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 초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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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상자를 열고 유물을 꺼냈다.
커다란 수정구였다.
"이게 뭐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게 뭔지는 이제부터 차근차근 알아보면 된다.
상자 안에는 유물 사용법이 함께 들어 있었다. 직접 정성 들여 쓴 쪽지였다.
글씨체가 여성스러운 걸로 봐서는 아마 안드렐라 윌렉스가 직접 썼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용은 단순했다. 마력을 주입하면 마력에 대한 속성을 색으로 알려주는 유물이었다.
각 색에 대한 속성이 쭉 나열되어 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속성을 확인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반태수는 일단 마력을 넣어봤다.
무속성을 뜻하는 회색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아마 대부분의 마법사가 마력을 넣으면 회색이 나올 것이다.
반태수는 마력에 속성을 부여해봤다.
쪽지에 쓰인 대로 전격 속성은 하늘색이었고, 불속성은 붉은색이었다.
일단 쪽지에 있는 속성은 다 테스트했다.
그 다음, 쪽지에 없는 속성을 부여했다.
예를 들면 관통이라거나.
관통 속성의 색은 전격 속성의 색인 하늘색과 비슷했다. 하지만 훨씬 옅었다.
속성에 따라 색이 이리저리 휙휙 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묘한 중독성이 있네.”
그 뒤로도 한동안 마력의 속성을 바꾸며 놀다가 문득 마력의 파장에도 반응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니 그냥 해봤다.
하지만 파장에 따른 변화는 없었다. 아무리 파장을 이리저리 바꿔봐야 무속성을 뜻하는 회색빛만 흘러나왔다.
반태수는 그렇게 테스트를 하다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파장이 있어 마력을 거기에 맞췄다.
"읏!"
갑자기 수정구에서 기묘한 마력 파장이 동심원을 그리며 쫙 퍼져 나왔다.
특이한 마력 파장이었다. 그것이 몸을 훑고 지나갈 때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마력을 뿜어 방어했을 정도였다.
반태수는 자신의 내부를 관조해서 혹시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는지 확인해봤다.
다행히 몸에 이상은 없었다.
‘이게 뭐지? 아무리 그래도 여기 마법사들이 이걸 확인하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반태수는 이번에 마력 파장이 몸에 침투하지 못하게 미리 방비를 잘 해두고 다시 수정구에 마력을 넣었다.
수정구에서 마력 파장이 터져 나왔다.
방금 반태수가 넣은 마력은 포탈 감지기가 내뿜는 마력 파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즉, 이 수정구는 포탈 감지기와 관계된 유물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포탈 감지기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건 포탈 감지기처럼 단순한 마도구가 아니었다. 보안만 해도 보통이 아니었다.
반태수는 일단 보안부터 뚫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 유물, 그저 그런 유물이 아니다. 아주 특별한 유물이 분명했다.
다만 그 특별함을 아직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을 뿐이다.
반태수는 수정구에 집중해서 보안을 차근차근 살펴봤다.
아직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종류의 보안이었다.
오스윈 프리든이 준 총보다 보안이 더 까다로웠다. 물론 그 총의 진짜 보안인 고대 문자로 이루어진 보안보다야 못하겠지만.
반태수는 몇 시간 동안 씨름한 끝에 수정구에 걸린 보안을 벗겨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다음 기다렸다는 듯이 나온 고대문자의 향연에 질려 버렸다.
이 수정구 역시 이중 보안이 걸린 유물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 고대문자 보안을 뚫고 나면 그 안에 있는 술식은 또 얼마나 복잡할까.
반태수는 일단 고대문자에 집중했다. 하나하나 독립된 문자였다. 아니, 총에 있던 보안과 똑같았다.
이건 암호가 있어야 뚫을 수 있는 보안이다.
반태수는 유적에서 봤던 다섯 문자를 찾았다. 역시 여기도 있었다. 거기에 조심스럽게 마력을 흘려 넣었다.
문자들이 착착 접히더니 이내 보안이 싹 사라졌다. 총 유물을 분석했을 때와 똑같은 현상이었다.
‘그 문자들은 무슨 유물들을 해체할 때 쓰는 만능 암호 같은 건가?’
반태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수정구의 술식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당장 분석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술식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분석이 불가능한 이유는 수십 가지 술식이 각각의 위상공간에 새겨져 있고, 그것이 서로 간섭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술식을 만들었다가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걸 무슨 수로 분석한단 말인가.
절대 못 한다는 걸 알면서도 반태수는 일단 시도했다.
그렇게 하고 또 하다보면 언젠가는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침이 될 때까지 수정구를 붙들고 씨름했다.
***
"뭐야,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흐흐흐. 좋았냐?”
엄대협이 음흉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반태수는 대꾸할 기력도 없어 그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닥치라는 뜻이었다.
물론 엄대협은 그 뜻을 못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했어야지. 너무 무리하면 뼈 삭아.”
반태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밤새 마법 연구해서 피곤하다. 왜 왔는지나 말해.”
엄대협이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뭐? 마법 연구? 너 설마 거기서 유물 받아와서 그거 밤새도록 본 거야? 그런 거냐? 진짜야?”
"잘 아네. 유물이 대단하긴 대단해. 분석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야이, 지금 그게 문제야? 안드렐레 윌렉스는? 그 여자랑은 어떻게 됐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기로 했고?”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유물 받고 얼른 집으로 왔지. 연락처는 하나 받아뒀다.”
"설마 그게 다야? 안 했어?”
"하긴 뭘 해.”
이번엔 엄대협이 한숨을 푹 쉬었다.
"못나기라도 했으면 이해라도 하지. 그 얼굴에 그 몸으로 그러고 다니면, 죄책감 같은 거 안 들어?”
"그럴 분위기 아니었어. 누굴 바보 등신으로 아나. 할 말 없으면 그냥 가든가.”
엄대협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할 말 있어.”
엄대협은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한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지금 시정부가 나서서 지하공방을 대대적으로 털고 있어.”
"지하공방을? 왜?”
"왜긴, 당연한 거지. 그놈들이 경합에서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뭐라도 제재를 가하긴 해야지. 자칫했으면 난리가 났을 거 아냐.”
"뭐, 술식도 빼돌리고 그랬으니 대가를 받긴 해야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지하 공방은 그냥 단순한 공방이 아니라고.”
“그럼?”
"일종의 조직이야. 폭력조직 같은 거지. 자기들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려. 솔직히 난 경합 이후에 그놈들이 뭔가 수작을 부릴 거라고 여겼거든.”
반태수의 눈이 번득였다.
"수작을 부린다고? 하긴, 그냥 넘어갈 놈들이 아니긴 하지. 그래서, 그놈들이 뭘 어쨌는데?”
"내가 나름 잘 지켜보고 있었지. 어떤 수작을 부릴지 파악도 할 겸해서 위장 정보도 살살 흘려주고.”
"위장 정보?”
"우리 반 마법사님 스케줄을 그쪽에 조금씩 넘겼지.”
반태수가 인상을 확 썼다.
"내 스게줄을 왜 넘겨?”
"아이, 위장이라니까, 위장. 진짜 스케줄이 아니라 몇 군데씩 비틀어 둔 스케줄. 그걸 이용해서 그놈들 하는 짓을 좀 캐보려고 했지.”
반태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엄대협을 쳐다봤다. 이럴 때마다 이놈 처음 기대보다 유능하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그래서 뭐 좀 캤어?”
"캐려고 한 순간 시정부가 나서서 들쑤시는 바람에 지하 공방에 지금 피바람이 불고 있다.”
"그 정도야?”
"아주 작정을 하고 치는 것 같던데? 이번 기회에 지하 공방을 없애 버리려는 것 같아.”
"지하 공방은 암시장 쪽 아닌가? 그쪽도 만만치 않을 텐데?”
"에이, 그래봐야 암시장이지. 시정부가 나서면 다들 납작 엎드려야 돼. 시정부가 암시장을 묵인해주고 있는 거니까. 그리고 지하공방이 규모가 크긴 해도 암시장 자체보다야 작으니까. 암시장이 독하게 마음먹으면 거기서도 쳐낼 수 있는 거고.”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암시장도 나선 모양이지?”
"오, 눈치가 빨라졌어? 맞아. 암시장이 지하 공방을 쳐내기로 작정하고 움직이는 중이야. 그러니까 시 정부랑 손을 잡은 셈이지.”
"뭐, 잘 됐네. 그런데 그게 아침부터 찾아와서 굳이 얘기해야 알 정도로 중요한 건가?”
"진짜 중요한 얘기는 이제부터야. 지하공방의 핵심 인물 몇 명이 잠적했어.”
"핵심 인물?”
"일단 아버 자쳇, 지하 공방주인이야. 그리고 플로드, 아버 자쳇의 오른팔. 마지막으로 리어스트롬, 지하 공방의 행동대장.”
"무슨 공방에 행동대장이 있어?”
"말했잖아. 공방이라기보다는 폭력조직에 가깝다고. 리어스트롬은 지하 공방의 모든 능력자를 이끄는 자였어.”
반태수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 세 놈이 날 어떻게 해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놈들이 할 일은 뻔해. 도시를 뜰 거야.”
"도시를 뜨려면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공항이 그렇게 범죄자들이 함부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어설프지 않을 텐데?"
"공항이야 그렇지. 하지만 허술한 곳도 있거든.”
"허술한 곳?”
"아무튼 그놈들이 빠져나갈 수단은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야.”
"그럼 그냥 도망가게 놔둬야 하는 건가?”
"그럴 리가. 나도 나름대로 그놈들이 도망갈 길을 찾아서 미리미리 감시 중이니까 기다려 보자고.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아직도 중요한 게 안 나온 거야?”
"그놈들이 과연 그냥 몸만 빠질까?”
"모아뒀던 돈이랑 보물을 가져가겠지.”
"그거야 당연하고. 그것만 가지고 가겠느냐고.”
“그럼?”
엄대협이 손가락으로 반태수를 가리켰다.
"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잖아. 듀마이어 방패를 만든 당사자. 잡아놓고 쥐어짜면 새 마도구가 특특 튀어나오는 보물 제조기."
반태수가 엄대협의 과장스러운 말에 또 인상을 썼다.
"그러니까 그놈들이 날 납치할 거다?”
"가능성이 100%는 아니지만 꽤 높지?”
"그래서?”
"함정 하나 파면 어때?”
반태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은?”
“스케줄 흘렸다고 했잖아. 사흘 후에 변두리에 있는 작은 조직 하나 정리하러 갈 예정이거든.”
"누가? 내가?”
"그럼 누가하겠어?”
엄대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지하 공방의 주인이면 산전수전 다 겪었을 텐데, 가짜로 정보를 흘리면 그냥 속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 진짜로 위장해야지."
"그래서 진짜 의뢰를 받은 거야?”
"의뢰 시작 단계부터 조작했지. 그쪽 작은 조직 자체가 함정이야.”
그러니까 전부 같은 편이라는 뜻이다.
"용병을 고용한 건가?”
"용병까지는 아니고, 팀 단위로 움직이는 능력자들이 있거든.”
팀 단위로 움직이는 능력자라는 말에 반태수의 뇌리에 팀 대영이 번득 떠올랐다.
"그런 능력자 팀 셋을 고용했지.”
"쓸모가 있을까?”
반태수의 의문은 당연했다. 예전 셰딤의 마수 사육장을 정리할 때, 팀 단위 능력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확인했었다.
그들의 힘은 그리 대단치 않았다.
반면 지하 공방의 주인이라는 아버 자쳇은 상당한 마법사였다.
그가 어떤 마법을 쓰는지는 모르지만, 영역화를 통해 확인한 정보만으로도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지하 공방의 주인이니 쓸모 있는 마도구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 아버 자쳇을 팀 대영의 능력으로 잡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엄대협은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들이 나서서 잠깐 발목이라도 잡으면 이득 아냐? 게다가 방패까지 대여해줬거든.”
방패를 받았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듀마이어 방패를 무력화 하는 방법은 충격 용량을 초과하거나 빼앗는 것이 유일하니까.
아버 자쳇이 그걸 못 한다는 건 이미 경합에서 증명했다.
나머지 두 능력자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방패를 든 사람이 많으니 충분히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걸 넘어서 지하 공방 일당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도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그럼 그렇게 진행하면 되겠네.”
반태수가 나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대협은 그 모습이 씨익 웃었다.
"나만 믿어. 완벽하게 준비해 놓을 테니까.”
"만약 그놈들이 다른 선택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다른 선택? 너 안 건드리고 그냥 몸만 빼내는 거?”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엄대협이 말을 이었다.
"포인트가 될 만한 지점에 감시를 놨으니 걸려들면 시정부에 바로 신고해야지. 도망가게 내버려두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테니까.”
이 정도까지 준비했는데 못 잡으면 어쩔 수 없다.
"그냥 함정에 걸렸으면 좋겠네.”
"나도.”
그나저나 일정이 너무 촉박하다. 당장 내일 집들이를 해야 하는데, 그게 끝나자마자 또 싸우러 가야 한다니.
반태수의 표정을 읽은 엄대협이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뭔데? 어려운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또 해결사 아니냐.”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냥 좀 바쁘다 싶어서 그래.”
"바쁘긴. 다른 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어? 바쁘다고? 그럼 다른 일이 있다는 얘기네? 뭐야, 설마 나 말고 다른 브로커 키우는 거야? 에이, 아니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뛰고 있는데. 아, 아니면 커피 나한테 맡기려고? 그런 거야?”
반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냐. 그리고 커피 사업은 좀 미루기로 했어.”
"뭐? 대체 왜? 그건 시작만 하면 돈을 갈퀴로 쓸어 담을 텐데.”
"그냥 굳이 그거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마도구만으로도 돈은 충분히 버니까.”
이번 방패 사업을 진행하면서 마도구가 얼마나 큰 돈이 되는지 확인했다.
그러니 굳이 커피 사업을 동시에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게다가 좀 꺼림칙하기도 하고.’
지난번에 여기서 카페 계획을 쭉쭉 진행할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중간에 지구에 다녀오면서 생각이 좀 달라졌다.
굳이 꺼림칙함을 남겨놓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면세계에만 오면 가끔가다 성격이 바뀐 것처럼 충동적으로 일단 내지르고 본다.
처음에는 마력의 영향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이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반태수는 고개를 슬쩍 돌려 엄대협을 쳐다봤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한껏 기대감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태수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내가 말이야 손님을 초대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