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 타노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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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수는 왜곡을 건 채로 발드릭을 쫓아갔다.
은밀히 이동하는 발드릭은 예전 오카리타에서 함께 의뢰를 수행하던 때, 그리고 자신을 보겠다고 찾아왔을 때와는 풍기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너무 달라서 얼굴과 마력을 수시로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서.
하지만 저 사람은 분명히 발드릭이었다.
발드릭은 은밀히 이동하다가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현재 반태수의 왜곡은 모습과 소리, 마력을 모두 차단한다. 거기에 일단 걸면 패시브처럼 작용해 신경 쓸 일도 없고.
그래서 반태수는 발드릭에게 절대 들킬 일이 없다고 여겼다.
너무 바짝 쫓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영역화까지 써서 발드릭을 확인하기에 놓칠 염려도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고 여겨 너무 방심했다.
어느새 발드릭이 골목 밖으로 나갔다.
반태수는 조금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영역화를 통해서 본 발드릭은 방향을 바꿔 여전한 속도로 걷고 있었다.
반태수는 골목에서 나간 다음, 방향을 바꿨다. 그러자 바로 발드릭이 보였다.
그렇게 얼마나 따라갔을까.
발드릭이 갑자기 공원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말이 공원이지 제대로 조성된 게 하나도 없었다. 나무가 몇 그루 있긴 했는데, 총알 자국이 곳곳에 나 있었고, 윗부분이 싹 날아간 나무도 수두룩했다.
아마 이 공원에서도 싸움이 몇 번 있었던 모양이다. 바닥 곳곳에 파인 자국까지 있었다.
벤치는 멀쩡한 게 몇 개 없었다. 대부분 부서져 무너진 채였고, 그나마 멀쩡한 것도 나무 몇 개가 빠져서 앉으면 엉덩이가 빠질 것 같았다.
당연히 사람도 없었다.
반태수는 천천히 공원으로 들어섰다.
발드릭은 몇 걸음 더 걷다가 갑자기 멈췄다.
반태수도 멈췄다.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 왜 갑자기 발드릭이 멈췄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여기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가만히 서서 발드릭을 보고 있는데, 발드릭이 천천히 돌아섰다.
발드릭은 정확히 반태수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마치 그곳에 반태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반태수는 혹시나 싶어서 옆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발드릭의 시선이 반태수가 있는 곳을 따라 정확히 움직였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발드릭은 반태수의 존재를 확인했다.
처음부터 알고서 여기로 유인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이 공원 안에서만 쓸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르고.
하지만 중요한 건 이미 들켰다는 점이다.
반태수는 발드릭이 자신의 위치는 알지만 모습을 보지는 못한다고 가정했다.
그래서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차피 왜곡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쓸 필요도 없으니까.
"거기 계신 손님. 언제까지 모습을 감추고 있을 겁니까? 볼일이 있으시면 당당하게 나서시죠.”
안 보인다는 뜻이 담긴 말이었지만, 반태수는 그 말을 100% 믿지 않았다. 보이면서도 안 보이는 척 연기를 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반태수는 마력을 이용해 성대를 약간 변형시켰다. 목소리를 바꾸는 거야 얼굴을 바꾸는 마법을 만들었을 때부터 같이 쓰던 마법이니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혼자서 몰래 도망치기에 궁금해서 따라와 봤습니다. 한데 보통 분이 아니신 모양이군요.”
"승산 없는 싸움에 매달리는 스타일은 아닌지라. 그나저나 계속 그렇게 숨어 있을 겁니까?”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걸로 충분합니다.”
사실 반태수는 그냥 돌아갈까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발드릭의 정체가 너무 궁금했다.
"아까 그 사람은 왜 죽인 겁니까?”
반태수의 물음에 발드릭이 피식 웃었다.
"누구 말입니까? 목숨 건 싸움을 구경하러 온 그 사이코패스?”
"그래서 죽였습니까? 싸움을 구경해서? 나도 오늘 싸움을 구경했는데, 그럼 나도 죽일 겁니까?”
"고작 그런 걸로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놈은 죽어 마땅한 놈입니다. 귀족이죠. 귀족이 아닌 사람을 벌레로 여기는. 그래서 벌레처럼 다루는.”
발드릭은 히죽 웃었다. 그의 웃음에서 얼핏 광기가 내비쳤다.
"사실 그건 흔한 일이죠. 귀족들이 언제 아랫사람들을 사람처럼 대한 적이 있습니까? 그놈이 죽은 이유는 5대 가문을 위해서 일하는 놈이기 때문입니다.”
반태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든 귀족은 5대 가문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까. 아니, 전 세계가 그런 거 아닙니까?”
발드릭이 피식 웃었다.
"뭐야, 너무 순진한데? 실력에 비해 경험이나 식견은 한참 모자라신 분이로군요?”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경험이 부족한 건 맞으니까.
발드릭은 반태수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5대 가문을 모시는 가신 가문이 진짜 5대 가문을 위해서 일하는 거 같습니까? 그들은 그냥 자기 가문을 위해서 일합니다. 단지 5대 가문을 모실 뿐이지.”
반태수는 그 얘기를 들으며 자리를 조금씩 옮겼다. 왠지 느낌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발드릭은 여전히 반태수가 움직이는 대로 시선을 따라갔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반태수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발드릭히 히죽 웃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촤아악!
바닥에서 보라색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그 액체는 정확히 반태수가 있는 곳을 덮쳤다. 아니, 반태수가 밟고 있는 바닥에서 튀어나왔다.
왜곡으로 가린 반태수의 모습이 일시적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나타난 즉시 사라졌다.
어차피 뭐가 묻었어도 왜곡 안에 있는 것이다. 반태수는 빠르게 공원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 순간 공원 입구 바닥에서 거대한 철문이 위로 휙 올라왔다.
철컹!
철문에는 강력한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주변으로 스파크가 무수히 튀었다.
파바바바바박!
반태수는 빠르게 철문을 분석했다. 마법을 쓴 물건이 아니라 순수한 기술만 써서 만든 문이었다.
반태수는 그걸 보자마자 마로 마법을 써서 허공에 슥 떠올랐다.
발드릭이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찾았는지 알아낸 것이다. 답은 바닥에 있었다.
공중에 떠오른 채 옆으로 쭉 이동했다.
아니나 다를까, 발드릭은 반태수의 위치를 잡아내지 못했다.
"이런, 벌써 이쪽 패를 알아낸 겁니까? 대단하시군요.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미 늦었습니다.”
저 말이 무슨 뜻인지 반태수는 바로 알아차렸다.
아까 몸에 닿았던 그 보라색 액체가 무언가 특수한 작용을 한다는 뜻이리라.
어쩌면 그 액체 자체가 지독한 독이거나 바이러스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반태수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상대가 어떤 수를 썼더라도 자신의 마법과 마력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것이다.
"자자,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서두르지 맙시다. 전 당신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 이렇게 능력을 낭비하고 있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죠. 어떻습니까? 우리랑 손잡지 않겠습니까?”
"우리?”
발드릭이 환하게 웃었다.
"그럼 나 혼자 이런 걸 할 수 있을 거라 여겼습니까? 우린 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힘을 모은 사람들입니다. 타노로스라고 하죠. 혹시 들어봤습니까?”
반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들어봤을 리가 있나. 이면세계에 어떤 도시들이 있는지도 아직 잘 모르는데.
"이 세상의 적은 명확합니다. 5대 가문이죠. 그들이 벌이는 추악한 짓들을 하나하나 찾아 분쇄하고 궁극적으로 그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우리 타노로스의 목표입니다.”
반태수는 이번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솔직히 타노로스인지 뭔지도 왠지 느낌이 싸했다.
발드릭은 양 손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이 도시를 보십시오. 이게 정상적인 도시 같습니까?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얼마나 추악한 진실을 품고 있는지 아십니까?”
발드릭이 빙긋 웃었다.
"아무튼 제가 이렇게 열심히 설명을 드리는 이유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미 늦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 그건 아니지, 선택지가 두 가지 있습니다.”
발드릭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또한 더욱 섬뜩해졌다.
그는 손가락을 하나 들며 말했다.
"하나, 내가 내민 손을 잡고 타노로스의 일원이 된다. 이때는 적절한 개목걸이 하나 정도는 차야 합니다. 사실 저도 그러고 있으니 너무 억울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발드릭이 두 번째 손가락을 펐다.
"둘, 그냥 죽는다.”
히죽 웃은 발드릭이 말을 이었다.
"어떻습니까? 참 쉽죠? 뭘 선택하든 당신 자유입니다.”
반태수는 발드릭이 저렇게 열심히 떠드는 동안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아까 덮친 보라색 액체는 지금 반태수의 몸을 감싼 채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 액체는 피부만 살짝 파고든 채 그 아래에서 휘도는 마력에 막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반태수는 휘도는 마력의 범위를 조금씩 늘려 보라색 액체를 밀어냈다.
대체 이 액체의 정체가 뭐기에 발드릭이 저리도 자신만만한 건지 궁금했다.
마력을 이용해 분석해봤지만, 딱히 마력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았다.
반태수는 일단 보라색 액체를 한데 모았다. 그리고 아공간에서 적당한 병을 꺼내 그 안에 든 것을 싹 버리고 거기에 액체를 담았다.
그리고 병을 단단히 잠근 다음 다시 아공간에 넣었다.
이제 더 이상 보라색 액체는 없다. 하지만 반태수는 방심하지 않았다.
혹시 남은 액체가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이 액체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아내고자 했다.
"왜 답이 없으십니까? 생각보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발드릭은 반태수로부터 답이 돌아오지 않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회를 줬는데도 받지를 못하는군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이건 모두 당신이 자초한 겁니다.”
발드릭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가락을 딱 튀겼다.
하지만 반태수는 발드릭이 밟은 곳에서 살짝 빛이 어렸다가 사라지는 걸 분명히 봤다.
아마 손가락 튀기는 건 시선을 돌리기 위한 행동이리라.
반태수는 발드릭이 어쩌나 지켜봤다. 한데 발드릭의 표정이 아까와는 많이 달라졌다.
발드릭은 명백히 당황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정말로 당황했다. 분명히 신호가 와야 한다. 한데 아무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그 많은 나노머신들이 마치 사라진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발드릭이 끼얹은 보라색 액체는 나노머신이 담긴 액체였다.
일단 체내로 들어간 순간부터 대응할 방법이 없는 수단이었다.
나노머신들은 주요 장기들과 두뇌에 자리를 잡게 되어 있었고, 이쪽에서는 나노머신을 감지할 수 있는 추적기와 나노머신을 작동시킬 수 있는 원격 제어장치를 갖고 있었다.
나노머신을 이용해 고통을 줄 수도, 죽일 수도 있고, 나노머신을 품은 자가 세상 어디에 있든 추적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상대를 포섭, 아니, 노예처럼 부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한데 정말 아무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반태수는 발드릭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좀 안심했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반태수는 그렇게 물으며 허공에서 쭉 움직여 자리를 옮겼다.
발드릭은 방금 반태수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이게 끝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어떻게든 당신을 찾아낼 테니까.”
이번엔 반태수가 피식 웃었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발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공원 전체가 폭발했다.
꽈아아아아앙!
반태수는 허공에 떠 있다가 갑작스러운 폭발에 휘말렸다. 하지만 손목에 차고 있던 유물이 자동으로 작동하며 실드를 펼쳤다.
폭발을 실드가 모조리 막아내는 동안 반태수는 차분하게 내구력 강화와 마력 역장을 이용한 실드를 펼쳤다.
생각해보면 보라색 액체를 뒤집어썼으면, 다시 그런 일을 겪지 않게 미리 실드를 펼쳐둬야 했다.
반태수는 크게 반성했다.
‘앞으로는 절대 안 당한다.’
발드릭은 벌써 사라졌다. 그 폭발의 와중에도 영역화를 계속 펼쳐두고 있었는데, 정말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사라져 버렸다.
아마 정말로 순간이동을 한 건 아닐 것이다. 마력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미묘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어쩌면 발드릭은 폭발과 동시에 지하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반태수는 빠르게 주변 흙먼지와 연기를 치워버리고 바닥을 살폈다.
제법 큰 공간이 있었다. 분명히 안에 뭔가 장치가 있는 듯했다.
한데 반태수가 살펴보려는 순간 그대로 붕괴하며 더 깊은 지하로 파고들었다.
그 뒤로 연쇄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콰과과과과과광!
반태수는 급히 자리를 피했다.
아무래도 발드릭은 더 이상 쫓지 못할 것 같았다.
‘타노로스.’
발드릭이 말한 조직의 이름이 계속 뇌리에서 맴돌았다.
설마 정말로 5대 세가를 적대하는 조직이 있을 줄이야.
반태수는 혹시나 해서 영역화를 최대한으로 펼쳐 지하를 확인했다.
지하 깊은 곳, 그러니까 100미터쯤 내려간 곳에 공간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 공간에 뭔가가 있는 듯했다. 발드릭이 있거나, 아니면 발드릭을 다른 곳으로 보낸 무언가가 있거나.
저길 어떻게 할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 그 공간이 그대로 붕괴되었다.
꽈르르르르.
바닥이 무너졌다. 반태수는 빠르게 공원을 벗어났다.
공원 입구를 가로막았던 철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같이 붕괴되어 바닥에 파묻혔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반태수는 공원 밖, 허공에 떠오른 채, 심각한 표정으로 무너진 공원을 내려다봤다.
오늘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 가장 반태수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건, 단 한 번도 마력 반응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 모든 것이 마법이 섞이지 않은, 그냥 순수한 기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