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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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공 안으로 다섯 명의 능력자가 들어왔다. 마법사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좀 의외였다.
하지만 이미 펼쳐놓은 정보 영역화를 통해 능력자들의 면면을 확인하니 굳이 마법사가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했다.
마력의 양도 굉장했고, 속성도 한 가지가 아니라 두세 가지씩 갖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도구를 여러 개 장착하고 있었다. 오스윈 프리든이 가진 정보 차단 마도구 역시 착용했다.
그래도 미리 오스윈 프리든을 통해 정보차단에 대응하는 법을 확보해 뒀기에 쉽게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보차단 마도구를 가진 자들이 여럿 있으니 그것이 중첩되면서 더욱 차단을 뚫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겸사겸사 숙련도를 올릴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어서 오십시오. 서둘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스윈 프리든이 나서서 그들을 맞이했다.
다섯 명의 능력자들이 오스윈 프리든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별 말씀을.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다섯 능력자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나저나 또 이런 유적을 발굴하시다니, 오스윈 프리든 경의 안목이 정말 대단합니다.”
"안목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그저 운이 좀 좋았을 뿐이지요.”
"하하하. 운이 좋다고 하기에는 너무 잦지 않습니까. 불과 얼마 전에도 이런 유적을 발굴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오스윈 프리든이 빙긋 웃었다.
“그때도 운이 좋았지요. 지금은 더 좋고 말입니다.”
그 말에 사내가 슬쩍 시선을 돌려 반태수에게 잠깐 눈길을 줬다.
하지만 별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자, 그럼 슬슬 진행하겠습니다.”
다섯 능력자들이 문을 향해 다가갔다. 가장 앞장선 사내가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 붉은 색 액체가 반쯤 담겨 찰랑거렸다.
사내는 문 앞에 서서 유리병 뚜껑을 열었다.
유리병 자체가 마도구였다. 안에 있던 붉은 액체가 부글거리며 위로 올라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갈 듯 입구에 맺혔다.
사내는 그걸 문에 양각된 문자에 갖다 댔다. 가장 오른쪽 위에 있는 문자에서 시작해 차례대로 나머지 문자에 신중하게 유리병 입구를 갖다 댔다.
다섯 번째 문자에 유리병을 갖다 댔을 때, 문자가 유리병 속의 붉은 액체를 소량 빨아들였다.
그제야 사내가 뒤로 물러나며 유리병 뚜껑을 닫았다.
문에 양각된 여덟 개의 문자에서 일제히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점멸했다.
문자에서 나오던 빛이 사라진 순간,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반태수의 눈이 번뜩였다.
'저 유리병 안에 있는 액체는 피가 분명해.’
그냥 짐작만 한 건 아니었다. 영역화를 통해 유리병 입구에 맺힌 액체의 정보를 확인했다.
자격을 확인하려면 신분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게 아니면 피가 필요하다고도 했고.
그러니 저 피가 바로 자격을 갖춘 자의 피인 모양이었다.
‘고대 유적이면 정말 오래 되었을 텐데, 출입 자격을 가진 자의 피가 있다고?’
게다가 하는 걸 보니 문자의 내용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만일 해석을 제대로 했다면 굳이 첫 번째 문자부터 차례대로 확인할 필요 없이 바로 다섯 번째 문자에 유리병을 갖다 댔을 테니까.
궁금한 게 많았지만, 당장은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스윈 프리든이 자신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으니, 기회를 봐서 정보를 얻어야겠다.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전부 모였다. 반태수도 얼른 오스윈 프리든과 함께 문 앞으로 이동했다.
이내 문이 활짝 열렸고, 가장 문과 가까이 있던 사내가 안으로 들어갔다.
5대 가문에서 온 능력자 다섯 명이 들어가자, 오스윈 프리든이 그 뒤를 따랐다. 반태수는 그와 나란히 들어갔고.
아마키르가 얼른 따라갔고, 나머지 사람들이 차례대로 뒤를 이었다.
반태수는 안에 들어가자마자 멈칫했다.
허공에 마치 홀로그램으로 만든 듯한 글이 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문자로 이루어진 글귀였는데,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아무 의미 없는 다섯 개의 문자가 허공에 콕콕 박혀 있었다.
어떤 조합으로도 의미가 생기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조합 방식 자체가 없는 문자들이었다.
고대 문자 중에 저런 것도 있다는 걸 이제 처음 알았다.
‘꼭…… 암호 같은 느낌이네.’
저걸 보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암호였다. 하지만 다짜고짜 암호를 허공에 저렇게 잘 보이게 박아 놓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반태수가 그러고 있을 때, 나머지 사람들은 유물들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곳은 제법 거대한 공간이었고, 상당한 양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었다.
역시나 무기고답게 대부분의 유물이 무기였다.
반태수는 허공에 뜬 문자에서 시선을 돌려 유물들을 확인했다.
모든 유물은 마도구였다. 그것도 수준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격이 높은 것들이었다.
반태수는 일단 무기고에 들어온 사람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폈다.
한데 아무리 봐도 허공에 뜬 글자를 본 사람이 없는 듯했다.
‘정말로 못 본 건가? 아니면 원래 유적에는 저런 게 있는 건가?’
둘 중 하나인데, 아무래도 전자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관심이 없었다. 저 정도면 한두 번쯤 시선을 줘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반태수는 좀 더 노골적으로 문자를 쳐다봤다. 그러자 몇몇이 반태수를 따라 문자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반태수와 문자가 있는 곳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렇게 세 명쯤 반응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하나둘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반태수를 따라 허공을 바라봤다.
결국 오스윈 프리든이 나섰다.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겁니까?”
반태수는 퍼뜩 정신이 든 척 하며 오스윈 프리든을 쳐다봤다.
“아, 잠시 딴 생각을 즘 했습니다. 영감이 떠오를 듯 말듯 해서요.”
"아아, 이런. 내가 큰 결례를 저질렀군요. 영감을 방해하다니!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오스윈 프리든은 정말로 미안한 표정으로 반태수에게 연신 사과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얻을 건 다 얻었습니다. 이제 유물을 보고 싶군요.”
"그러십시오. 이쪽부터 보시는 게 편할 겁니다.”
반태수는 오스윈 프리든을 따라 유물을 하나하나 구경했다.
처음에는 검이 보였다. 수십 자루의 검이 진열장에 질서 정연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진열장도 마도구였다. 역시나 뛰어난 보안 마법이 걸린 마도구였다.
칼 다음에는 창이었고, 창 다음에는 비수들이 있었다.
그 뒤로 활과 석궁 그리고 화살과 전통이 있었다. 그 모두가 마도구였다.
화살 하나하나에도 마법이 부여되어 있었는데, 역시나 철저한 보안 마법이 적용되어 있었다.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그렇게 안쪽 진열장을 쭉 둘러봤다.
가죽 갑옷이나, 강철 갑옷도 있었다. 각반이나 건틀릿, 요대도 보였고.
하나같이 전부 마도구였다.
"무슨 무기고에 장신구가 있네.”
팔찌, 반지, 목걸이. 심지어 귀걸이까지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진열장에 보관된 것은 놀랍게도 총이었다.
권총과 장총이 쭉 늘어서 있는데, 디자인은 예스러웠지만, 이건 그냥 총이 아니라 마법이 부여된 총이었다.
그리고 총알이 잔뜩 든 탄알 박스도 함께 있었다.
'고대 유적에 총이 있다고?’
한데 그걸 보고도 다들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 보면 흔한 일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구경하고 있을 때, 오스윈 프리든이 아마키르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반드시 상납해야 하는 지정 물품은 없습니다. 여기 있는 물건의 60%를 가져갈 겁니다. 동의하십니까?”
"예. 동의합니다.”
“밖에 있는 갑각 트롤의 사체 중 일반 한 구, 거대 한 구를 제외한 나머지도 가져갈 겁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정리하시죠.”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아쉬덴 길드 사람들이 진열장을 열고 안에 있는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가져갈 물건만 챙기는 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유물을 싹 챙겼다.
그리고 진열장까지 모두 밖으로 옮겼다.
언제 밖으로 연락을 했는지 짐을 거의 옮겼을 무렵,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커다란 보관함을 가져와 그 안에 유물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인원이 많으니 정리도 빨랐다. 우르르 몰려온다 싶더니 어느새 우르르 빠져나갔다.
유적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거대 갑각 트롤의 사체도 싹 가져갔다. 아마 오는 중간 통로에 있던 갑각 트롤들도 몽땅 가져갔으리라.
반태수는 텅 빈 유적 내부를 슥 둘러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허공에 콕콕 박혀 있는 다섯 글자를 확인했다.
저건 대체 뭘까?
만일 저것이 진짜 암호 같은 거라면, 과연 어디에 쓰는 걸까?
‘그럼 저걸 쓸 수 있는 무언가가 이 유적 안에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과연 어디 있을까?
반태수는 영역화를 더욱 집중해서 펼쳤다. 혹시 이 안에 뭔가 힌트가 될 만한 것이 없는지 찾아봤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의심스러운 곳조차 없었다.
"안 나가십니까?”
반태수는 자신에게 다가와 호의가 깃든 미소를 보여주고 있는 오스윈 프리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야지요."
첫 번째 유적 탐사는 그렇게 끝났다.
***
반태수는 호텔로 돌아왔다.
유적 탐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인사를 하고 호텔로 왔다. 빨리 오늘 있었던 전투를 복기하고 써먹은 마법 중에서 개선할 부분이 있는지 찾아보고 싶었다.
이제 남은 일은 엄대협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이미 여기 오기 전에 연락을 해뒀다.
아마 지금쯤 엄대협은 아쉬덴 길드에서 보상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것이다.
기본 의뢰금이 5억 겔이었지만, 아마 그보다 좀 더 받게 될 것이다. 제법 활약을 했으니까.
돈이야 다다익선이다. 돈을 많이 모으면 그걸로 마도구를 구입해도 되고, 다른 유용한 물건을 구할 수도 있을 테니까.
대충 씻고 침대에 잠시 누웠다.
갑자기 여러 상념이 몰려왔다. 그 중에서 가장 선명히 뇌리를 장악한 것은 허공에 홀로그램처럼 떠 있던 그 문자들이었다.
고대 문자이면서 어떤 조합도 허락하지 않는 독립된 문자들. 숫자로 치면 마치 소수 같았다.
계속 머릿속에 그 문자들이 남아 맴돌았다.
반태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휘휘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확인해보니 엄대협이었다. 하긴,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이면세계에서 자신에게 연락할 사람은 아직 엄대협뿐이니까.
"어.”
- 야, 너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뭐가.”
- 뭐긴! 마수 말이야! 갑옷 입은 트롤!
"그게 뭐.”
- 너한테 한 마리 준다는데?
“뭐?”
- 그 5대 가문에서 나온 마법사분이 트롤 한 마리 남겼다고! 이거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주는 거 잘 받으면 되지.”
- 그럼 이거 받아서 내가 잘 아는 곳에 팔아치울게. 아마 돈 좀 될 거 같다.
"팔긴 뭘 팔아. 그걸 그냥 팔 거면 왜 줬겠어? 돈으로 주면 깔끔한데.”
엄대협은 대답하지 못했다. 반태수의 말이 맞았으니까. 게다가 준 사람이 5대 가문 소속 마법사다. 이걸 그냥 팔아먹었다간 탈이 날 수도 있었다.
- 그럼 어쩌지?
"어쩌긴, 잘 보관하면 되지.”
- 야, 마수 보관하기가 쉬운 줄 알아?
"브로커면 그 정도는 간단히 해야지.”
- 브로커가 무슨 만능 일꾼인 줄 알아?
"잘 아네. 그럼 끊는다. 나 바빠.”
반태수는 엄대협의 대꾸는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갑각 트롤 사체를 준다고? 대체 왜?”
아마 오스윈 프리든의 호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는 법이다.
그와는 별개로 어쨌든 갑각 트롤 사체는 한 번쯤 들여다보고 싶긴 했다.
열심히 분석하다보면 생체조직에 관한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반태수가 판단하기에 갑각 트롤은 생체 병기였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마수가 분명했다.
아까 싸울 때 뽑아낸 정보를 보면서 그렇게 확신했다.
갑각 트롤의 신체 곳곳에는 인위적인 흔적이 제법 많았다. 예를 들면 통각을 제거했다거나, 에너지를 얻는 방식이 음식 섭취가 아니라 거나, 등등등.
그러니 그걸 깊이 있게 연구하면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후우. 복기나 하자.”
반태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전투를 차분히 복기했다.
그리고 오늘 만났던 5대 가문 소속 능력자들을 떠올렸다.
과연 그들이 한꺼번에 덤비면 이길 수 있을까?
반태수의 머릿속에서 가상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에 대해서는 이미 유적 안에서 파악해 뒀다.
어떤 속성을 가졌는지, 그걸 어떤 식으로 이용하는지, 그리고 신체 능력은 어떤지, 마력이 신체에 어떤 식으로 작용해서 능력을 증폭 하는지.
‘아직 멀었네.’
지금까지 얼마나 편하게 싸워 왔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프로스틴과 비슷하거나 그를 능가할 정도의 능력자 다섯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게다가 가상 전투였다. 실제로 싸우면 어떤 변수가 작용할지 모른다.
반태수는 그날 밤이 새도록 가상 전투에 몰두하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그의 가상 전투는 꿈에서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마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쾅쾅쾅!
“야! 문 열어! 내가 일감 따왔다!”
반태수는 인상을 쓰며 천천히 눈을 떴다.
"아우, 저거 일부러 이러는 거지?”
잠든 지 아직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막 깊은 잠에 빠져들자마자 깨어난 거라 몸이 무거웠다.
마력으로 몸을 쫙 훑어주고 나니 제 컨디션이 올라왔다.
반태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다가가 벌컥 문을 열었다.
막 주먹으로 문을 치려다가 멈칫한 엄대협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자고 있었어?”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