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관광 상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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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플레톤으로 돌아온 반태수 일행은 일단 호텔로 가서 하루 푹 쉬었다.
이 도시의 문제점은 비행기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노선도 몇 개 안 되는데, 간격도 띄엄띄엄하다.
일단 여기서 오카리타로 가는 비행기는 이틀 후에 있었다.
여기서 꼼짝없이 이틀을 더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몇몇 능력자들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유적에서 하루나 이틀 더 머물다 오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반태수는 물론이고 오스윈 프리든도 그 이틀을 호텔에서 편안하게 머물고 싶었다.
페일라 린치필드나 안드렐라 윌렉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들 역시 편안한 호텔이 백만 배쯤 나았으니까.
아무튼 일단 호텔에 틀어박힌 사람들은 아무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반태수는 호텔에 도착한 날 방에 들어가 잠을 자기 시작해, 다음날 아침 일찍 깼다.
그것만으로 모든 피로를 풀었다. 침대에 건 3종 세트 마법 덕분이었다.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는데, 일행 중 아침을 먹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반태수는 느긋하게 식사를 한 다음, 산책 삼아 호텔을 나섰다.
아침이라 그런지 제법 조용했다.
어제 들어올 때만 해도 곳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돌아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반태수는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호텔 주변은 나름 이 도시의 번화가인데도 건물들이 대부분 허름했다.
가끔 새로 지은 것처럼 깨끗한 건물이 있긴 했는데, 그런 건물들조차 벽에 총알 자국이 있었다.
'진짜 오지게 싸우는 모양이네.’
싸움 자체가 관광 상품이라니 오죽하겠는가.
아침에 인적 없는 거리를 걷다 보니, 왠지 시골 읍내 같아서 나름 운치가 있었다.
오전은 그렇게 산책으로 보냈다.
연구할 게 많긴 하지만, 일단 크랙톤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머리를 식히기로 했다.
그동안 너무 달려왔다. 이제 잠깐 쉬면서 기름칠을 해야 할 타이밍이다. 그래야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을 테니까. 여유롭게 생각을 비우고 산책하다보니 너무 멀리 나와 버렸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빠르게 돌아갈 수 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하던 김에 더 멀리 나가봤다. 아예 점심도 밖에서 먹을 작정으로.
도심지에서 멀어질수록 건물이 듬성듬성해지더니 이내 주택가가 나왔다.
주택들도 낡고 허름했다.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사람들의 행색도 볼품없었다.
간혹 무장한 사람이 보였는데, 약이라도 했는지 흐리멍덩한 눈으로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딱 좀비 같았다.
주택가를 지나고 나니 도심지보다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번화가처럼 보이는 곳이 나타났다.
반태수는 슬슬 점심을 먹고자 식당을 찾았다.
느낌이 오는 식당이 하나 있어서 그리로 갔다. 작은 식당이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식당은 노부부가 둘이서 운영하는 모양이었다.
반태수는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벽에 붙은 메뉴를 확인했다.
보통 도시마다 주로 먹는 음식이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크랙톤 같은 경우는 한식과 굉장히 흡사한 음식을 주로 먹고, 오카리타는 밀이 주식인지라 밀과 관계된 음식이 많다.
메뉴를 보니 여긴 온갖 지역의 요리가 뒤섞여 있는 듯했다.
대충 몇 가지 음식을 주문한 반태수는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영역화를 펼쳤다.
"하이고, 지겨운 것들. 또 싸움질이네.”
할아버지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때 식당 문이 벌컥 열렸다.
반태수는 영역화를 쓰고 있었기에 그들이 오는 걸 알았지만 굳이 고개를 돌려 들어온 사람들을 확인했다.
무장한 자들이었다. 이제 당장 싸우러 갈 것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방탄조끼를 입은 채 탄띠와 총을 어깨에 걸쳤고, 허리춤에 커다란 정글도를 매달았다.
덜렁거리는 정글도에서 왠지 피 냄새가 나는 듯하다.
그런 놈들이 여섯 명이나 우르르 들어오니 순식간에 식당이 꽉 차 버렸다.
"여기 고기 종류로 알아서 쌓아봐.”
사내 중 하나가 툭 던지듯 말했다. 한데 말투에서도 피 냄새가 진득하게 났다.
아마 지구에서 이런 놈들을 봤다면 보통 사람들은 소변을 지릴지도 모른다.
저렇게 살기를 풀풀 풍기는 사람을 만나는 건 굉장히 드무니까.
하지만 여긴 이면세계. 저들이 아무리 살기등등해도 일반인에 불과했다.
무장을 했으니 능력자와 싸워볼 수는 있겠지만, 누군가를 두려워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건 저들도 이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할아버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이내 고기가 들어간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이 테이블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반태수는 그걸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한가락 하는 놈들인가 싶었는데, 왠지 분위기가 묘하게 패잔병 느낌이 난다.
아니나 다를까, 영역화에 무장을 한 자들 수십 명이 잡혔다. 그들은 정확히 이 식당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반태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식당에서 50미터쯤 떨어진 곳까지 다가온 무장 병력은 총을 겨눴다.
총구가 향하는 방향은 명백히 이곳 식당이었다.
그들은 식당에 다른 손님이 있건 말건, 식당 주인이 어떻게 되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반태수는 마력 역장을 이용한 실드를 펼쳤다.
보아하니 총과 수류탄 정도를 쓸 모양인데, 그 정도는 실드에 물리력만 부여해도 충분했다.
반태수가 실드를 펼침과 동시에 총알이 쏟아졌다.
두두두두두두!
꽈앙!
어떤 놈이 수류탄까지 던진 모양이다. 하지만 수류탄은 실드에 튕겨서 원래 있던 곳 근처까지 날아가다 터졌다.
수류탄 파편이 공중에서 쏟아지는 바람에 저쪽에 제법 큰 피해가 생겨났다.
총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식당 안에서 밥을 먹던 자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서빙을 하던 할아버지와 주방에 있던 할머니도 마찬가지로 바닥에 엎드렸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건 반태수가 유일했다.
하지만 이내 총소리가 멈추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식당이 멀쩡해도 너무 멀쩡해서 다들 놀랐다. 마치 총알이 하나도 이쪽으로 오지 않은 것 같지 않은가.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슬며시 총을 들었다. 어깨에 메고 있던 탄띠를 대각선으로 둘둘 감은 다음, 조심스럽게 문을 살짝 열고 밖을 확인했다.
"어라?"
수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피 흘리는 적들이 보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사내는 일단 수류탄부터 하나 뽑았다. 그리고 문을 연 다음 냅다 그걸 던졌다.
꽈앙!
수류탄이 터지자마자 밖으로 달려 나갔다.
“다 죽여 버려!”
식당 안에 있던 자들이 우르르 달려 나가며 총을 마구 갈겼다.
두두두두두두!
이내 그곳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쪽에는 고작 여섯 명이고 저쪽은 수십 명이었지만, 시작은 제법 팽팽했다.
저쪽은 수류탄에 두 번이나 당하고 시작하는 셈이었기에 부상자와 사망자가 제법 많았다.
반태수는 열린 문을 통해 그 광경을 보면서 묵묵히 남은 음식을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식당을 운영하는 두 노인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고.
밖의 싸움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수류탄 두 방의 위력이 제법 대단했던 모양이다.
이쪽에서 돌진하듯 달려가 마구 총을 갈긴 것도 잘 먹혀들었던 듯하고.
저쪽은 전멸, 이쪽은 두 명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두 사람은 피칠갑을 한 채 식당으로 절뚝절뚝 돌아왔다.
그리고 남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었다.
두 사람은 다 먹은 다음 돈까지 지불하고 식당을 나섰다.
이제 싸움의 뒷정리를 할 차례였다.
기습을 당하고도 승리했으니 세력 싸움에서 한 계단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반태수는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투 관광은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실드 안에만 있으면 생각보다 안전할 테니, 실드를 장착한 마도구를 들고 전장 안에 들어가 전투 자체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식으로.
솔직히 그냥 구경만 했을 뿐인데도 박진감이 넘쳤다.
반태수는 전투 경험이 있는데도 그러니, 만일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얼마나 심장이 두근거리겠는가.
아마 아드레날린으로 목욕을 하는 기분이리라.
반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잘 먹고 갑니다. 다음에 기회 있으면 또 올게요.”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간 반태수는 가볍게 목을 돌려 몸을 한 번 푼 다음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호텔로 돌아가 봐야 잠이나 잘 텐데 저녁까지 밖에서 먹고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반태수는 그 뒤로 세 차례의 전투를 더 지켜봤다.
모든 전투가 다 치열하지는 않았다. 가장 치열했던 건 처음 식당에서 본 전투가 최고였다.
하지만 치열하지 않다고 해서 재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짧은 전투에 별의 별 전술을 다 써먹는다. 그걸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간을 쓴 가치가 있었다.
‘슬슬 호텔로 돌아갈까?’
저녁밥 먹을 시간이 아직 좀 남았다. 저녁은 돌아가는 도중 마음을 끄는 식당이 있으면 밖에서 먹고, 아니면 호텔에서 먹기로 했다.
솔직히 아까 점심을 먹었던 식당 정도가 아니라면 호텔에서 먹는 게 훨씬 나았다. 일단 호텔의 요리 수준이 상당하니까.
밤에도 싸우는 자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흔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랬다면 어젯밤에 총소리가 들렸을 테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데, 멀리서 또 총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가는 길이니 저것까지만 구경해 보기로 하고 그쪽을 향해 방향을 살짝 틀었다.
영역화를 펼치고 다가갔다. 거리가 그렇게까지 멀지 않았기에 영역화를 펼친 순간 양 측의 모든 사람들이 범위 안에 들어왔다.
"어?”
반태수가 순간 걸음을 멈췄다.
능력자가 상당히 많았다. 양쪽 전부 능력자가 있었는데 한쪽에 특히 더 많았다.
한데 능력자들은 전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능력자들은 한 사람을 둘러싸듯 포진했는데, 그 한 사람을 지키는 듯했다.
중심이 되는 그 사람은 마도구를 가졌는데, 희미한 실드가 펼쳐져 있었다.
웬만한 총이나 수류탄 정도로는 깰 수 없는 실드였다.
하지만 마력에는 취약한 실드였다. 물론 마력이 담긴 공격도 제법 막아낼 수는 있지만, 조금만 출력이 강한 마력 공격을 맞으면 실드가 그대로 붕괴할 위험이 있었다.
‘대체 왜 저런 불안정한 실드를 쓰는 거지?’
차라리 안 쓰느니만 못한 실드였다.
양 측은 각각 50명쯤 되는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정말로 치열하게 서로 총질을 하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꽈앙!
반태수는 다시 걸음을 옮기려다가 또 멈췄다.
'이 익숙한 느낌은 누구지?’
굉장히 익숙한 느낌의 마력이 감지되었다. 분명히 자신이 겪어 본 적 있는 형질의 마력이었다.
‘발드릭?’
분명히 발드릭이었다. 한데 발드릭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그는 분명히 크랙톤에 있었는데.
‘하긴, 여기까지 오지 못할 시간은 아니지.’
발드릭을 만난 지 열흘이 훨씬 넘었다. 그러니 그 사이에 여기 스태플레톤에 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한데 왜 저기서 무장한 자들과 섞여서 같이 싸우고 있단 말인가.
반태수는 서둘러 왜곡으로 모습을 감춘 채 근처로 다가갔다.
발드릭은 신 나게 총질을 하고 있었다.
한데 그의 눈빛은 마치 사냥꾼 같았다. 뭔가를 노리고 있는 듯,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전투 양상은 아주 팽팽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만일 저쪽에 있는 능력자들이 나서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능력자의 수 차이가 나니 저쪽이 유리했다. 하지만 이쪽에는 발드릭이 있다. 아주 형편없이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발드릭이 굉장히 은밀하게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력을 계속해서 압축했다. 그리고 그것을 마력 화살로 가공해냈다.
엄청난 속도로 마력 화살이 날아가 실드에 꽂혔다.
누구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고 빨랐다.
솔직히 반태수는 발드릭에게 저런 마력 운용 능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동안 발드릭이 보여준 모습은 저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마력 화살에 맞은 실드가 그대로 붕괴했다.
실드의 붕괴는 내부로 실드의 물리력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똑같다.
안에 일반인이 있으면 붕괴의 힘을 견딜 수 없다.
지금처럼.
"당장 전투 멈춰!”
능력자들이 외쳤다. 하지만 일단 시작한 전투를 멈출 수는 없었다.
설사 이것이 관광 상품과 관계된 전투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관광 상품이기 전에 세력과 세력의 다툼이었다.
결국 전투에 능력자들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내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그리고 발드릭은 조용히 그 싸움터에서 빠져나갔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은밀하고 능숙했다.
마치 이런 일을 여러 번 해본 것처럼.
반태수는 전장을 한 번 힐끗 확인하고는 발드릭이 사라진 쪽으로 조용히 이동했다.
이 전투는 저쪽, 그러니까 능력자들이 많은 편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 능력자들이 훨씬 더 적극적이었고, 살기가 넘쳤으니까.
아니, 그들은 절박했다. 죽어선 안 될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리라.
반태수는 일단 그쪽은 신경을 끊고 발드릭을 쫓았다.
그쪽은 나중에 따로 알아보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