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 두 번째 의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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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그 얘기에 덥석 물었어?”
반태수의 말에 엄대협이 인상을 팍 썼다.
“그럼 안 한다고 해? 시발, 이런 기회가 흔한 줄 알아?”
“너 브로커 맞아?”
엄대협이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브로커 생활만 10년이다. 나보다 이 바닥 환하게 아는 사람이 있는 줄 알아?”
“그런 놈이 그걸 덥석 물어? 야, 누가 봐도 목마른 쪽은 칼덴이잖아.”
“뭐?”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주도권을 잡으려면 시간을 둬. 이렇게 바로 연락하지 않는다고.”
엄대협의 표정이 그제야 심각해졌다.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지른 건지 바로 파악한 것이다.
반태수는 그런 엄대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건 분명한 장점이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여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너무 들떠서 실수했군.”
“알면 됐어. 그래서 의뢰 내용은?”
“일단 만나자고 하네.”
반태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에 온 지 이제 사흘 째였다. 원래 세계로 언제쯤 돌아가야 할지도 정해둬야 한다. 이면세계에서 머무는 시간을 한정 없이 늘릴 수는 없다.
반태수는 이면세계가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떠올려봤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한데 지금은 좀 달랐다. 여기에는 자신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는 아마 유적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려면 당분간 칼덴과 함께 해야 한다.
“언제 만나기로 했어?”
“언제든. 미리 연락하고 회사로 가면 돼.”
“연락해.”
“정말? 지금 바로?”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엄대협이 환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왠지 계급이 몇 단계나 오른 기분이었다.
* * *
에딩턴은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앞에 앉은 반태수를 바라봤다.
반태수는 엄대협과는 달랐다.
자신이 내민 손을 냉큼 잡은 엄대협과 달리 반태수는 좀처럼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솔직히 장기 계약을 하는 것이 서로 안정적이고 좋지 않겠소?”
에딩턴이 다시 한 번 제안했다. 하지만 반태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사정이 있어서 한 군데 길게 머물지 못합니다. 일이 생길 때마다 계약하고 처리하지 않으면 일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렇게 말한 반태수가 눈을 번득이며 에딩턴을 쳐다봤다.
에딩턴은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정확한 정보를 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예상치 못한 뒤통수를 맞을 염려가 있어서.”
에딩턴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겪은 묘한 압박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전 의뢰에서 이쪽에서 준 정보의 미흡함 때문에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한 것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왠지 눈앞에 있는 저 반이라는 자를 속이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이번에 자네가 잡은 그 마법사, 메렌틸 제약 소속이었네.”
메렌틸 제약이라는 말에 반태수는 반사적으로 엄대협을 쳐다봤다. 거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예 없었으니까.
“크랙톤에서 두 번째로 큰 제약회사야.”
엄대협의 말에 반태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에딩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놈들이 이번 일을 저지른 이유도 알아냈네. 우릴 흡수하겠다는 거지.”
반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작 이런 일로 흡수가 됩니까? 여기도 만만치 않게 큰 회사 같은데.”
“보통이라면 안 되지. 하지만 이번에 경호팀의 공백이 생겼다는 게 문제일세.”
에딩턴은 답답한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놈들이 무력으로 무슨 짓을 벌이면 막기가 만만치 않게 되었으니까.”
그 부분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용병단도 많던데 그런 곳이랑 계약하면 되잖습니까.”
“그걸 메렌틸 놈들도 잘 알고 있다는 게 문제지. 이미 가능한 용병단들은 그놈들이 손을 써놨더군.”
칼덴 제약이 손을 내밀 수 있을 만한 용병단들이 전부 계약을 거절했다.
계약이 가능한 놈들은 믿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예를 들면 메렌틸 제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거나.
칼덴 제약은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만한 방법을 뽑아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가능성이 큰 것들 위주로 대응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나한테 주어진 임무는 포션 재료에 관한 걸세.”
메렌틸 제약이 힘을 써서 칼덴 제약을 압박할 수 있는 부분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당장 본사를 공격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폭력을 쓰는 건 훨씬 은밀해야 한다.
그 중 하나가 포션 재료의 수급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포션 재료는 대부분 도시 안에서 대량으로 재배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포션이 나오지 않는다.
대량 재배가 불가능한 필수 재료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전문 채집꾼들이 도시 밖으로 나가서 채집한다.
“메렌틸 놈들이 포션 재료를 가지고 작업을 한다면 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일세.”
에딩턴은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하나는 도시 안에 있는 대량 재배 시설을 박살 내는 것.”
두 번째 손가락이 접혔다.
“다음은 도시 밖에서 채집해야 하는 필수 재료의 수급을 방해하는 것.”
둘 다 대응하기 까다로웠다.
경호팀의 부재가 정말로 큰 공백이었다.
일단 대량 재배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남은 대부분의 경호원들을 박박 긁어서 배치했다.
거긴 다른 이사가 맡기로 했다니 신경을 꺼도 되고, 에딩턴이 맡은 부분은 필수 재료의 수급이었다.
반태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재료를 채집하는 능력자들의 수가 얼마나 됩니까?”
“총 몇 명인지는 모르고 대략 하루 평균 2천 명 정도가 채집 활동에 나가네.”
“많군요. 설마 그들을 전부 보호하거나 감시하겠다는 건 아니죠?”
에딩턴이 빙긋 웃었다.
“당연히 아닐세. 메렌틸도 그들을 직접 공략하지는 않을 걸세. 채집 활동에 이상이 생기면 그들 역시 곤란한 건 마찬가지니까.”
반태수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재료를 모아놓는 창고를 건드리겠군요.”
“그것 역시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건 재료의 운반일세.”
채집 활동을 하는 능력자들은 다들 각자의 소속이 있거나 개인 활동을 하지만, 그걸 매입해서 창고에 보관하는 건 각 제약회사들이 맡는다.
당연히 방비도 철저하다. 아무리 경호팀의 공백이 있더라도 말이다.
“보통 한 번에 열흘치 정도의 재료를 나르는데, 거기서 차질이 몇 번만 빚어져도 문제가 심각해지니까.”
경호팀이 멀쩡했으면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까지 손이 닿지 않는다.
반태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간이 너무 길었다.
열흘에 한 번 움직이는 차량을 몇 번이나 보호하려면 한 달이 훌쩍 넘어간다.
그동안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반태수가 에딩턴을 보며 말했다.
“지키는 것보다는 공격해서 빼앗는 쪽이 더 쉽지 않겠습니까?”
에딩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하지만 이내 회의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더 어려울지도 모르네. 메렌틸에는 마법사가 둘이나 있으니까.”
아마 하나는 습격에 다른 하나는 방어에 참여할 것이다.
반태수의 눈이 반짝였다.
“이번에 잡은 마법사보다 더 위에 있습니까?”
“훨씬.”
에딩턴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전에 말하지 않았나. 롤프 헬턴은 이제 막 입문한 애송이라고. 그 둘은 무려 3서클 마법사라네.”
‘서클?’ 반태수는 새로운 개념에 눈을 번득였다. 아마 그 원통 모양의 어설픈 코어가 세 개 있으면 3서클이 되는 거 아닐까?
꼭 만나서 싸워보고 싶었다.
3서클이라는 것이 어떤 코어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고, 그럼 어느 정도로 마력을 잘 다룰 수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문제고, 그쪽 차량을 탈취하면 이쪽에서 재료를 빼앗겨도 별 상관없는 거 맞습니까?”
에딩턴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비슷한 재료들이니 그렇긴 하네. 하지만······.”
“설마 그쪽이랑 같은 날 운송하는 건 아니죠?”
에딩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모레에 메렌틸에서 재료를 운송할 걸세. 우린 그 다음 날이고.”
반태수가 씨익 웃었다.
“잘 됐네요. 먼저 치고 흔적을 지우면 우리가 했다는 것도 모를 테니까.”
에딩턴은 굉장히 불안했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알지만, 과연 저게 가능하긴 할까?
대충 계획이 나왔다고 여긴 반태수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메렌틸인지 뭔지, 수단 방법을 안 가리는 모양인데 신기하네요. 보통 그러면 1등을 끌어내리던데. 솔직히 여길 합병하는 것보다 1등 쪽에 사고 몇 번 터지는 게 훨씬 간단하지 않습니까?”
에딩턴이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 웃었다.
“1등은 못 건드리니까 당연하지 않나.”
반태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1등을 못 건드리다니, 거긴 뭐가 다른가?
옆에서 끼어들 틈이 없어 얌전히 듣고만 있던 엄대협이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퍽퍽 치며 말했다.
“아오, 거긴 5대 가문 소유잖아.”
반태수는 또 모르는 것이 나왔지만, 왠지 이번엔 그걸 티내선 안 될 것 같아 그저 픽 웃기만 했다.
‘5대 가문? 이건 또 뭐지?’
엄대협은 한 건 잡았다는 듯 신나서 말을 이었다.
“하여간 이거 가만 보면 허당이라니까. 넌, 나 없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반태수는 엄대협의 말을 대충 흘렸다.
자신의 필요성을 열심히 어필하고 싶은 모양인데, 사실 저렇게 하지 않아도 당분간 엄대협을 버릴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이면세계가 아닌 원래 세계에 적을 둔 사람이다.
그러니 자신이 없을 때도 이면세계의 일이 원활히 돌아가도록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다만 엄대협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가 문제였다. 능력이 없다면 귀찮음을 감수하고 새 사람을 구해야 할 테니까.
“아무튼 관련 정보만 주면 알아서 하겠습니다.”
“운송 일자와 경로, 그리고 경호 인력에 대한 정보를 바로 보내주겠네.”
그리고 변동 사항이 있을 때마다 추가로 정보를 보내주기로 했다.
의뢰금은 3억 겔을 기본으로, 임무를 어떤 식으로 성공했는지에 따라 추가하기로 했다.
그리고 반태수는 그 추가 보수를 마도구로 받길 원했다.
* * *
계약을 마치고 칼덴 제약에서 나온 반태수와 엄대협은 일단 가까운 식당으로 가서 밥부터 먹었다.
엄대협은 에딩턴과 마주 앉았던 일이 생각보다 힘들었는지 폭식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반면 반태수는 적당한 양을 먹은 다음 엄대협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으어, 이제 좀 살 것 같다.”
엄대협은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 엄대협에게 반태수가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5대 가문이 뭐야?”
엄대협은 순간 멍하니 반태수를 바라봤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몰라?”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엄대협이 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모른다고? 세계를 지배하는 다섯 가문을?”
“세계를 지배한다고?”
엄대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오래 전부터. 언제부터인지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모를걸?”
“대단한데?”
“당연하지. 이 도시를 다스리는 건 시정부야. 그런 시정부를 구성하는 건 투표를 통해 선택된 사람들이고. 하지만 이 도시의 진짜 지배자는 다섯 가문 중 한 곳일 거야.”
“음모론 같은 건가?”
“음모론은 무슨. 실질적 지배자라니까. 도시의 주인이라고 그들이.”
“시민들이 그걸 인정해?”
“인정하고 말고 할 게 없어. 그게 진실이고 사실이니까. 다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거지.”
이면세계는 무수한 도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도시의 정점에 5대 가문이 존재한다.
5대 가문은 수많은 하위 가문을 통해 영향력과 지배력을 행사하고 서로 촘촘하게 엮여 있다.
서로 경쟁하지만 때로는 협력하기도 하면서 이 세상을 나눠서 지배한다.
5대 가문에 대한 얘기를 들은 반태수는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거대 마수를 5대 가문에서 처리해 주거든. 그래서 우리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거고.”
반태수는 더더욱 묘한 표정으로 엄대협을 쳐다봤다.
“5대 가문에는 진짜 괴물 같은 능력자들이 수두룩하거든.”
반태수는 엄대협이 말하는 진짜 괴물 같은 능력자들을 꼭 보고 싶었다.
그리고 5대 가문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