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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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태수의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갑각 트롤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문이었다.
아까 영역화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던 것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높이가 4미터쯤 되고, 폭이 3미터쯤 되는 제법 큰 문이었다.
그 문에 고대문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커다란 글자가 양쪽 문에 각각 네 개씩 있었다. 총 여덟 개의 문자였지만, 고대 문자는 문자의 수가 적다고 해서 꼭 내용이 짧지는 않았다.
때로는 더 여러 문자를 쓴 문장이 더 짧은 의미를 가지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저 문에 양각된 문자는 후자였다. 고작 여덟 개였지만, 저 문자들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문장은 상당히 길었다.
‘진짜 별 희한한 문자도 다 있어. 저런 비효율적인 문자를 대체 왜 만든 거야?’
한데 그렇게 비효율적인 문자가, 왠지 괜찮아 보인다는 게 이상했다.
'무슨 암호도 아니고.’
이 유적에 들어올 때, 입구에 있는 문자들도 읽었다. 내용은 길었지만, 요약하면 특별한 무기고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고대의 무기들이 보관되어 있지 않을까?
저 갑각 트롤들은 무기고를 지키는 생체 병기고 말이다.
‘그나저나…… 저번에 얻은 생체조직에 관한 지식을 모두 섭렵하면 저런 생체병기를 만들 수 있는 건가?’
아무튼 저 문에는, 이곳은 특수 시설물이니 출입을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하다고 새겨져 있었다.
자격 검증을 위해 신분증을 정해진 글자 위에 갖다 대라는 내용도 있었고, 신분증을 잊었다면 손바닥을 정해진 글자 위에 갖다 대는 것으로 신분증을 대신할 수 있고, 그 경우 피가 필요하다는 내용까지 있었다.
‘자격 검증?’
슬쩍 고개를 돌려 오스윈 프리든을 쳐다봤더니 그도 이와 비슷한 유적에 대해 아는지 경직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태수는 일단 저 세 마리의 거대 갑각 트롤부터 처리하고 나서 나머지 고민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아마키르에게 다가갔다.
"일단 세 마리지만, 내구력 약화가 제대로 통할지 확인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크기는 갑각 트롤의 1.5배 정도 되고, 지닌 마력의 양은 3배 정도 된다.
코어는 다섯 개였지만, 각각의 코어가 뿜어내는 힘도 훨씬 강했다.
그러니 내구력 약화를 다섯 개 중첩하는 정도로는 안 먹힐 수도 있었다.
아마키르를 비롯한 다른 능력자들은 거대 갑각 트롤이 자아내는 존재감에 벌써부터 잔뜩 주눅이 든 상태였다.
그래서 불안한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테스트 하는 와중에 저놈들이 움직이면 어쩝니까?”
반태수가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는 듯 대답했다.
“튀어야지요.”
“아……!”
아마키르는 여전히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과연 저 괴물들을 상대로 도망칠 수 있을까?
"미리 겁부터 먹지는 말죠. 일단 해보겠습니다.”
반태수는 마법진을 차근차근 만들었다. 혹시 몰라서 36개나 되는 내구력 약화를 만들었다.
"테스트에 성공함과 동시에 공격하면 됩니다. 저놈들 신체 능력은 2배 정도라고 보면 됩니다. 속성 능력은 3배고요. 그걸 감안해서 공격하십시오.”
아마키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능력자들을 셋으로 나누고 전투 계획을 세웠다.
아까 싸워봤기에 계획 자체는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신체 능력이 2배, 속성 능력이 3배라면 그저 감안한다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키르는 동료들에게 당부했다.
"다들 단단히 각오하고, 죽지 마. 조금이라도 다치면 바로 빠지고.”
다들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거대 갑각 트롤을 바라봤다.
잠시 후, 36개의 마법진이 차례대로 발동했다.
반태수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마법진을 차례대로 발동하면서 거대 갑각 트롤의 상태를 면밀히 확인했다. 이미 영역화가 이 동공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일곱 개!’
일곱 개의 내구력 약화를 중첩했더니 간신히 통했다. 그럼 여덟 개면 넉넉하게 약화시킬 수 있으리라.
하지만 기왕 36개나 만들었으니 한 마리당 12개씩의 내구력 약화를 모조리 퍼부었다.
그리고 거대 갑각 트롤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격!”
반태수가 다급히 외쳤다. 그걸 신호로 아마키르를 비롯한 능력자들이 일제히 거대 갑각 트롤에게 달려들었다.
반태수는 저들만으로는 결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빠르게 다음 마법을 준비해서 펼쳤다.
이번엔 아까와는 좀 다른 방식을 썼다.
굉장히 복잡한 마법진을 만들어 바로 발동했다.
탱커 역할을 하는 능력자들 앞에 마력 역장이 나타났다. 그들이 가진 힘만으로 거대 갑각 트롤의 공격을 막아내거나 흘려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역시 실전을 경험하는 것이 실력 향상에는 최고였다. 술식 계산과 응용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반태수가 펼친 마력 역장은 탱커가 뽑아낸 실드에 간섭해 갑각 트롤의 공격을 비스듬하게 흘려내는 기능까지 있었다.
꽈앙! 꽈앙! 꽈앙!
그럼에도 탱커들은 이를 악물어야 했다. 거대 갑각 트롤의 공격은 정말로 무시무시해서 공격을 빗겨내고 마력 역장이 층격을 한껏 받아냈는데도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이 아팠다.
탱커들이 공격을 막은 순간 다른 능력자들의 공격이 거대 갑각 트롤의 몸에 작렬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거대 갑각 트롤들은 움찔하지도 않고 계속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반태수의 표정은 담담했다.
어차피 고작 이 정도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여기지 않았다. 방금 한 것은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뿐이었다.
반태수가 아쉬덴 길드에 원한 것은 자신이 마법을 쓰는 동안 거대 갑각 트롤들이 이쪽을 신경 쓰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반태수의 머릿속에서 술식 계산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갑각 트롤의 움직임에 따라 위치를 예측하는 술식이었다.
거기에 압축공기까지 이용한 강력한 충격파를 얹었다.
여섯 개의 마법진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그리고 일제히 발동했다.
꽈과과광!
여섯 개의 충격파가 각각 거대 갑각 트롤의 귀에 바짝 붙어서 터졌다.
방향성까지 부여되어 있어 모든 충격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내구력 약화로 인해 그 모든 충격이 고스란히 가장 안쪽까지 확실히 전달되었다.
거대 갑각 트롤들이 비틀거렸다. 순간적으로 청력과 균형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어느새 완성한 반태수의 마법진 여섯 개가 또 발동했다.
꽈과과광!
더욱 정교해진 위치 선정이 이번엔 트롤들의 눈앞에서 터졌다.
이번엔 충격뿐 아니라 강렬한 섬광까지 더했다.
순간적으로 시력까지 상실한 것이다.
균형감각과 청각, 시력이 사라진 갑각 트롤들이 발을 내디디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트롤이기에 이대로 두면 상실한 모든 것들을 바로 회복하리라.
그리고 아쉬덴 길드의 능력자들은 이렇게 순간적이나마 무력화 된 마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빠르게 달려들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을 무지막지하게 퍼부었다.
마법사인 헬뮤트 보겔도 마찬가지였다. 표적이 크기에 그 역시 마법을 쓰기가 용이했다.
반태수는 쓰러진 갑각 트롤들의 관절을 단단하게 얼려 버렸다.
그리고 한 발 물러났다.
이제 전투는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저 정도 해주었으면 충분히 받아먹을 수 있으리라.
반태수가 물러나자, 오스윈 프리든이 다가왔다.
"이번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전투 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그쪽에 두고 있었다.
"혹시 파괴력이 강력한 마법도 쓸 수 있으십니까?”
"어느 정도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음…… 예를 들면 여기, 크랙톤을 단숨에 날려 버릴 정도라거나.”
반태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오스윈 프리든을 쳐다봤다.
"그게 가능할 리 없잖습니까.”
"솔직히 준비만 충분히 한다면 반 마법사님 같은 분들은 도시 하나 정도는 날려 버릴 수 있지 않습니까?”
"글쎄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오스윈 프리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번 기회에 한 번 생각해 보시죠. 과연 어떤 준비를 해야 이 정도 도시를 단숨에 날려 버릴 수 있을지.”
반태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라리 핵을 쏘는 것이 더 편하지 않을까? 물론 후유증이 극심하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도시를 날려 버리면 핵 못지않은 후유증이 남을 것이다.
"하하하. 너무 심각하실 거 없습니다. 그저 생각만 해보자는 거니까요. 다양한 공상과 발상, 그리고 거기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사색은 마법사에게 아주 중요한 영감을 주지 않겠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요.”
반태수는 그렇게 대충 대꾸한 다음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오스윈 프리든을 보며 물었다.
“혹시 도시 하나를 날릴 정도의 마법사가 진짜로 있습니까?”
오스윈 프리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반태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쯤에서 전투가 끝났다.
세 마리 거대 갑각 트롤의 숨이 완벽하게 끊어졌고, 이쪽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이제 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유적 탐사의 결실을 따먹을 차례였다.
***
거대 갑각 트롤의 사체를 한쪽에 잘 정리해 둔 탐사대는 문 앞에 모였다.
문에 있는 문자는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걸 본 사람은 있었다.
바로 오스윈 프리든이었다.
"이 문은 함부로 열어선 안됩니다.”
그의 말에 다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봤다.
오스윈 프리든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여기까지 탐사를 완료했으니 진실을 알 자격이 있었다. 그걸 알아야 한 발 물러날 테니까.
"자, 이 사진을 보시죠.”
아마키르가 대표로 스마트폰을 받아 사진을 확인했다. 이곳에 있는 것과 거의 비슷한 문이었다. 문에 양각된 문자는 몇 개가 좀 다르긴 했는데, 그걸 제외하면 굉장히 흡사했다.
"다음 사진도 보시죠.”
아마키르가 사진을 넘겼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강제로 열었는지 문이 부서져 있었고, 문 너머, 그러니까 유물이 보관된 방이 망가져 있었다.
마치 폭탄이라도 터트린 것처럼.
“이와 같은 타입의 유적을 처음 발견했을 때 벌어진 일입니다. 당시 폭발로 유적 탐사에 참여했던 인원의 절반이 날아갔죠.”
아마키르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어쩝니까? 이대로 포기해야 합니까?”
오스윈 프리든이 고개를 저었다.
"해결책이 있습니다. 다만 좀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분배율이 줄어들 겁니다.”
굉장히 민감한 사항이었지만, 아마키르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문 채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충분히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을 열기 위해선 상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아주 특별한 시약이 필요하거든요."
오스윈 프리든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그냥 상부가 아니라 정말 높은 곳의 도윰이 필요합니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높은 곳이라면 과연 어디일까? 5대 가문에서도 높은 곳이라니, 상상조차 어려웠다.
"일단 연락부터 하겠습니다. 아마 몇 시간쯤 걸릴 겁니다.”
오스윈 프리든은 그렇게 말하고 아마키르를 바라봤다.
아마키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몇 시간 정도면 그냥 여기서 기다리는 게 낫겠군요. 쉬면서 대기하겠습니다.”
"편하실 대로.”
오스윈 프리든은 그렇게 말한 다음,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지하 깊은 곳인데도 통화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걸로 봐서 그냥 평범한 스마트폰은 아닌 듯했다.
아니면 여기 들어오기 전에 뭔가 조치를 해뒀거나.
잠시 후, 통화를 마친 오스윈 프리든이 돌아왔다.
“바로 출발한답니다. 3시간쯤 후에 도착할 겁니다.”
그 말에 다들 주변으로 적당히 흩어져 바닥에 앉거나 누웠다.
반태수는 그걸 잠시 지켜보다가 오스윈 프리든에게 물었다.
"저기 있는 문, 좀 살펴봐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손대지는 마십시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그러죠.”
어차피 손댈 생각은 없었다. 마력으로 구조를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아까는 마치 벽으로 차단된 듯 막혔는데, 그걸 뚫을 방법을 찾고 싶었다.
겸사겸사 오스윈 프리든의 정보도 확인해 보고 말이다.
그의 몸에 펼쳐져 있는 정보 차단은 거의 뚫었다. 생각보다 상당히 까다로워서 이제야 답이 보이고 있었다.
반태수는 영역화를 펼친 채 문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 세심히 마력을 움직여 문에 깃든 모든 것을 파악해 나갔다.
‘역시 이것도 일종의 정보차단이었어.’
다만 그 수준이 아득히 높아 쉽게 뚫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얻을 게 많았다.
반태수는 다양한 방법으로 문에 걸린 정보차단을 파악하고 뚫으려 애썼다.
그러는 사이 오스윈 프리든의 차단을 뚫고 그의 정보를 확인했다.
역시나 마력을 튕겨냈던 건 그의 능력이 아니라 그가 가진 마도구였다.
굉장히 수준 높은 마도구였기에 쉽게 보안을 뚫을 수 없었다.
코어에는 다섯 개의 원통이 회전 중이었다. 좀 의외였다. 헬뮤트 보겔과 같은 서클일 줄은 몰랐다.
다만, 코어의 질이 훨씬 좋긴 했다. 아마 실력도 더 뛰어날 것이다.
‘마도구를 많이 갖고 있네.’
여러 개의 마도구를 몸 곳곳에 착용 중이었다. 하나같이 수준이 높은 뛰어난 마도구였다.
그렇게 한창 분석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여러 명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태수는 그제야 집중을 풀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쳐다봤다.
드디어 기다리던 자들이 도착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