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두 번째 유적 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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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반태수가 전화를 받자, 설마 진짜 통화가 연결 될 줄 몰랐는지 키에라 나서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얼른 정신을 다잡고 말을 쏟아냈다.
- 정말 뭐예요! 내가 연락 잘 받으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잘 받겠다고 대답한 기억은 없는데……."
- 뭐라고요?
그녀의 목소리 톤이 한 단계 높아졌다. 경험적으로 이럴 때 굳이 받아치면 피곤해진다.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연락하나요?
반태수는 또 대꾸할 말이 없었다.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찍혀 있으면 보통은 무슨 일이 있다고 여기지 않을까?
"그럼 별 일 아닌 걸로 알고 끊겠습니다.”
- 잠깐만요! 아니, 뭐가 그리 급해요? 우리 아직 인사도 안 한 거 알아요?
인사를 안 하도록 대화 흐름을 이끌고 간 건 분명히 키에라 나서스 같은데, 왜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할까?
반태수는 굳이 그에 대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키에라 나서스는 그 뒤로 잠시 침묵을 지켰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할 말이 있긴 한데, 선뜻 말이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 앞으로는 연락 잘 받아요.
"상황이 허락하면요.”
- 이익. 그럼 또 내 연락을 씹겠다는 거예요?
"연락을 못 받는 상황이 많아서요. 내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다 이해하던데.”
- 이해야 하죠. 그래도 어느 정도여야죠. 제가 몇 통이나 전화를 했는지 아세요?
"여기 부재중 전화 찍혀서 잘 알죠. 37통 했네요.”
- 아오, 얄미워!
키에라 나서스는 그렇게 한 차례 분통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 아무튼 앞으로는 연락 잘 받는 걸로 믿을 게요. 그리고 유물 리스트 보낸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답이 없어요?
"아, 아직 고르고 있었어요. 선택하기가 애매해서.”
물론 그건 핑계고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지구에서는 쿠키에 모든 걸 다 걸었으니까.
- 그것도 얼른 알려줘요. 유물 직접 들고 찾아갈 테니까. 거기 크랙톤이죠?
굳이 찾아온다는 말에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유물인데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는 좀 그럴 테니까.
"최대한 서둘러보죠.”
- 후우.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내일은 제 연락, 꼭 받길 바라죠.
키에라 나서스는 그 말을 끝냄과 동시에 전화를 끊었다.
자기 할 말만 다 하고 끊은 기분이 들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
지금 신경 써야 할 일이 그거 말고도 수두룩하니까.
‘그럼…… 쿠키 주러 가는 길에 유물이나 골라 볼까?’
반태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쿠키와 커피를 챙겼다.
***
"으음, 나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스윈 프리든의 말에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은 페일라 린치필드와 안드렐라 윌렉스가 그를 바라봤다.
두 사람 역시 오스윈 프리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였다.
오늘의 모임을 주도한 반태수가 테이블 위에 쿠키 상자와 커피 병을 각각 세 개씩 내려놨다.
"가끔 이렇게 밖에서 만나는 것도 좋을 거 같아서 여기로 장소를 정했습니다. 괜찮으시죠?”
물론 엄대협의 도움을 받았다. 이런 장소가 있다는 걸 반태수가 어떻게 알겠는가.
"가끔 이런 곳에 오는 것도 나쁘지 않죠. 계곡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안드렐라 윌렉스가 그렇게 말하며 오늘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확인했다.
이곳은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카페였다.
반태수는 솔직히 여기 와서 놀랐다. 크랙톤 안에 이런 계곡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오스윈 프리든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저들은 다들 여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마 제법 유명한 장소인 모양이었다.
집으로 또 초대하려니, 준비가 너무 번거로워서 그냥 밖에서 만나기로 한 건데, 막상 와 보니 잘했다 싶었다.
"일단 선물은 챙기시고, 이걸 드시죠.”
반태수는 미리 준비한 커피와 쿠키를 따로 접시와 컵에 담아 각각의 일행들 앞에 내려놓았다.
정확히 인원수대로 나눴다. 안 그러면 나중에 후폭풍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심지어 커피의 양도 똑같이 맞췄다.
이번에도 가장 먼저 손을 뻗은 건 안드렐라 윌렉스였다.
쿠키를 바삭 깨물었다. 그녀의 눈이 절로 감겼다.
"으음."
솔직히 약간 기대를 하긴 했다. 그 어마어마한 커피를 만든 사람이 새로 개발한 쿠키의 맛이니 분명히 대단할 거라고.
하지만 막상 먹고 나니 그런 자잘한 생각이 싹 사라졌다. 이런 쿠키가 세상에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쿠키를 또 한 입 먹고 있었다. 그때 반태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커피도 같이 마셔야죠.”
그래서 반사적으로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으으음!”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이걸 대체 뭐라고 표현한단 말인가.
각각 따로 먹어도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맛과 향인데, 둘이 합쳐지니 맛과 향이 몇 배나 증폭된 것 같았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쿠키가 바닥났고, 커피도 모두 마신 후였다.
“……아!”
멍하니 두 손을 내려다봤다. 대체 언제 이걸 다 먹었단 말인가.
그리고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는 멍하니 안드렐라 윌렉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두 분은 안 드십니까?”
반태수의 물음에 두 사람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왠지 두려운 눈으로 커피와 쿠키를 내려다봤다.
자신도 이걸 먹으면 저렇게 되는 건가 싶어서였다. 안드렐라 윌렉스는 마치 순간적으로 자신을 잃어버린 듯하지 않던가.
두 사람은 고개를 들어 반태수를 바라봤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이거 설마 마약 섞은 건 아니죠?”
페일라 린치필드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반태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마약이요? 갑자기 웬 마약? 이거 먹으면 오히려 건강해지는 거 못 느꼈습니까?”
"아니, 전 그냥 농담으로 한 얘기에요. 맛있어도 어느 정도여야죠.”
"아아, 그런 얘기였군요. 마약 같이 자주 찾게 되는 맛.”
그런 문구로 홍보하는 맛집들 많지 않나.
"아무튼 얼른 드세요. 저도 주변 반응을 확인해야 더 만들지 말지 결정하죠.”
오스윈 프리든과 페일라 린치필드는 피식 웃은 뒤 쿠키를 먹었다.
워낙 기대를 많이 했고, 안드렐라 윌렉스의 반응을 보고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했기 때문인지 그녀처럼 과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놀랐다. 이 쿠키는 정말 놀라운 맛이었다.
두 사람은 그 상태로 커피를 마셨다.
그 뒤의 반응은 안드렐라 윌렉스와 비슷했다. 다만 그녀와 달리 아예 정신을 놓지는 않았다.
그래도 쿠키와 커피를 남기지는 않았다. 이걸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이건 판매해선 안 될 음식이네요. 아마 분명히 사회적 파장이 있을 겁니다.”
오스윈 프리든이 기분 좋으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에 페일라 린치필드와 안드렐라 윌렉스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반태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시죠?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는 거. 친구들한테는 얼마든지 만들어드립니다.”
그 말을 들은 세 사람의 머릿속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만일 이 쿠키와 커피를 얻어서 다른 사람에게 선물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굉장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이 쿠키와 커피는 솔직히 마약 같은 중독성이 있는 건 아니었다.
간절히 원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금단 증상이 있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아니, 오늘 둘을 동시에 먹었을 때를 생각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먹을 때는 집착했지만 막상 다 먹고 난 다음에는 그래도 이걸 안 먹고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만일 이걸 구할 수 있는 길이 생긴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구할 것이다. 웬만한 대가라면 얼마든지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수량이 한정적이라면?
경매가 벌어질 것이다.
이런 귀중한 걸 이용할 수 있다면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더구나 힘 있는 가문의 자식들이다.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지 않겠는가.
세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며 반태수를 바라봤다.
어쩌면 이걸 이용해 반태수를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지금 당장 그 얘기를 꺼낼 수는 없지.’
세 사람이 또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 일단 좀 더 시간을 두고 반태수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자신들은 반태수를 믿지만, 반태수가 자신들을 믿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절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이거 정말 대단하네요. 한 번 먹기 시작하니 끊을 수가 없군요.”
반태수가 빙긋 웃었다.
"그래서 쿠키를 여러 개로 나눠서 포장했습니다. 신경 좀 썼죠.”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솔직히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쿠키에 커피를 곁들여서 먹어봤다. 물론 굉장하긴 했다. 하지만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저들이 과장된 반응을 보여준 거라고 여겼다. 한데 지켜보니 그건 아니었다.
‘나랑은 다른가?’
저들과 자신의 차이점이라고는 코어의 유무다. 어쩌면 코어 때문에 마력에 대한 지배력이 높아서 마력이 담긴 음식의 영향을 덜 받는 지도 모른다.
물론 가정일 뿐,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반태수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세 사람이 자신이 받은 선물을 잘 챙겼다.
그리고 두런두런 대화를 시작했다.
큰 의미가 담긴 대화는 없었다. 그저 일상을 얘기했다.
아주 가끔 각 가문에 대한 얘기가 살짝 나오긴 했는데, 그 역시 큰 의미는 없었다.
그러다가 오스윈 프리든이 반태수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반태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오스윈 프리든이 입을 열었다.
"반 마법사님, 예전 제게 유적 탐사에 관심이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반태수의 눈이 살짝 커다래졌다.
"맞습니다. 유적이나 유물에 큰 관심이 있습니다. 마법사라면 다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유적 탐사 일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반태수가 눈을 반짝이며 오스윈 프리든을 바라봤다.
그걸 본 페일라 린치필드가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유적을 좋아하셨군요.”
페일라 린치필드의 말에 반태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혹시 유적 탐사 기회가 생기면 꼭 말씀드릴게요.”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반태수는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앞으로 유적 탐사의 기회가 더 많이 찾아올 테니까.
"이번에 발견한 유적에 가려면 일단 스태플레톤에 가야 합니다.”
"스태플레톤?”
당연히 반태수는 처음 듣는 도시였다.
"여기서 5천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입니다. 직항이 없어서 중간에 다른 도시를 한 번 경유해야 합니다. 제법 멀죠. 그래도 가시겠습니까?”
반태수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안드렐라 윌렉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적 탐사에 외부인을 참여시키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그래도 되나요?”
오스윈 프리든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미 가문의 어르신들로부터 허락을 받았으니 괜찮습니다. 사실 이쯤 되면 반 마법사님을 외부인이라고 하기는 좀 어렵죠.”
자신만만한 오스윈 프리든의 모습에 페일라 린치필드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실 저게 가장 큰 문제다.
린치필드 가문도 유적 탐사에 대한 권한이 있다. 자체적으로 유적을 찾고, 그것을 탐사하고 발굴할 수 있다.
물론 5대 가문에 보고는 놓치는 것 하나 없이 세심하게 해야 하고, 그들이 원하는 유물을 상납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지시사항이 있으면 지켜야 하고.
아무튼 유적을 얼마든지 찾고 발굴할 수 있지만, 거기에 외부인을 넣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체 오스윈 프리든이 무슨 방법을 써서 저걸 가능하게 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자신이 생각한 방법은 기껏해야 외부로 돌려야 하는 급이 낮은 유적에 참여하는 정도인데 말이다.
페일라 린치필드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무래도 듀스트론에 초대 먼저 해야겠어.’
저런 인재를 눈 뜨고 프리든 가에 빼앗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짓이었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오스윈 프리든은 유적 탐사 일정에 대해 반태수와 계속 얘기를 나눴다.
"일단 새로 발견한 유적을 분석하고 탐사 준비를 하는 데 시일이 좀 걸리니 그동안 처리할 일이 있으면 마무리 하시고 떠나시죠."
"어차피 처리할 일도 거의 없습니다. 탐사는 언제부터 시작하는 겁니까?”
"분석하고 준비하고 인원을 꾸리고 이것저것 해서 서두르면 열흘 후에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걸리는 시간이 길다. 하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새 유적을 탐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벌써 심장이 두근거리고 단단히 뭉친 코어의 마력이 말랑말랑해지고 있었다.
“나도……."
갑자기 페일라 린치필드가 입을 열었다.
다들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탐사에 끼고 싶은데.”
오스윈 프리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거 굉장히 복잡하고 뒷말도 많아지는 일이라는 거 알고 있지?”
"내가 대가를 깔끔하게 포기하면 복잡할 일이 없잖아. 뒷말이야 우리 둘이 선을 확실히 그으면 나올 일도 없고.”
말을 할수록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끝날 무렵엔 다시 자신감을 되찾은 원래의 그녀로 되돌아갔다.
오스윈 프리든이 눈살을 찌푸리고 페일라 린치필드를 바라봤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겠느냐는 표정이었다.
페일라 린치필드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겠다는 표정으로 오스윈 프리든을 바라봤다.
한 치도 물러날 것 같지 않자, 오스윈 프리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대로 해라. 단, 난 안 도와준다. 끼고 싶으면 알아서 하든지, 말든지.”
페일라 린치필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거야 당연하지.”
그녀는 반태수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이번 탐사, 잘 부탁드려요. 기대하고 있을 테니.”
반태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