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두 번째 유적 탐사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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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씨. 또 왜?”
페일라 린치필드는 오스윈 프리든을 향해 짜증을 담아 말을 내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집으로 곱게 돌아가지 않고 또 이렇게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가에 차를 세우게 만들었다.
운전수가 내리고 그 자리에 오스윈 프리든이 앉았다.
"너 진짜 같이 갈 거야?”
"그럼, 가지도 않을 건데 거기서 그런 말을 했겠어?”
"그런데 안드렐라 윌렉스는 왜 꼬드겨?”
"그래야 뒷말이 분산될 테니까.”
오스윈 프리든이 인상을 팍 썼다. 그럼 자신은 뭐가 된단 말인가.
하지만 굳이 그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페일라 린치필드도 유적 탐사에 참여하면 이미지가 어느 정도 내려앉는다.
그냥 받아들인 다음 피해를 최소로 줄이는 방법을 찾는 것이 훨씬 낫다. 힘을 모아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 말 하려고 나 집에도 못 가게 잡아둔 거야?”
"아니. 팔찌 때문에.”
페일라 린치필드는 팔찌라는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도 오늘 반태수의 손목에 있는 팔찌를 봤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저번에 오카리타에서 사온 쿠키를 주겠다고 잠깐 만났을 때도
봤다.
하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페일라 린치필드는 오스윈 프리든의 집요한 시선에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 그거 아공간 팔찌 맞지?”
"역시 너도 알아봤구나. 그러면……."
"안드렐라 윌렉스도 알더라. 눈썰미 좋잖아. 뭐, 우리가 그게 아공간 팔찌라는 걸 공개하지 않았다면 못 알아봤겠지만.”
유물로 나온 팔찌는 대부분 디자인이 비슷하다. 그걸 구분하려면 굉장한 눈썰미가 필요하다. 그것도 팔찌를 들고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걔는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듣게 얘기해뒀으니까. 자기도 어디서 말하고 다닐 생각 없다고 하더라. 오히려 너나 내가 알아보고 뭔 짓 할까봐 걱정하던데?”
그렇게 말하던 페일라 린치필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드렐라 윌렉스가 반태수를 포기한 것 같지가 않아서였다.
"그래도 수시로 확인하는 게 좋지. 네가 맡아. 이번에 유적도 같이 가기로 했으니 더 잘됐네. 좀 더 친해져."
"그냥 네가 약혼이라도 하면 되는 거 아냐? 계속 옆에 두고 감시할 수 있잖아.”
오스윈 프리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저런 농담이나 할 때인가.
"아직 확인해보지 않아서 그냥 느낌이긴 한데.”
"왠지 네가 말하려는 느낌, 나도 알 것 같네.”
"반 마법사님이 아공간 팔찌 보안 뚫은 것 같지?"
"그런 것 같아.”
"이거 알려지면 제법 시끄러워지겠지?”
"당연하지. 프리든 가에 100개쯤 있지?”
"맞아. 린치필드 가에는 50개 정도 있었나?”
"잘 아네. 다른 가신 가문들도 다들 최소 열 개 이상은 갖고 있으니까.”
"보안 뚫은 거 알면 전부 득달같이 달려들겠지.”
유물을 쓰려면 일단 보안을 뚫어야 한다.
유물마다 보안의 수준이 달랐고, 아공간 유물은 보안이 최상위권에 속해 있었다.
최상위권 유물은 아직 아무도 보안을 뚫지 못했고 말이다.
한데 그걸 반태수가 뚫어버린 것이다. 물론 아직 진짜 뚫었는지 확실하게 확인한 건 아니지만.
굳이 보안도 뚫지 못해서 쓸모없는 아공간 팔찌를 차고 다닐 이유가 없다.
그러니 십중팔구는 뚫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분간은 감춰야 돼.”
페일라 린치필드의 말에 오스윈 프리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런 자리를 만든 거야. 일단 반 마법사님한테는 내가 말하지. 조심해야 한다고.”
"그럼 난 안드렐라 윌렉스나 감시하면 되겠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오스윈 프리든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 마법사님은 자신감이 너무 넘쳐서 그런지 조심성이 없어. 뭐, 그럴 만한 실력이긴 하지만.”
"그게 매력 아니야? 난 재미있는데. 이렇게 뒤에서 서포트 하는 것도 재밌고.”
"뭐, 그거야…… 나도 그렇긴 하지만.”
만일 반태수가 조심성이 너무 많아서 지적할 거나 도와줄 게 없는 스타일이었다면, 마음은 편했을지 몰라도 확실히 재미는 없었을 것이다.
그때, 오스윈 프리든의 전화기가 진동했다.
우우웅!
오스윈 프리든은 폰을 꺼내 슬쩍 확인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 반응을 본 페일라 린치필드가 얼른 발신자를 확인했다.
"반 마법사님……!”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녀의 눈이 오스윈 프리든에게 꽂혔다. 그리고 얼른 받아보라는 듯 눈짓을 했다.
오스윈 프리든은 굳이 페일라 린치필드 앞에서 반태수의 전화를 받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네, 반 마법사님.”
잠시 반태수의 말을 듣던 오스윈 프리든의 눈이 또 한 번 커졌다.
"네? 무술이요?”
페일라 린치필드는 무술이라는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반태수의 말을 들으려 애썼다. 하지만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오스윈 프리든의 전화에는 기본적으로 소리가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도록 조절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프리든 가에서 개발한 마도구였다.
방금처럼 능력자가 통화 내용을 엿들을 수 있기에 그걸 방어하는 것이다.
"당연히 가능합니다만…… 정말로 하시겠습니까? 네, 네. 그럼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오스윈 프리든이 전화를 끊자, 페일라 린치필드가 과할 정도로 그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웬 무술?”
오스윈 프리든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반 마법사님이 무술에 관심이 있는데, 가르칠 사람 소개해줄 수 있느냐는데?”
"무술을 배우신다고? 마법사가?”
마법사가 왜 무술을 배운단 말인가. 물론 취미로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보통 마법사는 그런 쪽에 거의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그 시간을 마법에 투자하면 새로운 마법을 익힐 수도 있고, 마법의 경지를 높일 수도 있는데, 왜 굳이 무술에 시간을 쓴단 말인가.
차라리 그 시간에 마도구 연구를 하면 돈이라도 벌 것 아닌가.
"뭐, 원하시는 대로 해드려야지. 무술이라…… 누굴 소개하지? 보아하니 능력자 전용 무술에도 관심이 있으신 것 같은데.”
오스윈 프리든의 머릿속으로 무술 사범의 명단이 주르륵 지나갔다.
프리든 가에도 무술 사범이 여러 명 있다. 그 중 한 명을 고르면 될 듯했다.
한데 그 고민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페일라 린치필드가 끼어들었다.
"뭘 멀리서 찾아? 바로 앞에 유능한 무술 사범이 있는데.”
오스윈 프리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넌 마음이 새까매서 안 돼.”
페일라 린치필드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그것을 올려 오스윈 프리든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했다.
"온 몸이 새까매질 때까지 맞아볼래?”
하지만 오스윈 프리든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반 마법사님께 흑심을 안 품겠다고 약속하면 그렇게 해주지.”
페일라 린치필드가 피식 웃었다.
"흥, 내가 왜? 나도 전화번호 있거든?”
그녀는 바로 반태수에게 전화를 걸며 차에서 내렸다. 혹시라도 오스윈 프리든이 방해할까봐 자리를 뜬 것이다.
"반 마법사님, 집에는 잘 들어가셨어요?”
오스윈 프리든은 페일라 린치필드가 가식이 가득한 목소리로 반태수와 통화하는 것을 들으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반태수의 무술 수업에 꼭 참관해야겠다.
***
반태수는 전화를 끊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가 같이 있을 줄은 몰랐다. 뭐, 솔직히 같이 있든 말든 상관은 없지만.
중요한 건 반태수와 오스윈 프리든이 통화하는 내용을 바로 옆에서 들었다는 거고, 그래서 페일라 린치필드가 반태수에게 무술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페일라 린치필드야 린치필드 가문의 미래라고 불리는 뛰어난 능력자이니 당연히 상당한 수준의 무술을 익혔을 것이다.
하지만 무술을 잘 하는 것과 잘 가르치는 것은 다른 법이다.
‘뭐…… 자신만만하게 잘 가르칠 수 있다고 했으니 한 번은 믿어 봐도 되겠지.’
반태수는 폰을 주머니에 넣고 걸음을 옮겼다.
아직 집에 도착한 게 아니었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다가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내려서 걸어가는 중이었다.
무술에 대해 오스윈 프리든에게 물어보려고 일부러 그렇게 했다.
좀 걷고 싶기도 했고.
그렇게 걸어서 거의 집에 도착할 무렵, 근처를 서성이는 사람을 발견했다.
한데 아는 사람이었다.
"발드릭?”
오카리타에서 함께 일했던 능력자, 발드릭이었다.
발드릭은 반태수의 말에 고개를 휙 돌려 바라봤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반 마법사님!”
반태수가 살짝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설마 나 만나러 온 겁니까?”
발드릭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데, 왠지 그냥 오고 싶었습니다. 좀 놀라게 해드리고 싶기도 했고.”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이렇게 찾아오셨는데 밥이라도 같이 먹어야죠.”
"아, 아닙니다. 그냥 근처 카페에 가서 가볍게 차나 한 잔 하시죠. 솔직히 그냥 얼굴 보고 싶어서 온 겁니다. 반 마법사님 시간을 많이 빼앗고 싶지 않습니다.”
반태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럼 그러죠."
두 사람은 가장 가까운 카페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간단히 음료를 주문한 뒤 반태수가 물었다.
"정말 얼굴만 보러 온 겁니까?”
"네. 반 마법사님과는 이런 식으로 직접 대면하면서 친해지고 싶었습니다.”
반태수는 묘한 눈으로 발드릭을 쳐다봤다.
참으로 느낌이 묘했다. 뭔가 꿍꿍이를 감추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길게 보고 뭔가를 계획한 모양이었다.
발드릭은 정말로 잠깐 얘기만 나누다가 돌아갔다.
한데 반태수는 대화하는 내내 발드릭이 자신을 조금씩 떠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오카리타에서도 느꼈지만 발드릭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불만이 많았다.
그는 은근슬쩍 반태수도 혹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닌지 돌리고 돌려서 떠보곤 했다.
반태수는 적당히 반응을 보여줬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듯한 분위기로.
아예 벽을 치기에는 발드릭이 왜 이러는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약간의 여지를 준 것이다. 천천히 본색을 드러내라고.
‘설마 5대 가문을 무너뜨리려는 조직, 뭐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런 걸 시도하기에는 5대 가문이 가진 힘이 너무 막강하다. 그러니 진짜 그러려면 5대 가문에 버금가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 힘이 있더라도 성공 가능성보다는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
아무튼 발드릭은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듯하다.
***
반태수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지금 이곳은 윌렉스 가에서 쓰는 체육관 중 하나였다.
안드렐라 윌렉스가 주로 쓰는 장소라고 하는데, 상당히 넓고 시설도 좋았다.
지금 그곳에 페일라 린치필드가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반태수을 마주보고 서 있었다.
좀 떨어진 곳에서 오스윈 프리든과 안드렐라 윌렉스가 지켜보고 있었고.
"일단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보죠. 가장 중요한 건 자세입니다. 기초 자세부터 시작할게요.”
페일라 린치필드는 반태수에게 기본적인 자세부터 가르쳐 주었다.
그녀가 가르치는 무술은 지구에 있는 온갖 종류의 격투술을 모아 놓은 듯했다.
그래서 기초 자세가 굉장히 다양했다.
주먹질부터 발길질, 심지어 그라운드 기술까지 섞여 있었다.
반태수는 열심히 그녀가 가르쳐주는 기초 자세를 흡수했다.
페일라 린치필드는 가르치는 내내 감탄했다.
"배우는 게 정말 빠르시네요. 설마 처음 배우는 게 아니라 숙련자인데 초보인 척 하시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겠나. 그런 데 쓸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마법 연구를 할 거다.
"생각보다 진도를 빠르게 나갈 수 있겠어요. 솔직히 유적 탐사 떠나기 전까지 기초만 차근차근 훈련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식이면 다음 단계로 바로 나가도 되겠는데요?”
기초 다음 단계는 마력을 움직이는 훈련이었다.
"다음 단계는 정말 별 거 없어요. 움직임에 마력을 살짝 담는 거니까. 마력을 제대로 담으면 빠르고 강해지는 건 알고 있죠?”
그 다음은 별 거 없다. 끊임없는 반복 숙달이다.
반복하고 반복해서 익숙해지면 움직임에 마력을 더 효율적으로 담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근육이나 뼈에 전혀 무리가 가지 않은 상태로 마력을 담을 수 있다.
그게 되면, 아무리 강력한 공격을 해도 육체에 부하가 걸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 완벽하지 않으면 아무리 마력을 담는다고 해도 육체에 부하가 걸린다는 뜻이다.
반태수는 페일라 린치필드의 설명을 들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몸을 움직이며 마력을 담았다.
이면세계의 난폭한 마력은 무술을 할 때 훨씬 유용했다. 같은 마력을 담아도 위력이 더 컸고, 반응속도도 더 빨랐다.
반태수가 혼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페일라 린치필드가 가장 무술에 능하긴 하지만, 다들 어느 정도 무술을 익혔고, 그에 관한 지식도 충분히 쌓았다.
그렇기에 보는 눈은 있었다.
그런 그들이 보기에 반태수는 좀 이상했다.
"이건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안드렐라 윌렉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나머지 두 사람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태수는 지금 무술을 몇 년은 수련해야 오를 수 있는 경지에 몇 번 연습한 것만으로 올랐다.
기본 동작이나 자세는 솔직히 약간 어설픈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마력을 담기 시작하자, 얘기가 확 달라졌다.
뼈와 근육, 신경세포에 마력을 담는 능력은 정말 대단했다.
"와, 이거 진짜 재미있네요.”
반태수가 한참 동안 반복 훈련을 한 다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세 사람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유적 탐사에 나서기 전까지 저렇게 훈련하고 나면, 앞으로 굳이 페일라 린치필드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을 듯했다.
그리고 반태수는 무술을 수련하는 내내 자신이 최근 연구하고 완성을 앞둔 육체 강화 마법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이 무술 수련이 육체 강화 마법의 연구에 제법 도움이 될 듯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