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이번 유적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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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에 들어가자 긴 복도가 쭉 이어졌다.
30미터 정도 복도가 이어졌는데, 그 사이에는 벽화가 가득했다.
반태수는 걸어가면서 복도에 그려진 벽화를 유심히 살펴봤다. 이미 유적 조사팀에서 벽화를 모두 촬영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는 아무래도 좀 느낌이 다를 터였다.
벽화는 마치 네모난 인간들을 그려놓은 듯했다.
머리도 네모, 몸통도 네모, 팔다리도 네모였다.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의 향연이었다.
한데 그럼에도 제법 정교해서 그들이 무슨 동작을 하고 있는지는 다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거…… 꼭 무술교본 같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반태수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랬다. 벽화에 그려진 모든 사람이 한 가지 동작을 취하고 있었는데, 발차기를 하거나 주먹질을 하는 그림이 중간중간 섞여 있었다.
나머지는 중간 동작이거나 타격이 아닌 그래플링에 관한 동작처럼 보였다.
다만 연속성은 없었다.
그냥 중구난방으로 벽 곳곳에 마구 그린 듯했다.
반태수는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오스윈 프리든에게 물었다.
"벽을 좀 만져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반 마법사님 원하시는 대로 뭐든 하셔도 됩니다.”
반태수는 살짝 고개를 숙여주고는 벽을 손바닥을 슥 쓸었다.
"돌인 줄 알았는데, 금속이네요?”
호기심을 자극했다. 금속 벽에 그려진 벽화라니.
벽화도 손으로 쓸어봤다. 한데 그저 매끈했다. 새긴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언가로 그린 것도 아니었다.
반태수는 감각을 최대한 예민하게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림을 쓰다듬었다.
정말로 이음새가 하나도 없었다. 마치 그림과 벽이 하나로 이루어진 것처럼.
아니면 그림을 그린 다음 그 위를 투명한 무언가로 코팅했거나.
일행 중 함부로 무언가를 만져도 되는 사람은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밖에 없었다.
안드렐라 윌렉스는 자격이 좀 모자랐다. 아니, 많이 모자랐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유적에 관심이 있어서 따라온 것이 아니니까.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가 벽으로 다가가는 동안 안드렐라 윌렉스의 시선은 오직 반태수에게 꽂혀 있었다.
오스윈 프리든은 벽을 더듬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군요. 설마 위에 유리코팅이라도 한 걸까요?”
"유리 같은 느낌은 아닌데, 표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질감이야 달라질 수 있으니……."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가 각각의 느낌을 중얼거리며 의견을 내는 동안, 반태수는 마력을 뽑아내 분석을 시작했다.
이런 건 얼마든지 분석할 수 있다. 그동안 머릿속에 쌓아둔 데이터가 잔뜩 있으니까.
마력을 통해 특성을 파악하는 건 그동안 무수히 해왔던 일이었다.
"일단 금속이고, 코팅을 했네요. 투명한 금속입니다. 안쪽은 돌이고, 벽화는 돌을 파낸 다음, 거기에 다른 금속을 입혔습니다."
반태수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안단 말인가.
"투명한 금속이라니, 그럼 이 표면에 전류가 흐른다는 말인가요?”
"네. 다들 손을 떼는 게 좋겠네요.”
반태수의 말에 다들 얼른 손을 뗐다. 반태수는 그 다음에야 손을 뗐다. 그 순간 벽 전체에 스파크가 튀었다.
파지지직!
다들 깜짝 놀라 반태수를 바라봤다.
"아마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해놓은 장치 같습니다. 다른 기능도 있을 것 같긴 한데…… 그건 잘 모르겠네요.”
반태수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일단 가죠.”
탐사부터 진행하는 게 나았다. 여길 분석할 시간이야 나중에 얼마든지 있으니까.
오스윈 프리든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러죠. 다들 출발합시다.”
일행이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이내 드론의 잔해가 놓인 곳에 도착했다. 함정이 있을 거라 예상되는 곳이기도 했다.
반태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런 함정을 찾고 분석하고 해체하는 건 반태수의 특기였다.
다른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반태수는 굳이 뒤로 빼면서 시간을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
일단 영역화를 통해 함정의 위치부터 찾았다. 간단히 발견할 수 있었다.
함정은 반태수 앞 2미터 지점에 천장과 벽, 바닥을 빙 둘러서 설치되어 있었다.
함정을 해체하지 않으면 그 공간을 지나가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걸려들게 되어 있었다.
일단 발견한 이상 분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반태수는 마력의 실을 함정에 꽂았다.
분석은 빠르게 이뤄졌다. 그다지 어려운 함정은 아니었다. 온전히 마법만으로 이루어진 함정이었다. 그래서 더 분석하기 쉽고 해체하기도 쉬웠다.
저 공간을 지나면 강력한 전격을 쏟아내는 함정이었다.
그동안 벽을 몇 차례나 넘어서 그런지, 아니면 연구를 꾸준히 해서 실력이 늘은 건지, 그야말로 순식간에 함정을 해체해 버렸다.
"됐습니다.”
반태수가 먼저 공간을 지나가자, 다들 안심하고 뒤따랐다.
그때부터 반태수가 앞장서기 시작했다.
반태수는 영역화를 통해 유적 내부의 함정이나 시설을 미리 확인하면서 걸었다.
그 뒤로도 몇 개의 함정을 제거했다. 전부 다른 종류의 함정이었지만 반태수는 어렵지 않게 미리 발견하고 해체했다.
"좀 묘한 느낌이 드는 유적이군요.”
오스윈 프리든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반태수만 빼고.
고개를 끄덕인 사람들은 여러 차례 유적을 겪어본 자들이었다.
일단 이 유적에는 마수가 없다.
그리고 벽화가 너무 많다. 모든 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심지어 어떨 때는 바닥이나 천장에도 그림이 있었다.
그림은 전부 사각 인간의 동작으로 이루어졌다. 가끔 장비를 든 사람도 보였다.
칼이나 방패를 든 사람, 총을 든 사람, 창을 든 사람까지, 다양한 무기를 들고 제각각의 자세로.
마지막으로 완벽하게 인공적이다.
다른 유적들은 이 정도로 인공적이지 않다. 자연과 인공이 뒤섞인 느낌인데, 이 유적은 모든 것이 인공적이었다.
"그나저나 복도가 굉장히 길지 않습니까? 밖의 돌무더기를 이미 지나고도 남을 것 같은데.”
오스윈 프리든의 말에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지 한참 됐죠.”
"복도가 지하로 이어진 걸까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지하로 기울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아무래도 공간 계열의 마법이 유적 전체에 걸려 있는 듯합니다.”
물론 확실치는 않다. 영역화를 통해서 알아낸 사실이 아니라 그냥 짐작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다. 아마 이곳에는 공간을 확장하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공간으로 연결하는 방식의 마법이 걸려 있을 것이다.
"공간 계열이 유적 전체에 걸려 있다니…… 정말로 대단하군요. 이런 방식의 유적을 발견한 건 처음입니다.”
"일단 더 가보죠.”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이 유적에 대해 생각해봤다.
여긴 제국의 병사를 키워내는 훈련소였다.
그렇다면 병사들이 이 길을 지나서 훈련소로 들어갔다는 건데, 대체 함정은 왜 있는 걸까?
'정상적인 방법으로 들어오지 않아서 함정이 발동한 건가?’
그러고 보니 유적 입구가 열려 있었다. 유적 조사팀이 억지로 연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함정이 발동한 것이고.
‘뭐, 어차피 내가 한다고 해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문을 연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하지만 반태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아쉬웠다. 왠지 정상적인 방법으로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복도를 지나다보니, 어느새 끝에 도착했다.
복도 끝에는 넓은 방이 있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벽이 거의 50미터가 넘을 정도로 길었고, 입구에서 벽까지의 길이는 기껏해야 5미터 정도 되는 방이었다.
그리고 50미터짜리 긴 벽에는 문이 빼곡하게 달려 있었다.
"정말 끝까지 특이한 유적이로군요.”
오스윈 프리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유적은 정말 처음이었다.
문의 수를 세어보니 정확히 50개였다.
"일단 제일 끝에서부터 문을 열고 확인해보겠습니다.”
오스윈 프리든은 가장 왼쪽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반태수는 그 뒤를 따라가며 영역화로 문과 문 너머를 확인했다.
영역화는 문을 넘지 못했다. 정확히 문에서 멈췄다.
문의 정보도 확인하지 못했다.
강력한 보안이 걸려 있었다. 아무리 마력을 투사해도 문에서 미끄러지듯 흘러가다가 흩어져 버렸다.
"어? 손잡이가…… 없군요.”
오스윈 프리든은 가장 왼쪽 문 앞에 서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문인가 했는데, 손잡이조차 없는 문이라니.
밀어도 보고 옆으로 당겨도 봤지만 문을 꿈찍도 하지 않았다.
하긴, 이렇게 빼곡하게 문이 있는데 미닫이문은 아닐 것이다. 위로 올라가거나 아니면 밀어서 열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그것도 아니면…… 문이 그냥 사라지거나.’
반태수는 오스윈 프리든 옆으로 다가가 문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마력을 강제로 문에 투사했다.
처음에는 고스란히 미끄러지고 튕겨나고 흩어졌지만, 출력을 계속해서 높이니 어느 순간 문 안으로 마력이 쑥 들어갔다.
일단 마력이 들어갔으니 절반은 끝난 셈이다.
반태수는 마력을 움직여 문에 걸린 보안을 분석했다.
처음 마력을 투사할 때 반발력이 강해서 그렇지 막상 안으로 들어가고 나니 분석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니, 생각보다 단순한 구조였다. 이 문의 보안은 일종의 자물쇠였다. 딱 맞아 떨어지는 열쇠 패턴을 갖다 맞추면 문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그 패턴이 문을 비롯해 문 안쪽에 있는 모든 보안의 열쇠였다.
즉, 패턴을 가진 사람이 문에 그것을 갖다 대면 모든 보안이 풀리면서 문이 열리게 되는 구조였다.
문제는 패턴이 너무 복잡하고 섬세해서 쉽게 만들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반태수는 이면세계의 마력으로 계속 시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자신의 코어에서 마력을 뽑아냈다.
이면세계의 마력과 달리 코어의 마력은 그 복잡하고 섬세한 마력패턴을 아무 문제없이 재현해냈다.
찰칵.
뭔가 맞물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문이 사라졌다.
반태수는 그것이 아공간 마법과 관계되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잡아냈다.
진짜 이 유적에 적용된 마법들은 하나같이 보통이 아니었다.
복도에 설치한 함정만 빼고.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할 리가 없는데.’
그 허술한 함정들이 이 시설이 가진 모든 방어체계일 리가 없었다.
분명히 뭔가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열린 문을 통해 방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가로세로 3미터 정도 되는 공간이었다. 바로 옆방의 문이 고작 30센티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니 여기에도 공간에 관련된 마법이 적용된 모양이었다.
공간 확장이 이렇게 흔한 마법인 줄 처음 알았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천장 전체에서 은은한 빛이 쏟아졌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불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바닥 정중앙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방식은 아까 벽화와 똑같았다. 바닥에 홈을 파고 그 홈에 특수한 금속을 채워 마법진을 그린 다음, 위를 투명한 금속으로 코팅했다.
반태수는 방안에 들어가 내부를 찬찬히 살폈다. 영역화를 통해 마력 반응도 확인하고.
벽에 네모난 판이 붙어 있었다.
그 판에 문에 있는 것과 똑같은 자물쇠 술식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 그 판에 열쇠 패턴을 갖다 대면 바닥의 마법진이 작동할 것이다.
반대쪽 벽에 커다란 문이 달려 있었다.
가서 열어보니 안에 각종 음식과 음료가 채워져 있었다, 놀랍게도 전부 방금 만든 것처럼 싱싱했다.
물론 굳이 먹어보지는 않았다.
"여기는 뭘 하는 곳일까요?”
오스윈 프리든이 반태수를 따라 들어와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반태수야 입구에 있는 고대문자를 통해 여기가 어디인지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굉장히 생소할 것이다.
"작동법을 알 거 같은데, 테스트나 한 번 해보겠습니까?”
반태수의 말에 오스윈 프리든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리고 마침 따라 들어온 페일라 린치필드와 안드렐라 윌렉스의 눈도 똑같이 빛났다.
"저부터 해볼게요!”
안드렐라 윌렉스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마법진 위에 서시죠. 나머지 분들은 비켜주시고요. 멀리 떨어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안드렐라 윌렉스가 얼른 마법진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기대감 넘치는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나머지 두 사람은 입구 쪽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반태수는 벽에 붙은 네모난 판에 마력 패턴을 투사했다.
우우웅!
바닥의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드렐라 윌렉스의 몸이 위로 축 떠올랐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살짝 떠올라 너울너울 춤을 췄다.
그녀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잠시 멍하니 있던 안드렐라 윌렉스가 손을 들어 허공을 콕콕 찍었다.
그리고 잠시 후, 허공에서 마구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한데 그냥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허공에서 무언가와 싸우는 듯했다.
열심히 달리기도 했고 몸을 숙이거나 비틀기도 했다. 때로는 바닥을 구르듯 몸을 던져 빙글 돌았다.
가끔은 무언가에게 얻어맞는지 고개가 뒤로 휙 젖혀지거나 허리를 확 굽히거나 다리가 위로 획 올라가며 넘어지기도 했다.
다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봤다.
한참동안이나 그렇게 움직이다가 이내 그녀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리고 마법진의 작동이 멈추고 그녀가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안드렐라 윌렉스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이거 정말 끝내줘요!”
그녀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완벽한 가상현실이에요! 무기도 선택할 수 있고, 상대도 선택할 수 있어요. 전 일단 제국 병사를 선택해서 싸웠는데, 상대 실력이 대단하더라고요! 마수도 선택이 가능하고 환경도 선택할 수 있어요!”
그뿐 아니다. 기본적인 제국 검술과 체술, 사격술을 가르치는 시스템도 있었다.
마력 운용법에 대한 교육도 가능하고.
그녀의 설명이 모두 끝나자, 페일라 린치필드가 얼른 마법진 위에 올라갔다.
"저도 부탁드려요.”
반태수는 피식 웃으며 마법진을 작동했다.
잠시 후, 오스윈 프리든까지 거기 올라가 제국 병사 훈련 시스템을 체험했다.
아쉽게도 마법사를 위한 시스템은 아니었는지라 오스윈 프리든은 크게 얻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반태수는 달랐다.
반태수는 마지막으로 마법진 위에 올라갔다.
굳이 사각판에 손을 댈 필요는 없는지라 마법진을 작동하는 것도 별 문제가 없었다. 사실 먼저 작동하고 올라가도 상관없고. 빛과 함께 마법진이 작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