에 있던 아공간 팔찌다.
그리고 그 안에는 완성된 요리가 잔뜩 있었다.
그동안은 굳이 먹을 이유가 없어서 내버려 뒀는데, 갑자기 하나쯤 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태수는 주위를 둘러봤다.
근처에 3층 건물 몇 개가 있었다.
반태수는 그 중에 인적이 아예 없는 건물로 향했다. 굳이 문을 이용할 필요도 없었다. 위로 쭉 올라가 바로 옥상에 안착했다.
옥상 한가운데에 털썩 주저앉아 아공간에서 음식 하나를 꺼냈다.
굉장히 다양한 음식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반태수의 입맛을 자극하는 음식을 하나 꺼냈다.
커다란 접시에 담긴 갈비찜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마치 지금 막 조리가 끝나 접시에 담은 것만 같았다.
‘확실히 아공간이 대단하긴 하네.’
그저 단순한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었다. 아공간 내부는 현상을 유지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저 공간만 여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술식이 담겨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건 아공간을 연구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다음 고민할 문제다.
반태수는 접시에 담긴 갈비찜을 보다가 다시 아공간을 뒤져 혹시 밥 같은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아무래도 갈비찜은 밥과 김치가 있어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놀랍게도 아공간 안에 밥과 김치가 있었다. 심지어 젓가락과 숟가락도 있었다.
반태수는 일단 맛있게 먹었다.
갈비찜도 그렇고 밥과 김치도 그렇고 굉장히 맛있었다. 엄청난 요리사가 요리한 것 같았다.
어찌나 맛있는지 양이 제법 많았음에도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음식을 다 먹고 나니, 접시와 그릇만 남았다.
한데 접시와 그릇에서 미약한 마력이 느껴졌다.
반태수는 호기심에 접시와 그릇을 분석해봤다.
처음에는 플라스틱인 줄 알았다. 한데 막상 분석을 시작하니 플라스틱이랑은 마력 반응이 좀 달랐다.
그리고 이 그릇과 접시에 깃든 마력은 분해 속성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버리거나 묻으면 분해되는 모양이네.’
아마 분해 속성 마력에 가장 잘 반응하는 소재로 만든 접시와 그릇이리라.
반태수는 하는 김에 숟가락과 젓가락도 확인해봤다. 역시 같은 소재, 같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물건이었다.
문득 이것들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졌다.
반태수는 그릇에 깃든 속성과 똑같은 마력을 뽑아내 천천히 주입해봤다.
그리고 마력을 크게 활성화했다.
샤아아아.
그릇이 빠르게 분해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줄 알았다. 한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아예 가루조차 남지 않았다. 가루까지 분해되면서 기체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이 정도로 완벽하게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릴 줄은 몰랐다.
‘어쩌면…….'
어쩌면 음식을 남겼다면 남은 음식까지 이런 식으로 분해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물론 모든 것이 기체로 변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에 버금갈 정도로 분해되어 아무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이 또한 실험을 한 번 해볼 필요가 있을 듯했다.
물론 나중에.
지금은 다시 호텔로 돌아가는 게 먼저니까.
반태수는 나머지 그릇들도 마력을 활성화시켜 분해해 버렸다.
그리고 건물에서 뛰어내린 다음, 빠르게 호텔로 향했다.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금까지 온 길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걸 토대로 약간 재구성하면 대략적인 지도도 그릴 수 있었다.
반태수는 호텔이 있는 방향만 잡고 직선으로 달렸다.
중간에 뭐가 있든 그냥 건너 뛰어버리면 되니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렇게 호텔 근처에 도착한 반태수는 최대한 신경 써서 CCTV나 차량 블랙박스에 잡히지 않을 만한 장소를 찾았다.
아까 공원에서 그런 일을 겪어서 그런지 뭘 하든 평소보다 훨씬 신경이 쓰였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확실히 모든 것을 확인한 다음 왜곡을 풀었다.
그리고 미리 생각해둔 경로를 따라 걸어가 호텔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그 뒤로는 어려울 게 없었다. 그저 호텔로 가면 되니까.
저녁도 먹을 필요가 없으니 바로 방으로 올라가 씻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오늘은 정말로 피곤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침대에 마법부터 부여했다. 술식을 새긴 것이 아니라서 매일 걸어주지 않으면 효과가 날아가 버린다.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싸움 구경은 제법 재미있었다. 아마 마지막에 발드릭만 만나지 않았다면 꽤 괜찮은 하루가 되었을 것이다.
오카리타의 임무 때문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좀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면세계에서 그렇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꺼내는 사람을 그날 처음 봤다.
오카리타의 임무를 진행하는 동안 발드릭이 싸우는 모습을 통해 그가 제법 괜찮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도 알았다.
발드릭이 정말 이상하다고 여긴 것은 집으로 찾아왔을 때였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떠보듯 몇 마디 대화만 하고 돌아갔는데, 아무래도 타노로스라는 조직으로 자신을 영입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사실 반태수 같은 프리랜서 마법사는 굉장히 드물다. 게다가 실력도 대단하니 누구든 영입하고 싶은 대상일 것이다.
하지만 타노로스 같은 위험한 조직이 과연 그런 마법사를 쉽게 영입할 수 있을까?
그래서 발드릭도 조심스럽게 접근하려고 한 모양이고.
발드릭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았으니 아마 자신에게 다시 접근할 것이다.
그의 처리는 그때 결정하면 된다.
타노로스라는 조직에 대해서는 오스윈 프리든에게 물어보면 될 듯했다. 아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을까?
반태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스르륵 잠들었다.
***
다음 날, 반태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확실히 침대에 건 마법 3종 세트의 효과가 대단하긴 대단하다.
아침만 되면 온몸이 상쾌해서 눈이 절로 떠질 지경이니까.
대충 씻고 방에서 나간 반태수는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비행기가 뜨는 날이니 아마 이 도시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가 될 테니 잘 먹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돌아갈 때는 올 때보다 훨씬 빨리 크랙톤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올 때와 달리 대기 시간이 거의 없을 테니까.
오카리타는 비행기가 많은 도시 중 하나였다. 크랙톤으로 가는 비행기는 수시로 뜬다.
식당에 가니 어제와 달리 일행들 대부분이 식사 중이었다.
반태수는 마지막이니 입맛에 맞는 요리를 푸짐하게 접시에 담아서 오스윈 프리든 일행이 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세 사람이 반가운 표정으로 반태수를 맞이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반 마법사님.”
페일라 린치필드가 꽤 살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항상 이 시간쯤 일어납니다.”
"아, 그러시구나.”
그 뒤로 일상적인 대화가 잠시 오갔다. 다들 천천히 음식을 먹으면서 얘기를 하니 제법 즐거운지 표정이 점점 더 밝아졌다.
그렇게 절반쯤 먹었을 때, 반태수가 슬그머니 물었다.
“그런데 혹시 타노로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습니까?”
반태수의 물음에 세 사람이 일제히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들의 반응이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라서 반태수는 좀 당황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알면 안 되는 이름입니까?”
"아뇨. 너무 당연한 걸 모르고 계시는 것 같아서 좀 놀랐을 뿐이에요.”
페일라 린치필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안드렐라 윌렉스가 말을 덧붙였다.
"반 마법사님을 보고 있으면 가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다가 오신 분 같아요. 너무 당연한 걸 모르실 때도 있고, 누구도 모를 것 같은 걸 당연하다는 듯 말씀하시기도 하고.”
반태수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그저 어색하게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미 그에 대한 얘기는 해두지 않았던가. 너무 마법 연구에만 몰두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어둡다고.
"타노로스는 테러 조직입니다.”
"테러요?”
반태수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테러 조직일 줄은 돌랐다.
"굉장히 위험한 조직이죠. 테러의 목적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동안 수십 차례의 대형 테러를 일으킨 놈들입니다.”
“수십 차례나 테러를 저질렀는데 아직도 활동을 하고 있다면 보통 놈들이 아니겠군요.”
"정말 위험한 놈들입니다. 능력도 대단하고요. 아직까지 타노로스의 조직원을 사로잡은 경우가 한 번도 없습니다.”
"잡히느니 자결을 하는 겁니까?”
"그런 셈인데, 단지 그런 식으로 말하기에는 좀 모자랍니다. 자살을 하지 못하게 막을 방법이 여럿 있습니다. 한데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들의 자살은 막지 못했습니다.”
오스윈 프리든의 설명에 페일라 린치필드가 슬쩍 부연했다.
"사실 사로잡은 테러범이 없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사로잡힌 놈들은 그저 이용만 당했을 뿐이고, 진짜 타노로스는 아니었어요. 자신들도 타노로스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실제로 아는 것도 전혀 없고요.”
“그럼 타노로스와 관계없는 테러가 아닙니까?”
“아뇨. 타노로스에서 미리 예고한 테러예요. 그놈들은 꼭 예고 테러에 자기들 조직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내죠.”
반태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타노로스라는 조직이 결코 5대 가문만을 목표로 하는 놈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런데 조직의 목표를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아직 그들의 목적이 뭔지 모릅니다.”
"그럼 그냥 무차별 테러란 말입니까?”
반태수의 물음에 세 사람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는 걸 보면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침묵을 깬 것은 오스윈 프리든이었다.
"테러가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이득을 보는 자들이 생깁니다.”
"테러 때문에 이득을 본다고요?”
"손해를 보는 상황 자체를 이용해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단순한 경우를 생각해보죠. 그냥 경쟁 회사를 부숴 버리면 반사이익을 얻지 않겠습니까?”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한 논리로 이득을 만들어내지 않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이득을 뽑아낼 수 있다는 건 분명했다.
더구나 그 테러를 미리 알고 있다면 더더욱 이익을 뽑아내기 편해질 테고.
"교묘하지만 테러 때문에 이득을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우연일 수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이 더 높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주요 감시 대상입니다.”
“그런데도 별다른 끈을 못 찾은 모양이군요.”
"보통 놈들이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어쩌면 그조차 그들의 노림수인지도 모르죠.”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노로스에 대한 건 이 정도만 알아도 될 듯했다.
어차피 그들과 손잡을 생각은 없었지만, 이 얘기를 듣고 나니 더더욱 손잡고 싶지 않아졌다.
"그리고 가끔 그들의 짓으로 의심되는 살인 사건들이 있습니다.”
반태수의 머릿속에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발드릭이 관광 중이던 귀족을 죽인 일 말이다.
"테러와 달리 자신들이 했다는 표식을 남기지 않아서 아직 드러난 건 없습니다. 하지만 살인을 위해 과정을 쌓는 방식이 테러와 유사점이 있어서 의심 중이죠.”
반태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혹시 타노로스의 짓으로 추정되는 살인의 피해자가 5대 가문과 관계된 경우가 많습니까?”
오스윈 프리든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평범한 귀족인 경우가 많습니다. 5대 가문이랑 관계되려면 최소 가신 가문은 되어야 하는데, 가신 가문 사람들이 당한적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왜 발드릭은 타노로스가 5대 가문과 관계된 사람만 죽인다고 했을까?
발드릭이 거짓말을 한 걸까? 하지만 반태수는 왠지 발드릭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물론 진짜 정확한 건 더 확인해 봐야 하지만.
"혹시 어제 있었던 전투 중에 관광 하다가 죽은 귀족에 대해 알아볼 수 있습니까?”
반태수의 질문에 다들 깜짝 놀랐다.
"귀족이 죽었다고요?”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돌아다니다가 봤습니다. 능력자들이 지키던 사람 한 명이 죽었습니다.”
"제가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프리든 가의 조직을 이용하면 그 정도는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오스윈 프리든은 밥을 먹던 수하 한 명을 손짓으로 부른 다음 지시를 내렸다.
잠시 후, 그 수하가 다가와 보고하고 돌아갔다.
정말로 죽은 귀족이 있었다.
“마도구 오작동에 의한 죽음이라니. 당황스럽군요.”
사고 원인이 마도구 오작동으로 결론이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반태수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도구 오작동이 아니라, 애초에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마도구를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반태수는 어제 자신이 확인한 사항을 오스윈 프리든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반태수의 설명을 모두 들은 오스윈 프리든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반태수에게 물었다.
“혹시 어제 타노로스의 조직원을 만나셨습니까?”
반태수는 굳이 감출 필요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귀족을 죽인 자가 타노로스의 조직원입니다. 뒤쫓아 가서 대화를 하는 데까지 성공했습니다. 그 뒤로 놓쳤지만요.”
오스윈 프리든의 눈이 커다래졌다.
"대체 반 마법사님은……! 왜 그리 위험을 무릅쓰신 겁니까! 타노로스의 조직원을 쫓아가다니! 그들은 마법사와 상성이 좋지 않습니다!”
"저도 어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오스윈 프리든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무사히 돌아왔다고 해서 마음이 놓일 리가 없었다. 반태수의 태도가 저렇다면 나중에 또 같은 일이 벌어지면 똑같은 행동을 할 테니까.
나직이 한숨을 내쉰 오스윈 프리든은 일단 할 말을 했다.
"일단 마도구를 제공한 자를 확인해보고 뒤를 추적하도록 지시해 놓겠습니다. 솔직히 이곳 스태플레톤에서는 가문의 영향력이 다른 도시와 달리 크지 않아서 조사를 완벽하게 해낸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오스윈 프리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반태수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변명하듯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쪽에 제 정체를 들키지 않았으니까요.”
오스윈 프리든의 걱정이 더 깊어졌다.
"확신하지 마십시오. 타노로스가 어떤 방식으로든 반 마법사님의 정체를 파악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네. 정신 바짝 차리고 조심하겠습니다.”
반태수는 얼른 그렇게 대답했다. 경험적으로 여기서 더 대꾸를 해봐야 더 많은 잔소리를 들을 뿐이다.
반태수는 슬그머니 나머지 두 사람의 눈치도 살폈다.
잔소리를 던질 만반의 준비가 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좀 더 견뎌야 할 모양이다. 반태수는 살짝 체념한 표정으로 의자에 축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