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 제어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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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수는 권한 부여 마법진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너무 자연스럽게 떠올라서 왜 이런 것이 갑자기 떠올랐는지도 생각하지 못했다.
반태수는 손에 마력을 담아 허공에 대고 슥 당겨봤다.
15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던 권한 부여 마법진이 스르륵 다가왔다.
마치 허공 전체가 터치스크린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걸 지켜보던 세 사람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이, 이게 뭐예요?”
"대체 반 마법사님은……!”
반태수는 바로 앞으로 다가온 마법진에 손을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혹시나 하고 해봤더니 되네요.”
마법진에 접속한 반태수는 바로 사용법을 확인하고 곁에 있는 세 사람에게 권한을 부여했다.
별로 어렵지 않았다. 아주 직관적이었다.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표식이 나타났고, 그걸 선택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다만 권한을 어디까지 인정해줄지 범위를 결정하는 것이 좀 복잡했다. 이유는 설정 리스트가 너무 많아서였다.
'와, 별 게 다 되네.’
일단 제어실 출입 권한부터 시작해서 제어실에 있는 모든 마법진마다 다 설정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위에 있는 유적에 대한 권한 설정도 있었다.
출입 권한에서부터 시작해 육성 시스템 이용 권한까지.
제어실 출입 권한은 동료를 함께 데려올 수 있는 권한부터 몇 명을 데리고 올 수 있는지까지 세세히 설정할 수 있었다.
‘방어 시스템도 있어?’
유적을 방어하는 시스템에 대한 권한도 있었다. 외부에 공격을 할 수 있고, 유적에 들어온 자들을 적으로 설정해 내부 방어 시스템을 가동할 수도 있었다.
참고로 처음 유적에 들어올 때 있던 함정은 내부 방어 시스템에 포함되지 않은 단순 방어 시스템이었다.
"이제 확인 한 번 해보시죠.”
반태수의 말에 세 사람이 가장 먼저 해보고 싶었던 것, 마법진 끌어오기를 시도했다.
"와아! 신기해! 재미있어!”
안드렐레 윌렉스가 몸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나머지 두 사람은 그 정도로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비슷한 기분인 것은 분명했다.
그들은 마법진을 끌어오거나 다시 밀거나 하는 식으로 10분이 넘게 마법진을 갖고 놀았다.
반태수는 저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솔직히 자신이 봐도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허공에 홀로그램 마법진이 있고, 각각의 마법진이 제어장치 역할을 하는데, 그걸 그저 허공에 손짓하는 것만으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만일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마법진을 끌어당긴다면, 우선순위가 높은 쪽으로 간다.
방금 오스윈 프리든과 안드렐라 윌렉스가 같은 마법진을 노렸지만, 결국 마법진이 오스윈 프리든에게 간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놀다가 이내 각 마법진을 통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물론 설명서를 읽을 수는 없었다. 전부 고대문자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글을 읽지 못한다고 해서 마법진을 다루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마법진을 이용해 어떤 식으로 이 유적 내 시설을 제어하는지 차근차근 알아가고 있었다.
사실 반태수에게 설명을 듣는 것이 가장 빠르지만, 그들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이건 평소 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좀 이상한 일이었다.
반태수는 그들이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두고 다시 권한 설정 마법진을 가져가다 좀 더 자세히 살펴봤다.
이건 일종의 매뉴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각 권한에 대해 설명하려면 필연적으로 그 근본이 되는 마법진에 대해 설명할 수밖에 없으니까.
아무튼 반태수는 더 이상 권한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이 유적은 5대 가문으로 넘어간다. 그러니 굳이 권한을 여기저기 남발할 필요는 없었다.
저들에게 준 권한도 결국은 회수해야 할지 모른다.
나중에 문제가 생길 여지는 확실히 없애야 하니까.
아니, 어쩌면 5대 가문에서는 이곳의 권한을 획득할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
아직도 5대 가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들의 실체는 여전히 희미한 안개 같았다.
오스윈 프리든이나 페일라 린치필드도 5대 가문에 관한 얘기는 잘 안 하려고 하고.
그래서 반태수는 일단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은 이 매뉴얼을 이용해 유적에 대한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 진짜 아깝긴 하네.’
이 유적을 고스란히 5대 가문에게 넘겨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아까웠다.
여긴 연구할 것도 많고 얻을 것도 많았다.
심지어 육성 시스템을 이용하면 무술도 연마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매뉴얼을 하나하나 세심히 확인하던 반태수는 갑자기 눈을 번득였다.
‘어? 이런 것도 있네?’
원격 제어기.
반태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원격 제어기라는 이름이 달린 마법진을 찾았다.
‘저기!’
반태수는 얼른 마법진을 끌어왔다. 생각보다 작은 마법진이었는데, 손을 뻗으니 곧장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마치 처음 가운데가 빈 마법진을 만졌을 때처럼.
반태수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원격 제어기를 확인해봤다. 이름 그대로 원격에서, 그러니까 유적 밖에서 유적 내부를 제어하는 장치였다.
이걸 작동하면 이 공간에 있던 모든 마법진과 동일한 홀로그램 마법진이 주변에 생긴다.
그리고 그걸로 유적 내부의 시설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유적의 주인 격인 반태수 외에는 쓸 수 없는 마법진이었다.
반태수는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계속 기능을 확인했다. 혹시 여기까지 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기능이 있을지도 몰라서였다.
그게 가능하다면 어디에서건 여기로 올 수 있으니 계속해서 이 유적을 연구하고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이 생각을 한 건 아까 유적에서 이곳 제어실로 공간이동을 통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공간이동은 없었다. 그저 유적을 제어할 수 있는 홀로그램 마법진만 쓸 수 있는 원격 제어기일 뿐이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이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어쩌면 이 유적을 연구하는 5대 가문의 모습을 확인할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게 몇 개의 마법진을 확인하고 여기에서 다시 유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은 반태수는 다른 사람들이 뭘 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다들 마법진을 하나씩 붙들고 끙끙거리는 중이었다.
고대문자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니 마법진 사용법을 알아내는 것이 정말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반태수는 그걸 보고서 문득 여기까지 다 5대 가문 쪽에 넘겨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5대 가문이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는지, 또 어떤 식으로 연구하는지 확인할 좋은 기회였다.
그들이 고대문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도 한 번 알아보고.
오스윈 프리든이나 페일라 린치필드를 보면, 가신 가문은 고대 문자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전에 오스윈 프리든도 엉뚱한 해석을 하지 않았나.
보아하니 각 가문들 간에 고대문자 연구를 공유하지도 않는 듯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5대 가문도 마찬가지일 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5대 가문은 5대 가문이고, 가신 가문은 가신 가문이다.
5대 가문은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와 지식을 결코 함부로 아래로 흘리지 않는다.
적어도 반태수가 보기에는 그랬다.
왠지 반태수는 5대 가문에 대해 알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까 마법진을 끌어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던 것처럼.
이 유적은 그걸 위한 미끼다.
반태수는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를 손짓해서 불렀다.
두 사람이 반태수의 손짓을 보고는 얼른 달려왔다.
굳이 부르지 않은 안드렐라 윌렉스는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더니 슬그머니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반 마법사님.”
오스윈 프리든이 뭐든 말만 하라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페일라 린치필드는 그와 똑같은 생각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여러 차례 위아래로 끄덕였다.
"일단 여길 발견한 건 두 분이라고 말을 맞췄으면 합니다.”
오스윈 프리든이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러십니까? 여길 발견한 공이라면 상당한 포상이 있을 텐데……."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권한 조정 마법진을 통해 권한을 조정했다.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가 이 권한 조정 마법진을 쓸 수 있도록 말이다.
물론 제한은 뒀다.
일단 각각 15명씩, 총 30명으로 인원을 제한했다.
그렇게 권한을 주고 나면 자연스럽게 권한 부여 권리가 소멸되도록.
또한 부여되는 권한의 종료를 일괄적으로 적용되도록 만들었다.
반태수는 5대 가문에 넘기기 싫은 기능을 골라서 전부 제외해 버렸다.
예를 들면 육성 장치의 설정을 조정하는 권한.
그 권한을 이용하면 제국 정예병으로 설정된 육성 장치를 분대장이나 소대장까지 승급할 수 있었다. 당연히 승급하면 얻을 수 있는 지식이나 능력이 달라지고.
어차피 마법진을 머리 터지게 연구해야 기능을 이용할 수 있겠지만, 굳이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없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조절한 다음, 두 사람에게 권한 설정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일단 제가 알아낸 건 여기까지입니다.”
반태수가 권한 설정에 대해 알려주자, 오스윈 프리든이 당장 그걸 써먹어 보려고 했다.
반태수는 얼른 말렸다.
"어쩌면 인원 제한이 걸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제한 인원이 얼마 안 되면 테스트로 아까운 기회가 날아가지 않겠습니까?”
"아……."
오스윈 프리든은 반태수의 말을 한 점 의심도 없이 그냥 받아들였다.
"그럼 이건 최대한 아껴야겠군요. 나중에 5대 가문에 넘겨줘야 할 테니……."
오스윈 프리든은 그렇게 말하며 페일라 린치필드를 바라봤다.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래야겠네요.”
두 사람은 한층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반태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일단…… 더 찾아야 할 건 없는 듯하니 이제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반태수의 말에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반태수가 마법진 하나를 끌어왔다.
"이게 밖으로 나가는 마법진입니다.”
오스윈 프리든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중에 이거 찾으려면 고생 깨나 하겠군요.”
이렇게 마음껏 마법진을 옮길 수 있으니 결국 이리저리 뒤섞이게 될 것이다.
그걸 구분하려면 제법 고생해야 하리라. 아마 이런 출입에 관련된 마법진은 따로 빼둬야 할 테고.
"미리 빼놓으면 되죠.”
반태수는 마법진을 끌고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 그것을 작동시켰다.
제어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일제히 사라졌다.
***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지하 공간에서 마법진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주변이 달라져 버렸다.
인지할 틈도 없이 원래 유적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까 지하 공간으로 이동할 때와 똑같았다. 그때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주변만 달라졌으니까.
이동에 바로 적응을 한 사람은 반태수를 제외하면 근처에 같이 있던 세 사람뿐이었다.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오스윈 프리든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반태수에게 시간을 주고 싶어서 일정을 최대한 길게 잡았으니 앞으로의 일정도 반태수가 결정하는 게 옳다고 여겼다.
반태수도 원래는 여기서 좀 더 시간을 들여서 육성 시스템을 연구해 보고 싶었지만, 제어실을 손에 넣은 이상,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육성 시스템에 대한 데이터는 잔뜩 얻었다.
육성 시스템을 이용하면서 머릿속에 쑤셔 넣은 데이터와 정보만 해도 몇 달은 침식을 잊고 매달려야 할 정도로 많았다.
"이제 돌아가도 될 것 같습니다.”
반태수의 대답에 오스윈 프리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각에도 여기 더 있어봐야 얻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럼 그러죠. 다들 일정 줄어들었다고 좋아하겠네요. 하하하.”
오스윈 프리든의 지시 하에 능력자들이 모두 유적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니, 베이스캠프에 있던 사람들이 다들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일정이 길어진다고 해서 더 오랫동안 머물 수 있도록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다들 우르르 몰려나오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유적 발굴 일정은 끝났습니다. 우린 먼저 돌아갈 테니, 남은 분들은 마무리 부탁드립니다. 유적에 관한 보고서는 내가 따로 작성해서 상부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탐사 팀이 돌아가더라도 베이스캠프는 당분간 유지된다.
유적 탐사가 끝나고 유물을 모두 발굴했다고 해도, 유적 자체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유적처럼 벽화가 많거나, 혹은 고대문자가 많이 발견되는 경우에는 제법 오랫동안 연구하기 때문에 오히려 베이스캠프의 규모를 키우기도 한다.
아마 이 유적은 그 이상이 될 것이다.
계속 관리해야 하고, 또 유적 자체를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베이스캠프 사람들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내 오스윈 프리든의 지시를 차분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윈 프리든은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과 혹시 5대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면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를 지시한 후, 일행에게 돌아왔다.
"이제 우리는 돌아가죠.”
돌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리자드맨이 나오는 늪지대에서 노숙을 해야 하고, 버스를 타고 불도마뱀이 나오는 지역을 지나가야 하니까.
그래도 다들 가벼운 마음으로 움직였다.
이번 유적 탐사는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반태수는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 쉽게 내 말을 믿는 거 아닌가? 아예 의심 자체를 하지 않는 것 같은데?’
반태수가 오늘 보여준 모습 중에 그들이 의혹을 가질 만한 부분이 상당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의문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드렐라 윌렉스가 더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듯했다.
그런 그녀의 옆에 페일라 린치필드가 붙어서 열심히 대화하고 있었다.
마치 반태수에게 위해가 갈 만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미리 관리라도 하듯이.
반태수의 머릿속이 좀 더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