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그때 그 놈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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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탈을 타고 다시 지구로 넘어온 반태수는 연구 개발실에 나타났다.
오자마자 한 일은 변종 갑각 트롤 사체에서 뽑아낸 샘플들을 잘 보관하는 것이었다.
연구 개발실에는 반태수가 창고에 잔뜩 부여한 마법들보다 몇 단계는 뛰어난 마법들로 둘러싸인 보관함이 있었다.
당장 연구를 할 것이 아니라 오늘은 집에서 쉬고, 내일부터 며칠 동안은 주변을 한 번 둘러블 계획이었다.
최근의 생활이 너무 이면세계 쪽으로 집중되어서 이쪽의 삶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경각심이 든 것이다.
정리가 끝난 후, 연구 개발실에서 나온 반태수는 시간을 확인했다.
밤 9시였다. 밖이 깜깜했다.
시간이 좀 일렀으면 카페에 잠깐이라도 들를까 했는데, 일단 집에 가기로 했다.
집에 도착한 반태수는 씻지도 않고 침대에 털썩 엎어졌다.
"진짜 오랜만에 오는 느낌이네.”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오래 되지는 않았다. 듀마이어 공방에서 방패를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거기서 처리한 일이 여러 가지라 그런지 오랫동안 이면세계에서 머무른 느낌이었다.
아니, 사실 이곳에서도 집보다는 연구 개발실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무튼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과 안정감 속에서 기분 좋게 잠들었다.
***
"어? 사장님!”
카페에 들어가니 이서영이 가장 먼저 발견하고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별 일 없지?”
"그럼요. 이번엔 금방 오셨네요?”
지난번에는 이면세계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새 장비를 개발한다고 카페에 거의 들르지 못했다.
반태수는 그저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자신이 만든 장비를 쳐다봤다.
"저건 어때? 쓰면서 불편하거나 그런 건 없어?”
이서영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냥 드립커피 내리는 건데 불편할 게 뭐 있겠어요. 조금 일찍 출근해서 그날 치 미리 준비하면 더 손 갈 일도 없어서 괜찮아요."
거기까지 말한 이서영이 반태수에게 바짝 다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 저게 우리 카페 커피 맛의 비결이라면서요.”
반태수가 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귓속말로 대답해주었다.
"그렇지. 그러니 소중하게 다뤄줘.”
소중하게 다루라는 말이 웃겼는지 이서영이 입을 가리며 큭큭 웃었다.
“아무튼 앞으로는 자주 나오실 거죠?”
"음, 그것 때문인데, 잠시 얘기 좀 하자.”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고 턱짓으로 근처에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아직 아침인지라 빈자리가 제법 많았다.
이러다가 점심 무렵이 되면 자리가 거의 없는 지경이 된다.
이서영은 다소곳하게 앉아 반태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반태수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했다. 심장이 좀 빨라졌다.
"요즘 어때? 일은 재미있어?”
이서영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미있어요. 사장님만 자주 나오시면 더 재미있을 거 같아요.”
반태수가 어색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그게 더 어려워질 거 같아서 이러는 거야.”
"예상했어요. 요즘 사장님 보고 있으면 꼭 다른 무언가에 푹 빠지신 거 같거든요. 설마 애인 생기신 건 아니죠?”
이서영은 문득 예전에 찾아왔던 백진희가 떠올랐다.
"애인은 무슨. 아직 멀었다. 지금은 일이 너무 재미있어.”
"역시, 그러실 줄 알았어요.”
이서영의 얼굴에 깃든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래서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뭔데요? 웬만하면 다 들어드릴 테니까, 말씀해 보세요.”
반태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페 맡아줄 수 있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네요. 카페라면 지금도 제가 맡고 있는 거 아닌가요?”
"아니, 지금처럼 말고 진짜 제대로 맡아 달라고.”
"정직원이 되어 달라는 건가요?”
지금은 아르바이트다. 그래서 매일 출근하지도 않는다. 물론 아르바이트생 중에서는 가장 많이 출근하지만.
"정직원이라면 정직원인데,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 카페를 다 맡아달라고. 하고 싶은 건 다 해도 돼. 커피만 내 레시피로 만들면.”
이서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이런 얘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
“그럼……."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카페 위자드의 대표가 되어 달라고.”
그동안 이서영을 충분히 겪어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아니, 그녀뿐 아니라 이곳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모든 사람들을 차츰차츰 써먹을 계획이었다.
이서영은 놀람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멍하니 반태수를 바라봤다.
"왜? 잘 할 거 같은데. 아니면 자신이 없어?”
이서영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뇨. 자신은 있어요. 솔직히 사장님 커피를 파는데 자신 없으면 바보 멍청이죠.”
"하고 싶은 건 진짜 다 해도 돼. 아예 맡길 테니까. 혹시 나중에 프랜차이즈도 하고 싶으면 해. 도와줄게."
"정말요? 그렇게까지 해도 되는 거예요?”
"내가 진짜 믿고 있거든.”
이서영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꼬옥 쥐었다.
“믿음에 반드시 보답할게요.”
“그럼 맡아주는 거지?”
"네."
이서영이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반태수가 빙긋 웃었다.
"학교는 계속 다녀. 필요하면 아르바이트 더 뽑고. 졸업은 꼭 해.”
"네. 그렇게 할게요.”
이서영은 잠시 일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리고 천천히, 하지만 힘 있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반태수가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일 하자고. 오늘은 내가 도와줄 테니까, 대표님 마음대로 부려먹어 봐.”
이서영의 맑은 웃음소리가 매장에 잔잔히 울렸다.
***
‘매장에 능력자 비율이 더 올라갔네.’
반태수는 오랜만에 카페 일을 봐주면서 매장 분위기를 살폈다.
능력자가 더욱 늘었고, 그들은 대부분 커피를 사서 가지고 나갔다.
매장에 자리 잡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능력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건 예전과 달라진 부분이었다.
또한 능력자들의 표정에 어딘가 그늘이 진 것 같았다.
문득 지난번 백진희를 습격했던 놈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포탈 감지기를 들고 있던 놈들도 떠올랐다.
석궁으로 무장해 다른 능력자들을 학살하던 놈들 말이다.
‘그러고 보니 거긴 어떻게 됐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팀 대영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 역시 궁금해졌다. 또한 요즘 돌아가는 분위기도 궁금했다.
능력자들이 카페에 앉아서 얘기라도 나누면 그걸 듣고 추측이라도 해볼 텐데, 다들 커피를 사서 후딱후딱 나가 버리니 그럴 기회도 없었다.
아무래도 누군가 하나 붙잡고 쫓아가거나, 예전 그곳에 가봐야겠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었다.
'왜곡을 개선해야 돼.’
이면세계에 가기 전까지는 솔직히 별 생각 없었다. 지구에서 마법을 과시하며 다닐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현재 반태수의 머릿속에서는 세 가지 연구가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생체조직에 관한 연구, 그리고 이면세계의 마력을 몸에 둘러 잡아놓는 것을 패시브로 전환하는 연구, 마지막이 왜곡의 개선에 관한 연구였다.
반태수는 왜곡을 제외한 나머지 연구는 일단 뒤로 미뤘다. 그리고 모든 자원을 왜곡으로 몰았다.
최대한 빠르게 왜곡을 개선하기 위함이었다.
왜곡의 개선에는 그것을 패시브로 유지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왜곡이든 마력을 몸에 두르는 것이든 두뇌 하나를 온전히 할당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손님 한 무리가 또 들어왔다. 반태수는 바쁘게 움직였다.
정신없이 카페 일을 돕는 동안 왜곡의 개선에 대한 연구가 빠르게 이어졌다.
***
‘속이 다시원하네.’
드디어 왜곡의 개선이 끝났다. 더 이상 위화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제 완벽한 투명인간이 된 것이다.
거기에 왜곡을 패시브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더 개선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소리와 기척, 그리고 마력에 관한 것이다.
이왕 감추는 것 확실하게 감춰야 할 것 아닌가.
아무튼 개선해서 이제 전혀 위화감이 없는 왜곡을 두른 반태수는 느긋하게 길을 나섰다.
오늘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전부 확인할 계획이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창고 세 개가 서 있던, 능력자들끼리 죽고 죽이던 장소였다.
잠깐 왜곡을 풀고 택시를 이용해 근처에 있는 번화가까지 간 다음, 왜곡을 두르고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아직 환한 낮이었지만 완벽한 왜곡을 둘렀으니 직접적으로 부딪히지만 않으면 별 일 없을 것이다.
도로를 따라 빠르게 이동하던 반태수는 이내 도로에 인접한 넓은 공터로 들어섰다.
공터 안쪽으로 30분쯤 걸어가면 목적지가 나온다.
여전히 세 개의 창고가 서 있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영역화를 통해 정보를 파악해 보니, 능력자도 많고 일반인도 많았다.
일단 근처로 가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했다.
반태수는 창고에 바짝 다가갔다.
세 창고의 문이 닫혀 있었는데, 그 중 한 곳의 문이 열리며 네 사람이 나왔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온 모양이었다.
반태수는 그 틈을 타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이놈들이 뭐 하는 놈들인지 알아볼 차례다.
이 창고는 장비를 보관하는 곳인 듯했다. 사방에 선반이 놓여 있었고, 거기를 각종 장비로 빼곡하게 채워두었다.
보아하니 능력자들이 이면세계로 갈 때 쓸 장비들이다.
반태수는 창고 구석에 자리를 잡은 다음, 마력을 이용해 청력을 높였다.
창고에는 열 명 정도가 있었는데, 몇몇은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느라 정신없었고, 몇몇은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부분은 쓸모없는 신변잡기였다. 가끔 차나 여자 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일에 관한 얘기도 간간이 섞였다.
"그나저나 좀 불안하네.”
"불안하긴. 여기 몇이나 있는데. 그리고 일 터지면 바로 수십 명이 달려들 텐데 뭐가 걱정이야?”
"야, 여기 몇이나 있고 몇 명이 달려드는 게 무슨 소용이야? 당장 내가 먼저 죽으면 다 꽝이지.”
“그건 그래. 몸 사려야지.”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그러다 처음 말을 꺼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떤 놈들일까? 투입됐던 애들 싹 죽인 걸 보면 목적이 문을 확보하는 게 분명한데.”
"그래서 이렇게 대기 중이잖냐. 그런데 보아하니 텄다. 우리가 함정 파고 기다리는 걸 다 아는 거야. 아마 올 생각 없을 걸?”
"그러다 우리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면 다시 습격하고?”
"그렇지. 잘 아네.”
"시발.”
어쩌다가 여기로 발령을 받아서 이 고생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몸 사려. 요즘 위에 계신 분들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이니까.”
"하여간 그놈의 위쪽은 언제쯤 심기가 편해진대?”
"심기가 편하면 그 얘기가 우리한테 들려오겠냐? 그냥 지나가는 거지.”
그렇게 살짝 빈정거린 사내가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위자드넷에서 확인한 건데, 미국 쪽에서 포션 제작에 성공했다더라.”
"뭐? 그거 우리도 뭐 빠지게 연구하는 거 아냐?”
"아직 완벽한 건 아니래. 진짜 포션이랑 비교하면 한…… 10% 정도? 그래도 그게 어디야.”
“미국이 대단하긴 하네. 뭐만 만들었다 하면 다 거기잖아. 새로 발견하는 것도 그렇고.”
"뭐, 솔직히 이면세계도 미국에서 제일 먼저 진출했잖아. 거기서 감지기 제공 안 했으면 우리나라도 아직 멀었을 걸?”
"야, 그럼 딴 나라에서 가만히 있겠냐? 아마 모르긴 해도 숱하게 죽어 나갔을 거다. 미국도 시끄러워지기 싫으니까 정보 푼 거야. 분명히.”
"그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미국인데. 아마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었을 거야. 아니면 사고가 있었거나."
"아무튼 여기저기서 가열차게 연구 중인 모양이니 조만간 세상이 한 번 확 뒤집어지겠어. 안 그래?”
"글쎄, 그건 가봐야 알지.”
"돌아가는 상황 보면 뻔하지 뭘 꼭 가봐야 알아?”
"과연 쉽게 마법 같은 걸 세상에 퍼트릴까?”
"안 될 건 또 뭐야?”
"아는 사람만 아는 힘으로 남길 거 같아서. 이런 건 독점해야 더 강력하잖아.”
“그런가?”
“그럴 거야.”
"그럼 혹시 여기서 일 벌인 거, 미국 놈들 아냐?”
"가능성이 있지. 충분히. 위에서도 그 가능성이 제일 높다고 판단한 모양이더라.”
그 뒤로도 계속 대화가 이어졌다.
반태수는 그 얘기를 모두 들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제일 처음 귀에 쑥 들어온 말은 ‘위자드넷’이었다.
꼭 이면세계의 마법사 전용 웹이랑 비슷한 느낌이잖나.
그 다음으로 귀에 들어온 건 포션, 그 다음이 미국이었다.
반태수는 더 이상 여기서 얻을 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다른 창고에 가보기로 했다.
조용히 문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창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파악했다.
아무도 이쪽을 보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마법으로 소리를 차단하고 문을 살짝 연 후, 빠르게 빠져나갔다.
반태수의 다음 목표는 포탈이 있는 창고였다.
두 번째 창고는 첫 번째 창고와 별다를 것 없다고 판단했다.
포탈이 있는 창고 앞으로 가서 영역화를 통해 내부 정보를 확인했다.
안에 다섯 명이 있는데, 전부 일반인이었다.
포탈을 관리하는 자들인 모양이었다. 반태수는 소리와 기척 차단 마법을 걸고 문을 아주 천천히 열었다.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아주 천천히 살짝만 열고 안으로 쑥 들어갔다.
확인해보니 이쪽에 시선을 두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들키지 않았다.
문을 닫고 안으로 쭉 들어가 포탈 옆에 섰다.
‘충전이 다 안끝났네.’
어느 정도 마력이 차야 포탈이 작동하는지 이제 알기에 포탈만 봐도 이걸 쓸 수 있는지 아닌지 바로 파악이 가능했다.
이 포탈은 최소 이틀은 더 있어야 작동이 가능하다.
반태수는 포탈 옆에 선 채 창고 안에 있는 다섯 사람을 살펴봤다.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