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 초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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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대협한테 맡기길 잘했어.’
반태수는 새삼 그런 생각을 하며 손님들을 정중히 맞이하고 있는 집사를 내려다봤다.
초대에 대해 엄대협에게 말하자마자 접객의 전문가를 모셔온 것이다.
엄대협은 초대 손님의 명단을 보고는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분주하게 연락을 하고 돌아다닌 끝에 저 집사를 찾아냈다.
저 집사는 오자마자 곧장 저택을 여기저기 손보기 시작했다. 물론 직접 한 건 아니고 저택의 직원들을 능수능란하게 부려서 모든 일을 빠르게 처리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동안 뭔가 미진했던 부분이 말끔히 고쳐졌다.
저 집사를 임시 고용한 것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정식으로 고용하고 싶었지만, 집사 쪽에서 거절했다. 원래 고용 예정인 곳이 있고, 그 전에 잠깐 시간이 남아서 온 것일 뿐이었다.
‘하긴, 사람들을 매일 초대할 것도 아니고 이번이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텐데.’
앞으로는 이런 번거로운 행사를 할 생각이 없었다.
솔직히 저 집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준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밥 좀 먹이고 술 좀 내주고 하면 될 일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저러고 있는 것이 싫다는 건 아니고.
그 뒤로 반태수가 직접 나가 그들을 맞이했다.
이번 기회에 엄대협도 저들과 좀 더 원활한 관계를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엄대협이 무섭다고 도망가 버렸다.
반태수가 보기에는 오스윈 프리든이나 페일라 린치필드나 전부 좋은 사람들인데, 엄대협은 지나칠 정도로 두 사람을 두려워한다.
차라리 안드렐라 윌렉스만 있었다면 자신도 참석했을 거라고 말하는데, 반태수의 눈에는 오히려 안드렐라 윌렉스가 더 위험해 보였다.
아무튼 그날 초대는 원활하게 물 흐르듯 잘 이어졌다.
임시 고용한 집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대접에 소홀하지 않게 신경을 썼다.
식사가 끝나고 응접실에 모여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자리에까지 집사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반태수는 오늘 초대한 세 사람의 표정에 깃든 만족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집사를 임시 고용하길 잘했다.
"이런 품격 있는 초대는 정말 오랜만이네요.”
페일라 린치필드의 말에 오스윈 프리든이 반짝이는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저도 정말 좋았습니다. 반 마법사님께서 이 정도로 신경을 써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반태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거 다 저 사람이 한 거라고,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이럴 때는 또 섣부른 충동을 잘도 참는다.
‘아니, 이제 좀 이면세계에 익숙해진 건가?’
어쩌면 그래서 충동을 조금씩 조절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 초대를 받았는데 빈손으로 올 수 없어서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페일라 린치필드의 말에 반태수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오스윈 프리든의 초대를 받아서 그의 집에 갈 때, 자신은 빈손이었으니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뭔가 선물을 해줘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페일라 린치필드가 고급스러운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음?"
상자 안에서 제법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유물에게서나 느껴지던 감각이었다.
페일라 린치필드의 몸에 걸친 유물이 워낙 많아서, 영역화에 걸려들었음에도 굳이 신경 쓰지 않던 물건이기도 했다.
반태수는 상자를 받아 곧장 그걸 열었다. 그리고 페일라 린치필드를 쳐다봤다.
"이거, 유물 아닙니까?”
"맞아요. 관심이 많다고 해서 하나 준비했어요. 마침 저는 쓸 일이 없기도 하고.”
상자 안에 든 유물은 팔찌 형태의 장신구였다.
이런 장신구는 마도구든 유물이든 가치가 다른 것에 비해 높다고 들었다.
한데 이런 유물을 고작 집들이 선물로 주다니. 린치필드 가문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반태수의 말에 페일라 린치필드와 오스윈 프리든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설마 유물을 연구하고 있는 겁니까?”
"유물이든 마도구든 가리지 않고 분석하고 연구해야 실력이 늘죠.”
반태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두 사람은 그걸 그냥 그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 혼자서요?”
반태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법 연구는 원래 혼자 하는 거 아닌가?
"대체 어떻게요?”
페일라 린치필드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얼마 전에 보여줬던 그 마력 전이도 그렇고 그냥 단순한 마법사가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을 계속 보게 되니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냥…… 분석하는 건데, 다른 분들은 안 하는 겁니까?”
반태수는 좀 뜨끔했다. 자신은 아직 이면세계에 대해 잘 모른다.
마법사이지만, 이곳의 마법사들과는 많이 다르다.
두 사람이 지나칠 정도로 잘해줘서 너무 편하게 말이 나간 모양이었다.
이런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는데.
역시 좀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아직 멀었다.
오스윈 프리든은 심각한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안드렐라 윌렉스를 쳐다봤다.
그녀는 굉장히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오스윈 프리든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반태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부터 생각하는 건데, 반 마법사님은 좀 더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안 그래도 뜨끔했던 터라 반태수는 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좀 경솔했나요?”
오스윈 프리든이 작정했다는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평소에 안 그러던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 뭔가 좀 더 무서웠다.
"문제는 그게 이번에 처음 그러시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능력을 적절히 드러내는 것은 좋습니다만, 그게 적절함을 넘어선다면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어…… 알겠습니다. 앞으로 조심하죠.”
하지만 뭘 알아야 조심하고 말고 할 것 아닌가. 솔직히 유물을 연구하는 건 당연히 다들 하는 줄 알았다.
지난번에도 오스윈 프리든이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아공간 유물을 발견해서 그 보안을 풀기 위해 연구 중이라고.
그래서 자신도 별 생각 없이 말을 했던 것이고.
반태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오스윈 프리든을 쳐다봤다.
"믿을 만한 친구라고 생각해서 제가 긴장이 좀 풀렸나 봅니다. 여기 혼자 계신 것도 아닌데.”
그 말에 오스윈 프리든이 멈칫했다. 그의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굳었다가 스르르 풀렸다.
"뭐, 그러시다면야......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건 분명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있는 윌렉스 가문의 영애나 저기 페일라나 고작 두세
번 본 것이 전부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조심하셔야지요.”
반태수는 그러는 오스윈 프리든도 이제 고작 몇 번 안 봤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꾹 눌러 참는 데 성공했다.
"제가 너무 잔소리를 많이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너무 걱정되어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저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오스윈 프리든이 내민 상자는 페일라 린치필드의 상자보다 훨씬 고급스러웠다. 그뿐 아니라 상자 자체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상자조차 마도구인 것이다.
"이렇게 또 받기만 하니 민망하네요. 감사히 받고 나중에 저도 반드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상자를 받아 열었다.
상자 안에 있는 것은 두 개의 팔찌였다.
그걸 본 페일라 린치필드가 경악해서 소리쳤다.
"야! 너 저거 정말 괜찮은 거야?”
반태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얼른 입을 다물고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팔찌와 오스윈 프리든을 번갈아 바라봤다.
"괜찮습니다. 무단 반출은 아니니. 하나는 반 마법사님의 몸을 보호할 만한 수단이 필요할 것 같아서 넣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유물입니다.”
반태수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어…… 이거 설마 전에 연구 중이라고 말씀하셨던 아공간 유물입니까?”
오스윈 프리든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뭐…… 유물도 연구하신다고 하시니……."
반태수는 멍하니 오스윈 프리든을 쳐다봤다. 아까 유물 연구한다고 했을 때는 그저 놀란 척한 거였다. 원래부터 짐작하고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괜찮습니다. 굉장히 많고, 그 중 제 몫으로 주어진 것이 두 개인데, 그 중 하나를 드린 거니까요. 별 거 아닙니다.”
이게 어떻게 별 거 아니란 말인가.
대체 이 사람은 왜 자신에게 이렇게 못 줘서 안달인 걸까? 아니, 생각해보면 이 사람만 그러는 게 아니다.
페일라 린치필드도 비슷하다. 이제 세 번째 만남이다. 한데 집들이 선물로 이런 귀한 유물을 준다고?
이건 정상이 아니다.
반태수의 시선이 이번엔 안드렐라 윌렉스에게로 향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위험한사람이 저 여자다.
"전 아무 말도 안 할 거예요. 그리고 선물로 유물을 준비하지는 못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상자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굉장히 고급스러운 마도구가 들어 있었다. 그냥 마도구가 아니라 마석을 쓰지 않은 마도구였다. 예전 를프 헬턴이 갖고 있던 마도구처럼.
안드렐라 윌렉스는 반태수와 페일라 린치필드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저 눈치 빨라요. 처세도 나름 잘 하고. 그러니 믿어주세요.”
그러자 페일라 린치필드가 웃으며 나섰다.
"앞으로 저랑 친하게 지내면 되겠네요. 괜찮죠?”
안드렐라 윌렉스의 표정이 환해졌다. 안 그래도 바라던 바다.
반태수가 대단한 마법사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대단한 마법사는 세상에 너무 많다.
그러니 고작 이런 일로 호들갑을 떠는 오스윈 프리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위기가 잘 풀리는 것 같자, 반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쯤에서 제 비장의 레시피로 만든 커피를 대접해 드려야겠군요. 진짜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반태수는 응접실 벽에 설치된 커피머신으로 걸어갔다.
워낙 주변 인테리어를 절묘하게 잘 해둬서 응접실에 커피머신이 있는 데도 위화감이 거의 없었다.
반태수는 능숙하게 커피를 내리고 그것을 고급스러운 잔에 담아 일행 앞에 한 잔씩 내려놨다.
그리고 얼른 마시라는 듯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가장 먼저 커피 잔을 쥔 사람은 안드렐라 윌렉스였다. 이 커피 한 잔으로 긴장을 좀 풀고 싶어서였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녀의 반응은 정말로 극적이었다.
"으흐음.”
입에 커피를 머금은 채 기묘한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맛과 향을 충분히 만끽한 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나서도 뒤이어 올라오는 잔향을 음미하며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내 눈을 떴다. 그리고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페일라 린치필드와 오스윈 프리든을 보고는 빙긋 웃었다.
"제 반응이 좀 과했나요?”
두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그렇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아. 이건 진짜 못 참겠네요.”
안드렐라 윌렉스는 반태수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렇게 갖고 싶은 남자는 처음이에요. 하지만 전 안 되겠죠?”
안드렐라 윌렉스는 페일라 린치필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눈가가 살짝 치켜 올라간 걸 확인하고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세상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은 황홀한 맛과 향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페일라 린치필드와 오스윈 프리든은 얼른 커피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안드렐라 윌렉스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들도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한동안 응접실에는 아무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저 가끔 기묘한 신음이 울릴 뿐이었다.
이내 고요했지만, 실제로는 폭풍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 커피를 모두 마신 것이다.
“어땠습니까?”
반태수가 빙긋 웃으며 묻자, 세 사람이 욕망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안드렐라 윌렉스가 가장 먼저 말했다.
"혹시 이걸로 사업 한 번 해보실 생각 없으신가요?”
반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친구들에게 선물하는 용도로만 쓸 생각입니다.”
"아아, 안타깝네요.”
안드렐라 윌렉스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반태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커다란 상자 세 개를 테이블 위에 턱턱 올려놓았다.
"선물입니다. 차게 마셔도 생각보다 색다른 풍미를 느낄 수 있으니 그냥 마셔도 좋고, 살짝 끓여서 마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희석하지는 마십시오. 맛이 크게 떨어질 겁니다.”
테이블에 올라간 상자의 크기에 세 사람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고 눈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정말 아껴먹어야겠네요.”
"지금까지 받아본 선물 중 최고입니다.”
"마시면서 양이 줄어드는 걸 보면 괴로울 것 같아요.”
그런 반응에 반태수가 크게 웃고는 말했다.
"다 마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친구들에게 이런 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으니까요.”
다들 더없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안드렐라 윌렉스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혹시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뭐든 괜찮아요. 제 힘이 닿는 거라면 뭐든 도와드리죠. 저 역시 진짜 친구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페일라 린치필드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요. 그리고 나중에 듀스트론에 놀러오기로 한 거 잊지 마시고요.”
그 말에 오스윈 프리든이 한쪽 눈을 치켜뜨고 페일라 린치필드를 노려봤다.
"칼체스터가 먼저다.”
페일라 린치필드가 환하게 웃으며 오스윈 프리든을 보다가 반태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결정은 반 마법사님이 하시는 건데?”
오스윈 프리든이 반태수를 바라보며 힘 있게 말했다.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반태수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
세 사람이 돌아갔다.
반태수는 홀로 남은 순간부터 모든 신경을 유물에 집중했다.
특히 오스윈 프리든이 주고 간 아공간 유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