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 신분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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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부터 엄대협은 반태수의 신분을 만들어주기 위해 발바닥에서 땀이 날 정도로 뛰어다녔다.
반태수가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면세계에 너무 오래 있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서 카페도 확인해야 하고, 처리할 일도 처리해야 한다.
이번에는 그래도 며칠 못 나올지도 모른다고 미리 얘기를 해두었지만, 그 시간이 길어져서 좋을 게 없었다.
엄대협이 여기저리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동안 반태수는 호텔에 홀로 남아 느긋하게 새로 얻은 경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적응하는 일에 몰두했다.
반태수가 가장 환호했던 성과는 두뇌를 드디어 네 개로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원래는 세 개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이면세계에 오면서 턱없이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이제 네 개가 되었으니 여유는 없어도 쪼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연구를 할 때의 효율도 확연히 증가할 것이다.
네 개의 두뇌를 동시에 써서 하는 공부나 연구가 얼마나 빠른 성과를 가져다줄지 벌써부터 기대됐다.
두뇌 다음으로 좋은 건 마력이었다.
일단 마력 코어의 용량이 두 배로 커졌다. 앞으로 훨씬 여유롭게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벽을 넘기 전에도 딱히 마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 제대로 마법을 쓸 상황이 오지 않아서였다.
앞으로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높으니, 마력 코어가 성장했다는 건 정말 중요했다.
마력 코어가 성장하면 마력 용량뿐 아니라 코어의 마력 생산 능력도 높아진다.
또한 마력에 대한 지배력도 높아진다.
마법사 루델 아센의 마법에 그렇게 쉽게 개입할 수 있었던 것도 마력에 대한 지배력이 루델 아센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마력 코어가 성장했으니 앞으로 마법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성장을 통해 공간에 대한 깨달음이 높아졌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당장 아공간을 만들 수는 없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강도 높은 연구를 오랫동안 계속해야 할 듯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감도 못 잡았다.
대신 공간에 대한 깨달음을 정리하다가 단거리 공간이동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물론 이 역시 당장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위험성이 높은 만큼 무수한 실험을 통해 안전성을 확보하기 전에는 시도할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그래도 결국은 해내지 않겠는가.
‘공간이동이라.’
이걸 열심히 연구하다보면 대규모 공간이동도 꿈은 아니니라.
갑자기 의욕이 팍팍 솟았다.
슬슬 정리가 마무리 될 무렵, 호텔로 엄대협이 찾아왔다.
“아직도 그러고 있는 거야? 운동이라도 좀 해.”
“이게 노는 걸로 보인다는 게 평범하다는 증거지.”
엄대협이 무슨 개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마법사는 깨달음을 정리하는 것도 일이야.”
“그러시겠지.”
엄대협이 비꼬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못 믿네? 진짜라니까? 다른 마법사들한테 가서 물어봐. 뭐라고 하나.”
“내가 아는 마법사가 너 말고 어디 있다고.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아는 마법사가 왜 없어? 내가 잡은 마법사만 세 명인데.”
엄대협이 인상을 팍 썼다.
“그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만나! 칼덴에서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데.”
“메렌틸이랑은 이제 더 안 싸우는 건가?”
반태수의 물음에 엄대협이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당장 싸움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아. 메렌틸 쪽에서 상당히 당황한 모양이야. 지금 아주 벌집을 들쑤셔 놓은 것 같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회사 소속 마법사 두 명을 모두 잃었고, 두 개가 넘는 호송 경호팀을 잃었다.
거기에 고용한 용병들은 물론이고 프로스틴까지 사라지지 않았나.
물론 용병이야 자기 몸은 자기가 챙기는 것이 관례이니 책임이 적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래저래 정신이 없을 수밖에.
그러니 칼덴에 무슨 짓을 할 여유가 있을 리 없고.
하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이 바닥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항상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일단 이거 받아.”
엄대협은 신분증을 꺼내 반태수에게 건넸다.
그냥 단순한 플라스틱 카드가 아니었다. 마법적 처리가 된 카드였다.
카드 표면에는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냥 새하얗기만 했다.
기록을 확인하려면 마도구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막상 신분증 자체를 쓸 일은 거의 없을 거야. 이건 신분에 대한 기록.”
엄대협은 서류봉투를 건넸다. 그 안에 반태수의 신분증에 해당하는 정보가 들어 있었다.
별 건 없었다. 출신지와 개인 식별번호, 그리고 생년월일 정도가 전부였다.
반태수는 서류봉투를 열지 않고 마력으로 카드를 확인했다.
제법 괜찮은 보안 마법이 걸려 있었고, 그 보안 마법을 뚫고 들어가니 신분증의 기록이 보였다.
이름은 반으로 되어 있고, 출신지는 크랙톤. 생년월일은 현실의 반태수와 같았다. 개인 식별번호는 15자리나 되는 숫자였다.
그런 반태수의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던 엄대협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설마 신분증 기록을 읽은 거야? 그게 가능해?”
반태수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게 가능하든 말든 엄대협이랑 무슨 상관인가.
엄대협은 반태수에게 답이 돌아오지 않자 입 속으로 웅얼웅얼 하더니 품에서 다른 카드를 꺼내 침대 위로 툭 던졌다. 이번엔 새까만 카드였다,
“신분증 만드는 김에 계좌도 개설했다.”
반태수는 새까만 광택이 흐르는 카드를 집어 슬쩍 살펴봤다. 이것 역시 마법적 처리가 된 카드였다.
“이게 신분증보다 더 대단한데?”
“당연하지. 신분증이 털리는 건 그저 이름이랑 번호 몇 개 털리는 것뿐이지만, 카드가 털리면 돈이 사라지잖아.”
반태수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마력의 실을 뽑아 은행에서 발급한 카드를 확인했다.
이 카드에 깃든 보안 체계가 훨씬 더 복잡하고 대단했다.
하지만 정작 카드에 있는 기록은 별 거 없었다.
계좌번호와 이름, 생년월일과 개인 식별번호, 거기에 카드 생성일이 전부였다. 심지어 비밀번호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굳이 이렇게 복잡한 보안 마법을 걸어둘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음?’
반태수는 보안 마법을 확인하던 중, 특이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
“이거 지문 인식 기능이 있네?”
엄대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이거 등록된 지문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카드 자체를 쓸 수 없는 거 아냐?”
“맞아. 그래서 은행으로 지문 보내서 등록해야 돼.”
엄대협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화면에 네모가 그려져 있었다. 거기에 지문을 대면 지문이 은행으로 전송되는 방식인 모양이었다.
반태수는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어딜?”
“은행.”
엄대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 지금 날 못 믿어서 이러는 거야?”
“그럼 너 같으면 믿겠어?”
“아니.”
엄대협은 바로 대답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을 믿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지금 두 사람의 관계는 그야말로 가느다란 거미줄, 그러니까 언제 끊어질지 모를 위태로운 관계였다.
그리고 그 관계에서 철저한 을은 엄대협이었고.
“그래, 가자. 나도 날 못 믿겠는데, 너한테 믿어 달라고 하는 게 웃긴 일이지.”
그래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엄대협이 휙 돌아서서 문으로 향하자, 반태수가 한 마디 툭 던졌다.
“마법사 전용 카드도 있지?”
엄대협이 다시 휙 돌아서서 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설마 너 나 말고 다른 브로커도 키우냐?”
“아직은 아니지. 딱히 잘못한 것도 없잖아.”
반태수는 은행 카드를 손가락에 끼워서 슬쩍 들며 말을 이었다.
“이런 걸 보니 분명히 마법사나 능력자 전용 카드가 있을 것 같더라고. 자기만의 마력 패턴을 만들면 사인이나 비밀번호가 필요 없을 테니까.”
과연 마력 패턴을 만들 수 있는 마법사가 몇이나 될지는 모르지만.
아마 반태수가 만났던 세 명의 마법사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스틴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마력 패턴에 뭔가 기능을 담으려면 마법이 필요하지만, 그저 패턴만 만드는 거라면 마력을 잘 다루는 능력자도 얼마든지 가능할 테니까.
엄대협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을 열고 나갔다.
반태수는 씨익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사실 이렇게 한 이유는 엄대협을 못 믿어서도 있지만, 그보다는 은행에서 쓰는 마도구들을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어서가 더 컸다.
새로 올라선 경지의 위력을 확인할 좋은 기회였다.
* * *
“야, 왜 이리 멍하니 있어? 뭐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어?”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최진혁의 물음에 백진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내가 널 하루 이틀 보냐?”
최진혁은 백진희 옆에 앉았다.
“에이, 앉으려면 제대로 된 벤치 같은 데 앉지, 왜 맨바닥에 앉고 난리야.”
지금 두 사람이 앉은 곳은 포탈 건물이 보이는 길가였다.
회사 건물 근처에는 편안히 앉으라고 만들어 놓은 벤치가 여러 개 있었는데 굳이 도로를 건너서 길가에 앉은 것이다.
“그래서, 왜 이러는 건데?”
“그냥. 생각이 좀 많네.”
“마법에 맞을 뻔해서 그런 거야?”
백진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사실 그날,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거대한 불덩이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걸 보면 누구든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피할 틈도 없었다. 어? 불덩이네? 하는 순간 이미 코앞까지 불덩이가 날아왔으니까.
그 순간, 불덩이가 유턴하듯 코앞을 스쳐 지나가며 원래 날아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을 확인한 순간, 저게 여기서 터졌으면 다 죽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살았고, 그동안 자신들이 했던 싸움은 어린애 장난 같은 싸움을 봤다.
전격의 파도가 적을 휩쓸었고,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무서운 사내도 봤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칼덴에서 나왔다는 마법사가 모조리 정리해 버렸다.
“답지 않게 왜 그래? 그동안 죽을 뻔한 적이 처음도 아니면서.”
백진희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다르지. 그동안은 죽을 위기에 처했어도 내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했으니까. 이번처럼 무력하지는 않았잖아.”
자신이 한없이 하찮아지는 느낌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관두려고?”
최진혁의 물음에 백진희가 픽 웃었다.
“글쎄. 과연 그럴 수 있으려나.”
최진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가자.”
백진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최진혁을 올려다봤다.
“가긴 어딜 가? 지금 우리 위험한 거 몰라?”
“다 같이 몰려가면 괜찮아. 회사에 연락해서 경호 인력도 좀 보내달라고 하고. 우리 권리, 이럴 때 써먹지 언제 써먹겠어?”
특수 자원 관리부 소속 능력자들은 필요할 때, 회사의 경호팀을 호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자주 써먹을 수는 없고, 1년에 한두 번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동안은 아무도 쓴 적 없는 권리였다.
“그래서 어딜 가는데?”
“카페 위자드.”
백진희가 인상을 팍 썼다. 그걸 본 최진혁이 히죽 웃었다.
“가서 잘 생긴 얼굴 좀 보고 있으면 힘이 불끈불끈 날 거다.”
장난 반, 진담 반이 섞인 말이었다. 힘내라는 최진혁 나름의 응원이기도 했고.
하지만 백진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봐야 없어.”
“응?”
“어디 가셨다고 하더라고. 전화를 하도 안 받고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어서 매장에 연락했어. 사장님 안 나온 지 며칠 됐대. 언제 오는지도 모르고.”
최진혁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백진희를 바라봤다.
“허어, 이미 연락 하셨어? 아이고, 이거 중증이네, 중증이야.”
다시 멍한 표정으로 돌아간 백진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최진혁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번에 임자 제대로 만난 거 같은데?”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걸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고소하지?
그때, 백진희가 고개를 휙 돌려 최진혁의 얼굴을 바라봤다.
최진혁이 흠칫 놀라 얼른 웃음기를 지웠다.
“기분 좋아 보이네?”
백진희의 말에 최진혁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좋긴. 동료가 그러고 있는데 어떻게 기분이 좋을 수 있겠어.”
백진희가 천천히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을 탁탁 털었다.
“그렇지. 동료가 이러고 있는데 그렇게 웃으면 짐승만도 못한 거지.”
최진혁이 얼른 회사 쪽으로 걸어갔다.
“힘 난 거 같으니까 난 이만.”
백진희는 그 뒤를 쫓아가려다가 결국 픽 웃고 말았다. 최진혁이 와서 한바탕 휘저은 덕분인지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나저나······ 대체 어딜 간 걸까? 보고 싶은데.’
백진희의 뇌리에 반태수의 잘 생긴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답답하네. 대체 언제쯤 상황이 풀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