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유적 탐사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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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
반태수는 결정을 내렸다. 계속 탐사를 진행하기로.
유적의 끝에 있을지도 모를 고대문자를 꼭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유물이라는 것을 분석해 보고 싶기도 했고.
그러려면 자신의 힘을 좀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이마키르를 비롯한 탐사대에게 갑각 트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줘야 하니까.
‘그나저나 나 정말 달라졌네.’
기억이 사라진 17살까지의 삶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른다. 뭘 했는지 정도는 조사해서 약간이나마 알 수 있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또 사람들이 안 보는 곳에서 뭘 했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러니 자신의 성향이 어떤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저 그 뒤에 살아온 궤적을 토대로 과거에도 이와 결이 비슷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지.
지난 6년 동안의 삶을 통해 자신의 성향을 짐작해 보면, 과도한 조심성을 가졌고, 확실하지 않으면 결코 움직이지 않는 성향이었다.
겉으로는 잘 나가는 카페 사장이지만, 실제로는 은둔해서 마법 연구에 매진하고, 그것을 철저히 감춰왔다. 실제로 혼자 있는 시간이 밖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훨씬 즐겁기도 했고.
한데 이면세계를 접한 이후, 그런 자신의 모든 추측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조심성? 확실하지 않으면 안 움직여? 다 틀렸다.
충동적이고 불확실한 모험에 몸을 맡기고, 싸움을 즐긴다. 심지어 이젠 몸으로 싸우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참고 살았을까?
‘돌파구가 생겨서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것이 터진 건가?’
반태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아마키르에게 다가갔다.
아마키르는 반태수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갑각 트롤이 다섯 마리나 있어서 아무래도 통과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저것들도 전부 변종인 것 같은데……."
"그럼 이대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마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잡은 갑각 트롤 한 마리만 들고 돌아가는 거죠. 아쉽지만 무리해서 큰 피해를 보느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가능성이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 말에 아마키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가능성이라면……."
"제가 적극적으로 보조를 하는 거죠. 아마 다섯 마리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아까도 보셨잖습니까. 아까 죽인 갑각 트롤, 설마 아쉬덴 길드의 힘만으로 잡은 거라고 믿으시는 건 아니죠?”
"물론입니다. 도와주신 분이 반 마법사님인지 아니면 저기 계시는 오스윈 프리든 마법사님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반태수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얘기가 쉽겠군요. 다섯 마리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게 해드리죠.”
아마키르가 그 말에 반색했다.
"역시 반 마법사님께서 도와주신 거였군요.”
아무리 위험해도 가능성이 있다면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건 아마키르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의 생각이었다.
"혹시 어떤 마법을 쓰실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그래야 저희도 전투계획을 세우기 편할 것 같습니다만……."
반태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일단 내구력을 약화시킬 겁니다.”
"내구력을요?”
"저 갑각 트롤은 기본적으로 모든 충격을 뒤로 흘려내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아…… 어쩐지!”
반태수의 설명을 들은 능력자들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아까 싸워봤기에 딱 듣자마자 이해를 한 것이다.
“근력도 대단하고 뼈도 단단해서 충격을 주기 어렵죠. 그래서 일단 마법으로 내구력을 떨어뜨려야 공격이 먹힙니다.”
갑각 트롤 한 마리당 한 번에 다섯 개의 내구력 약화를 퍼부어야 한다.
만일 예전이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무려 25개의 마법진을 동시에 펼쳐야 하니까.
얼마 전 벽을 넘기 전까지는 12개의 마법진이 한계였다.
한데 이제 그 한계가 한없이 올라갔다.
이제는 같은 마법이라면, 동시에 36개의 마법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동시에 36개의 마법을 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36개의 마법진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건 어렵지만,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위력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아마키르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반태수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자신감에 찬 어조에 얘기를 듣는 사람들 모두의 사기가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그 뒤에 관절에 빙결 마법을 쓰고 충격파로 내상을 입히는 식으로 도울 겁니다. 그러니 아까처럼 싸워도 됩니다. 인원을 좀 나눠서 디버프가 걸린 걸 확인하고 싸우면 금방 끝날 겁니다.”
반태수의 말이 끝나자, 헬뮤트 보겔이 굉장히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 저렇게 자신만만하니 진짜인지 아닌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헬뮤트 보겔도 나름 잘 나가는 마법사였다. 물론 진짜 잘했다면 고작 아쉬덴 길드에서 활동하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비슷한 수준의 조직 중에서는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도저히 저런 식으로 마법을 펼칠 수 없었다.
헬뮤트 보겔의 시선이 옆으로 힐끗 돌아갔다. 그곳에는 오스윈 프리든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정도 마법사면 가능할까?’
아직 오스윈 프리든의 마법을 경험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들은 얘기는 많았다.
오스윈 프리든에 대해 말하는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며 경외의 감정을 갖는다.
‘저 대단한 오스윈 프리든이 반 마법사만 보고 있구나.’
그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실력이 대단한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는다.
아무튼 분위기는 유적 탐사를 계속 이어가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니 자신도 무언가 기여를 해야 한다.
헬뮤트 보겔은 전격, 화염, 빙결, 바람에 관한 마법을 다양하게 쓸 수 있다.
하지만 방금 반태수가 말한 것처럼 적에게 디버프를 걸어주는 마법은 하나도 알지 못한다.
사실 그런 마법은 굉장히 드물었다. 그러니 모른다고 흠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왠지 주눅이 들었다.
"저…… 저는 뭘 하면 좋겠습니까?”
헬뮤트 보겔은 질문을 던진 다음, 다양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반태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화염만 안 쓰시면 됩니다. 제가 빙결로 갑각 트롤의 관절을 건드릴 예정이라. 그러니 되도록 갑각 트롤이 있는 위치에서 바로 마법이 발현되면 좋고, 아니더라도 능력자들의 동선에 방해가 되지 않게 날리시면 됩니다.”
헬뮤트 보겔은 잠시 고민했다. 가장 어려운 것이 능력자들의 동선과 겹치지 않게 마법을 쏘는 일이다.
하지만 다섯 마리에게 나눠서 달라붙으면 고작 4명에서 5명 사이인데, 동선을 계산하는 것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다들 동의했고, 전투 계획까지 마무리 되자, 이마키르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그럼 시작하죠.”
반태수는 빠르게 마법진을 만들었다. 무려 25개의 마법진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갑각 트롤들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래서 쓸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25개의 마법이 동시에 발현되었다.
다섯 마리 갑각 트롤의 내구력이 크게 깎였다. 그리고 충격을 온몸 구석구석에 전달할 수 있는 길이 생겨났다.
"지금입니다.”
반태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능력자들이 갑각 트롤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헬뮤트 보겔의 마법이 휙휙 지나갔다. 헬부트 보겔이 선택한 것은 바람을 이용한 충격 마법이었다.
꽈과과광!
다섯 마리 갑각 트롤의 몸에 무수한 공격이 작렬했다.
반태수는 그걸 보며 빠르게 빙결 마법을 완성해 갑각 트롤의 관절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충격파를 계속해서 날렸다.
동공 안이 폭음으로 가득 채워졌다.
갑각 트롤들은 제자리에 서서 주먹을 휘두르다가 이내 이동하기 시작했다.
제자리에서 적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전투의 양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반태수는 끊임없이 갑각 트롤을 공격했다. 내구력 약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썼고, 틈틈이 빙결 마법으로 관절을 얼리고 충격파를 던져 갑각 트롤의 내부를 뒤흔들었다.
생각보다 일방적인 싸움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결국 다섯 마리의 갑각 트롤이 차례대로 쓰러졌다.
모두의 얼굴에 진한 성취감과 희열이 맴돌았다.
탐사대는 갑각 트롤을 한쪽에 정리해 놓은 다음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스윈 프리든은 바닥에 앉아 쉬는 반태수에게 다가갔다. 그는 전투 내내 단 한 번도 개입하지 않았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분이셨군요.”
오스윈 프리든의 말에 반태수가 가볍게 웃었다.
“내구력 약화라는 마법,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혹시 그 술식, 어디서 구하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반태수는 그 질문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의 뉘앙스만 보면 술식을 구해야 마법을 익힐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지 않은가.
내구력 약화의 술식을 어디서 구했느냐고? 직접 만들었다. 한데 왠지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반태수가 머뭇거리자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오스윈 프리든이 빙긋 웃었다.
"말씀하기 어려우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곤란한 질문을 드렸군요.”
오스윈 프리든은 눈을 반짝이며 다른 질문을 했다.
"내구력 약화가 있다면 반대로 내구력 강화 마법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구력 강화를 역으로 계산해서 만든 것이 내구력 약화니까. 물론 그 과정에서 상당히 변형했지만.
오스윈 프리든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였다. 그의 눈빛 깊은 곳에 굉장한 열망이 보였다.
아마 내구력 강화와 약화 마법의 술식을 갖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걸 그냥 알려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무언가 대가를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 아마키르가 다가왔다.
"슬슬 탐사를 다시 진행하고자 하는데…… 혹시 시간이 더 필요하십니까?”
아마키르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스윈 프리든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5분만 더 쉬죠. 잠시 고민할 일이 있어서.”
"예. 그럼 5분 후에 출발하겠습니다.”
아마키르가 물러가자, 오스윈 프리든이 반태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딴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서 출발을 잠시 미뤘습니다.”
딴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건 바쁘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오스윈 프리든이 유적 탐사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실력 좋은 사람을 구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주체는 오스윈 프리든이 아니라 5대 가문일 것이다.
5분 가까이 고민하던 오스윈 프리든이 반태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따로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글쎄요. 뭐, 딱히 아쉬운 게 없어서. 아, 유적이나 고대문자로 이루어진 기록에 관심이 좀 있긴 합니다.”
오스윈 프리든의 눈에서 번갯불이라도 나오는 듯 광채가 번쩍번쩍 했다.
"그런 거라면 제가 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오스윈 프리든의 미소를 본 반태수의 기대감이 한껏 올라갔다. 혹시 5대 가문이 관리하는 유적에 들어가 볼 수도 있는 걸까?
“5대 가문이 관리하는 유적은 어쩔 수 없지만, 오늘처럼 외부 인력을 동원해 유적 탐사를 할 때 반 마법사님을 초대해 드리겠습니다. 그 정도야 제게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요.”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반태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좀 더 큰 걸 원했지만, 이 정도도 충분했다. 당분간은.
"물론입니다. 전 반 마법사님과 좋은 관계가 되고 싶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오스윈 프리든이 환하게 웃었다.
"기대 이상을 해드리죠. 자, 이제 슬슬 이 유적 탐사를 마무리 하러 가셔야죠.”
다시 유적 탐사가 시작되었다. 오스윈 프리든은 그런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철저하게 구경만 했다.
세 마리 거대 갑각 트롤이 있는 곳까지 가는 길 중간에 몇 가지의 함정이 있었다. 상당히 잘 감춰진 마법 함정이었다.
그 함정을 헬뮤트 보겔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또한 감지 능력을 가진 능력자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반태수는 교묘하게 감춰진 함정을 전부 발견하고 알아서 해체까지 했다.
그냥 함정이 아니라 마법에 기반을 둔 함정이었기에 해체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 와중에 흥미로운 것들이 있어서 새로운 영감을 받기도 하고 해체 과정에서 지식을 얻기도 했다.
여러모로 반태수에게 있어서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결국 거대 갑각 트롤이 있는 동공에 도착했다. 뒤에 마력을 차단하는 문이 있는 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