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드디어 아공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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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이거 지독하네.”
반태수는 잠에서 깨는 순간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 때문에 인상을 팍 썼다.
어제 마력이 들끓는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깨어나 보니 주변이 온통 새까맸다.
옷도 까맣게 물들었고, 바닥에 있는 건 보고 싶지도 않았다.
반태수는 일어나서 가볍게 마력을 돌렸다.
후웅.
훨씬 농밀해진 마력이 코어에서 뿜어져 나와 온몸을 한 차례 휘돌고 다시 코어로 돌아갔다.
한동안 정체 되었다는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최근 성장세가 정말 무섭다.
빠르게 마법진을 만들었다. 물을 만들어내는 마법진이다.
촤아악!
머리 위에 커다란 물 덩어리를 만들어 그걸로 몸을 한 차례 씻어냈다.
좀 더 정교하게 조절해 몸을 가둬놓고 휘휘 돌릴 수도 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다.
이건 샤워실에 들어가 꼼꼼하게 닦아내야 한다.
그리고 여기 청소는 좀 민망하지만 저택 관리팀에 맡겨야지 별 수 있나.
몸이 흠뻑 젖었지만 수분을 날려버리는 정도야 간단했다.
정교하고 빠르게 술식을 구성해서 마법진을 그렸다.
샤아아.
마법이 작동하며 몸에 달라붙은 습기를 몽땅 날려 버렸다.
반태수는 일단 유물들부터 챙겼다.
연구실 안에는 커다란 금고가 있었고, 그 안에 중요한 물건들을 보관했다. 대부분 유물이었다.
반태수는 금고에 유물을 넣어두고는 저택 관리팀에 연락해서 연구실 청소와 환기를 부탁했다.
아마 그들은 반태수가 무언가를 연구하다가 잘못되어서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여길 것이다.
그게 낫다. 이게 전부 사람의 몸에서 쏟아져 나왔다는 걸 알면 앞으로 그들을 마주하기 좀 민망할 테니까.
반태수는 연구실 문을 활짝 열어두고 그곳을 나섰다.
이제 제대로 씻을 차례였다.
샤워실로 가서 몸을 꼼꼼히 씻으며 동시에 벽을 넘으면서 달라진 몸 상태를 확인했다.
코어가 의미 있을 정도로 성장했고, 몸에서 움직이는 마력의 속도가 좀 더 빨라졌다.
솔직히 그때 몸의 불순물을 그렇게 많이 빼냈는데, 아직도 그렇게나 많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아무튼 그 덕분인지 마력 컨트롤 능력이 더욱 향상되었다.
그 다음으로 어제 뚫었던 아공간 팔찌의 보안을 떠올려봤다.
머릿속에 모든 보안 체계의 그림이 아주 명확하게 그려졌다.
이번 깨달음을 통해 술식을 대하는 관점이 좀 더 다양해졌다.
앞으로도 이런 다양한 관점을 더 얻어야 마법이 발전한다는 걸 깨달았다.
향후 마법을 어떻게 수련하고 공부하고 연구할지에 대한 방향을 조절한 셈이 되었다.
반태수의 샤워는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끝났다.
***
"음? 또 웬일이야? 뭐 잊은 거라도 있나?”
반태수의 물음에 엄대협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웬일이냐니, 너 의뢰 받기로 했잖아.”
"의뢰? 그랬지, 아마? 근데 그게 왜? 뭐 변동사항이라도 생겼어?”
엄대협이 멍하니 반태수를 바라봤다. 아니, 대체 왜 이렇게 뻔뻔해졌지?
"오늘이 약속일이장아. 공항에 가야지.”
"어? 오늘이라고?”
반태수가 살짝 당황했다. 방금 샤워하고 나왔는데 엄대협이 찾아왔다고 해서 응접실로 온 참이었다.
한데 의뢰 약속일이 오늘이라니.
반태수는 아공간 팔찌 분석을 시작한 지 24시간까지만 시간의 흐름을 기억했다.
그 뒤에 얼마나 더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기절하듯 자긴 했지만, 그 시간이 길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경험에 의한 건데, 벽을 넘은 다음 잠들면 보통 1시간이나 2시간 이내에 깬다.
그렇다면 무려 24시간 이후에 이틀이나 집중했다는 뜻이다.
‘확실히 그 정도면 벽을 넘을 만했네.’
이번엔 정말 운이 좋았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정신이 없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네. 옷 좀 갈아입고 준비하자. 시간은 아직 괜찮지?”
"공항까지 가는 시간도 생각해야 하니까 30분 이내로 끝내야 돼.”
"알았어.”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달려가 옷부터 갈아입었다. 그리고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는 별 거 없었다. 연구실로 가서 유물 몇 개 챙기고 아공간 팔찌를 확인한 다음 의뢰를 수행하는 동안 쓸 물품들을 아공간에 넣으면 끝이다.
연구실로 갔더니 아직도 청소 중이었다. 한 시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청소하고 있는 걸 보니 살짝 미안하면서도 민망했다.
반태수는 얼른 금고를 열고 안에 있는 유물 중에서 오스윈 프리든이 선물한 몸을 보호하는 팔찌와 아공간 팔찌를 꺼냈다.
이번에는 이 두 개만 있으면 될 듯했다. 나머지는 마법으로 충분히 때울 수 있다.
금고를 닫으려는데 안에 있는 수정구가 잠깐 눈에 들어왔다.
이건 마법사의 직감 같은 거다. 다음 연구는 저 수정구로 정했다.
금고를 닫은 반태수는 빠르게 이동해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그 와중에 아공간 팔찌를 잠깐 살펴봤는데, 역시나 고대문자로 이루어진 보안이 있었다. 암호도 동일했고.
아공간 팔찌의 수식을 본 순간, 혀를 내둘렀다.
이건 그냥 복잡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동안의 유물이 위상공간과 간섭을 이용해 술식을 구성했다면, 이건 아예 위상공간 자체를 이용해 술식을 구성했다.
아마 아공간 팔찌의 기본 보안을 뚫으며 벽을 넘지 못했다면 이 술식 구성 자체를 아예 인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건 선을 넘었는데?’
반태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걸 분석하려면 아마 몇 년 동안 침식을 잊고 매달려야 할 듯했다. 아니, 그렇게 한다고 해서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반태수는 일단 깔끔하게 포기했다. 나중에 실력을 올린 다음 다시 도전하면 그만이다.
팔찌를 손목에 찼다. 기본 보안을 뚫은 순간부터 이 유물을 사용할 수 있었다.
"어?”
팔찌에서 마력이 흘러나와 몸으로 침투하려 했다. 반태수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막았다.
그냥 단순한 마력이 아니라, 정신을 건드리는 마력의 느낌이 들어서였다.
"이거 진짜 안전한 거 맞아?”
아마 지구에 있었다면 결코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냉철하고 계산적일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받아들여도 되는 이유가 떠올랐다.
아공간을 정신에 연결 시켜서 다루는 것 아니겠는가.
반태수는 극히 조심스럽게 막았던 마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무작정 받아들이지 않고 근처에 자신의 마력을 모아 언제든 튕겨낼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래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위험에 대한 리스크를 감안할 수 있을 정도로 아공간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
‘마법사라면 가는 거지.’
이런 충동은 또 못 참는다.
몸으로 스며든 마력은 반태수가 예상했던 대로 머리를 향해 슬금슬금 움직였다.
반태수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단숨에 연결되었겠지만, 하도 다양한 마력을 동원해 감시 중이었는지라 속도가 굉장히 느렸다.
이내 마력이 뇌에 연결되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아공간 내부의 모습이 펼쳐졌다.
반태수는 빠르게 그걸 넷으로 나뉜 자신의 두뇌 중 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이런 식이로군.’
아공간 안에 있는 물건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그냥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다면 마력을 팔찌로 되돌리는 것도 가능했다.
연결된 순간 아공간 팔찌의 사용법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남았다.
반태수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믿어도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100% 믿지는 않았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확인할 것이다. 술식을 완벽하게 분석해서 자신이 이것과 똑같은 걸 만들어낼 수 있을 때까지.
아공간 안에는 다양한 음식이 잔뜩 들어 있었다. 식량 보관소라고 해서 곡물이나 야채, 고기 등이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것 보다는 완성된 요리 위주로 들어 있었다.
‘재밌네.’
반태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챙긴 물건들을 아공간에 넣었다.
아무튼 드디어 아공간이 생겼다.
***
크랙톤의 공항은 한국에 있는 인천공항과 비슷한 규모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좀 달랐다.
내부에 쇼핑센터를 비롯해 다양한 편의시설이 있었다. 극장이나 게임센터, 노래방 같은 곳도 있었다.
잠깐 걷다 보면 여기가 공항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반태수가 주위를 구경하는 걸 본 엄대협이 씨익 웃었다.
"공항도 처음이지? 그럼 당연히 항구에도 안 가봤겠네?”
반태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항구? 여기 항구도 있어? 이 도시에 바다가 붙어있을 줄은 몰랐는데?”
"큭큭큭. 하여간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진짜 바다는 배를 띄우기 힘들어. 바다에 사는 마수가 좀 무시무시하거든. 크기도 크고.”
바다에는 다양한 마수가 산다. 그리고 압도적으로 거대한 마수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다에 도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바다에 있는 커다란 섬에는 충분히 도시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냥 큰 섬이 아니라 대충 제주도의 절반 정도는 되어야 하지만.
바다 속 거대 마수가 작정하고 덤비면 작은 섬 하나 물로 뒤덮어 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해일에 쓸려버리는 것이다.
그 해일을 타고 바다 속 작은 마수들이 함께 들어가면 지옥도가 펼쳐진다.
실제로 수백 년 전에 그런 식으로 도시 몇 개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니 바닷가에 접한 도시는 없다.
다만 거대한 호수를 접한 도시는 있었다.
호수에도 마수가 살지만, 바다와 달리 충분히 인간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호수에는 배를 띄울 수 있다.
엄대협의 자세한 설명에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흥미로웠다.
"내가 말한 항구는 배가 아니라 비행선을 띄우는 곳이야.”
“비행선?”
반태수의 눈이 또 흥미로 물들었다.
"비행기보다 속도는 현저히 느리지만, 많은 물자를 한꺼번에 수송할 수 있으니까.”
반태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알고 있던 비행선과는 많이 다른 모양이었다.
"비행선의 단점은 느리다는 거랑, 비행고도가 좀 낮다는 거 말고는 없어.”
그래서 공중 마수에 대한 대비를 반드시 해야 한다.
비행기는 마수들이 활동하는 높이를 아득히 넘어설 정도의 고도를 날아가니 상관없지만, 비행선은 그렇지 않으니까.
다만 공중 마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비행선 운항이 생각보다 많이 위험하거나 하지는 않다.
"나중에 항구에 갈 일도 있을 거야. 그쪽에서 쌓이는 의뢰가 엄청나니까.”
확실히 공중 마수를 대비하려면 능력자나 마법사를 태우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렇게 비행선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직 안 온 모양이네.”
"우리가 약속 시간보다 좀 일찍 온 거지.”
엄대협의 말에 반태수가 그를 쳐다봤다.
아까 아공간 팔찌 때문에 시간을 초과하는 바람에 엄대협이 늦었다고 얼마나 우는 소리를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일찍 왔다고?
"많이 일찍 온 건 아니야. 한…… 15분 정도?”
애매한 숫자다. 저거보다 더 길었으면 한소리 하려고 했는데, 15분 정도면 허용범위를 넘어가지는 않았다.
반태수가 미묘한 표정으로 엄대협에게 한소리 할까말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다행히 자샤드 쪽에서도 조금 일찍 도착한 모양이었다.
자샤드에서 나온 사람의 수는 총 18명이었다.
보아하니 저 중에서 15명이 호위 목적으로 온 능력자들이고 3명이 자샤드의 대표와 직원들인 듯했다.
반태수는 단숨에 저들의 역량을 파악했다. 영역화가 훨씬 쉽고 간단하게 펼쳐졌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정보도 훨씬 세밀해졌다.
‘열두 명은 제법 괜찮은 수준이고 세 명은 상당한 수준.’
저 세 명의 능력자가 반태수처럼 자샤드에서 따로 의뢰를 넣은 자들이 분명했다.
반태수가 자샤드 쪽 사람들을 살피는 사이 엄대협은 대표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눴다.
그러더니 반태수를 보며 얼른 오라고 손짓을 했다.
"이쪽이 마법사 반입니다.”
그러자 대표가 손을 내밀었다.
“자샤드의 대표인 칼드웰입니다.”
반태수가 그의 손을 잡았다.
"반입니다.”
칼드웰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일단 비행기에 탑승부터 합시다.”
자샤드 일행은 바로 게이트로 향했다.
엄대협은 멀어져가는 반태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럼 잘 다녀와. 난 재미있는 의뢰 있나 찾아보고 있을 테니까.”
반태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만 슬쩍 들었다가 내려놨다.
엄대협은 자샤드 일행이 게이트로 나갈 때까지 가만히 서서 지켜봤다.
"아, 선물 사오라고 하는 거 잊었다. 오카리타면 쿠키랑 사탕이 아주 끝내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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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타는 건 지구의 공항과 똑같았다. 게이트와 비행기가 연결되어 있고, 그 통로를 따라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다만 여권을 검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신분증을 확인하는 걸로 끝이었다.
보아하니 신분증을 확인하면서 범죄에 관련된 사항을 체크하는 듯했다.
‘여긴 나라가 따로 없어서 그런가? 뭔가 허술한 듯한 느낌이 드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비행기에 탑승하는데, 사방에서 마력 반응이 느껴졌다.
이면세계답게 비행기에도 마도구가 엄청나게 들어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이 부품이리라.
모든 사람이 비행기에 탑승하고 몇 가지 절차를 거친 뒤 별 딜레이 없이 비행기가 출발했다.
반태수는 비행기가 떠오르는 감각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른 도시에 가는 건 처음이다.
게다가 오카리타는 식량 생산 도시다. 과연 도시의 모습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했다.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