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 처음 만난 마법사 2 >
=========================
“아, 깜빡했네. 이건 챙겨야지.”
반태수는 창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돌아가 롤프가 차고 있던 팔찌와 신발을 벗겼다. 그리고 완드까지 챙겼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작은 가방을 하나 주워서 거기에 모두 담은 후에야 창고에서 나갔다.
이 마도구들을 분석하면 얼마나 즐거울지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창고 밖으로 나가면서 영역을 확대했다. 창고 쪽은 줄이고 앞쪽으로 영역을 쫙 확대하니 이쪽을 지켜보던 자들의 정보가 들어왔다.
창고에 있던 용병들과 비교하면 마력 량도 그렇고 마력의 유동도 그렇고 실력이 반도 안 되는 자들이었다.
만일 저들이 원래 여기 오기로 했던 능력자들이라면, 대체 뭘 믿고 저들에게 여길 맡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반태수는 엄대협이 숨어 있는 건물로 향했다.
그때 지켜보던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었는데, 한 명은 곧장 반태수에게로, 다른 한 명은 엄대협이 들어간 건물로 향했다.
반태수는 굳이 그들의 움직임을 막지 않고 그냥 내버려 뒀다.
저들의 정체를 대충 짐작은 하지만, 아직 확실치는 않다. 그러니 저들로 인해 생길지도 모를 변수를 미리 제거하는 것이 낫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다. 창고에 있는 세 사람도 살려뒀는데, 칼덴에서 고용한 용병일지도 모를 놈들을 굳이 왜 죽이겠는가.
반태수가 채 몇 걸음 걷지도 않았을 때, 사내 한 명이 도착했다.
사내는 다짜고짜 물었다.
“저 안은 어떻게 되었나?”
반태수가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기울였다. 이건 또 뭐지?
“내가 그걸 왜 말해줘야 하는데?”
반태수는 마치 상급자라도 되는 양 말하는 사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야 내가 제대로 뒤처리를 할 것 아닌가. 분위기를 보니까 도망치는 건 아닌 듯하고, 안에 있던 놈들, 죽였나?”
반태수가 담담히 물었다.
“한패?”
사내가 피식 웃었다.
“난 칼덴에서 나온 사람이야. 정확히 따지면 너랑 한패지. 그리고 네 동료의 안위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
“협상이든 협박이든 하나만 해라. 아무튼 내가 그 말을 믿을 이유나 증거가 있나?”
“뭐?”
사내의 눈이 살짝 험악해졌다. 사실 증거 따위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나서면 이 애송이 능력자가 알아서 길 거라 판단했을 뿐이다.
“난 칼덴이 고용한 용병이 아니라, 칼덴 소속이야. 협조하는 게 좋을 텐데?”
반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했다.”
그 말과 동시에 사내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는 휘청거리다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쿵!
무릎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사내는 이를 악물고 핏발 선 눈으로 고개를 들어 반태수를 노려봤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세 시간 정도만 그러고 있어.”
반태수가 어느새 만든 마력의 못을 사내의 몸 곳곳에 박았다. 그 중에는 목소리를 막는 지점도 있었다.
사내는 당황했다. 무릎을 꿇은 채로 몸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게다가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공포가 사내를 잠식했다.
반태수는 그런 사내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려 주고는 그를 지나쳐 엄대협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잠시 후, 건물 안에서도 쿵 소리가 울렸다. 사내는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의 동료도 똑같은 꼴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 *
엄대협이 불안한 표정으로 반태수를 바라봤다.
“야, 진짜 이래도 되는 거야?”
“뭐가?”
“저 사람, 아무리 봐도 칼덴 쪽인데, 굳이 저렇게까지······.”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밖에 있는 놈은 나한테 협박까지 했고.”
“전화 한 통이면 알아볼 수 있는데?”
“기다려. 나도 정리 좀 하자. 넌 저기 창고 가서 뭐 건질 거 없는지부터 파악해. 레시피는 내가 챙겼으니까 그렇게 알고. 그리고 칼덴에 바로 연락하지도 말고.”
엄대협은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반태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대체 저기에 마법사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그냥.”
“그냥? 말해주기 싫으면 싫다고 해.”
“잘 알면서 왜 물어봐?”
엄대협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창고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거기서 뭔가 챙길 게 있으면 알아서 챙길 것이다.
반태수는 건물 입구에 있는 낮은 계단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품에서 레시피를 꺼냈다.
레시피는 황금색 막대였는데, 표면에 굉장히 복잡한 마법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데이터가 들어있는 메모리카드 정도로 여겼었다. 한데 막상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건 마도구였다.
표면에 새겨진 마법진은 술식의 핵심을 가리기 위한 더미 보안 마법이었다.
일단 이걸 뚫어야 제대로 된 보안 마법에 도달할 수 있었다.
더미 보안 마법은 겉으로는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단순한 술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제는 보안 구조가 어마어마한 양의 단순 술식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차근차근 뚫으려면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린다는 점이었다.
이건 보안 술식을 단번에 여는 키워드도 없었다. 애초에 이 레시피를 쓰려면 만든 사람조차 차근차근 더미 보안 마법을 뚫어야만 한다.
열쇠를 쓰는 건 아마 그 다음 단계이리라.
“생각보다 재밌는 보안 마법이네.”
반태수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맴돌았다. 이런 걸 뚫는다고 생각하니 마법사의 피가 끓어올랐다.
여기에 쓰인 술식의 종류는 고작 세 개뿐이었다.
하지만 그 세 가지 술식이 사방팔방 복잡하고 광범위하게 얽혀 있었다.
반태수는 여기 쓰인 단순한 술식을 그림으로 대체했다.
각각의 술식을 그저 단순한 그림 하나로 표현하면 모든 설계 자체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간단해진다.
‘나라면 이렇게 같은 술식을 단순 복제해서 쓰지 않고 각 술식마다 몇 가지 변형을 적용했을 텐데.’
그럼 이 정도로 단순한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정작 쓰는 사람도 더미를 풀기 어렵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단순하게 만들어 전체적인 설계도를 파악하고 나니, 그걸 뚫을 간단한 방법이 몇 가지 만들어졌다.
모든 구조를 파악했으니 모든 술식을 동시에 풀어 버리면 된다.
이걸 설계한 사람이 들었다면 뜨악할 정도로 놀랄 일이었지만, 반태수는 별 거 아닌 것처럼 더미 보안 마법을 풀어 버렸다.
더미를 헤치고 나니, 진짜 보안 마법이 나타났다.
이건 정확히 맞물리는 열쇠가 있어야 풀어낼 수 있는 잠금 마법이었다.
반태수의 입가에 더욱 진한 미소가 맺혔다.
마치 퍼즐을 풀듯이 반태수는 차근차근 보안 마법을 해체해 나갔다.
그리고 결국 모든 보안 마법을 뚫고 레시피에 닿았다.
포션 제작 과정과 원리가 마법에 의해 입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거 하나면 누구든 포션을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세심한 기록이었다.
반태수는 단숨에 그 모든 과정과 재료를 이해하고 암기했다.
원리 자체가 기록되어 있기에 반태수가 모르는 재료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대체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면세계에서 그냥 구해도 되고.
물론 이 포션을 만들지 말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레시피를 모두 확인했을 때,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창고에서 엄대협이 나왔다.
표정이 상당히 안 좋았다.
“에이씨, 먹을 거 하나도 없네.”
그래도 마법사가 있어서 뭐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 개털이었다. 심지어 꿍쳐놓은 돈도 없었다.
얻은 거라고는 그들이 갖고 있던 비행기표 세 장뿐이었다.
엄대협은 투덜거리며 반태수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무것도 없어. 개털이야!”
반태수는 개의치 않았다. 엄대협은 아무것도 못 얻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으니까.
마도구도 잔뜩 얻었고, 포션 레시피도 얻었으니까.
“이제 연락해.”
반태수의 말에 엄대협이 물었다.
“뭐라고 할까? 싹 다 얘기해? 마법사까지?”
“당연하지. 뭘 감추고 말고 할 게 있긴 해?”
엄대협은 잠시 반태수를 바라봤다.
실력은 확실히 검증했다. 마력 넘치는 용병 둘에 마법사까지 끼어있는 일당을 혼자서 잡아냈으니까.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못 봤지만 말이다.
“진짜 한다?”
반태수는 대꾸도 하지 않고 손을 휙휙 내저었다. 엄대협은 핸드폰을 꺼내 에딩턴에게 바로 연락을 했다.
* * *
에딩턴은 방금 들은 비서의 보고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갈 뻔했다.
“뭐? 함정? 전멸? 그게 무슨 소리야!”
“경호팀 전원이 폭발에 휘말렸습니다.”
“폭탄에 전멸했다고? 우리 경호팀이?”
“작정하고 준비한 함정이었습니다. 마도구와 연결된 폭발이었다고 합니다.”
에딩턴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럼 레시피는? 롤프 그놈은?”
“조사팀의 말에 따르면 그곳에 있는 시체 중에는 없다고 합니다. 거기 있던 자들은 전부 미끼였습니다.”
에딩턴은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다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완벽하게 당했군.”
너무 허탈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비서는 에딩턴의 눈치를 살피느라 몸을 살짝 움츠린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다른 타겟들은?”
비서가 머뭇머뭇 하다가 대답했다.
“전부 당했습니다.”
“하! 어이가 없군.”
허탈했다. 당연히 성공할 거라 여겼는데, 오히려 롤프 그놈의 계략에 넘어갔다니.
“이놈 다른 도시로 도망칠 생각이야. 공항에 사람을 보내야겠어.”
“여력이 없습니다.”
비서의 말에 에딩턴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경호팀이 문제로군.”
칼덴의 경호팀은 다양한 일을 한다. 그리고 경호팀을 조율하는 건 비서실이다.
현재 비서실은 전멸한 경호팀을 대체할 방법을 모색하느라 모든 여력을 쏟는 중이었다.
“그래도 그놈은 잡아야 돼. 당장 의뢰를 맡길 수 있을 만한 용병단을 섭외해.”
비서가 막 대답을 하려는데 에딩턴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지이이잉!
테이블 위에서 부르르 떠는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에딩턴의 얼굴에 신경질이 돋아났다.
전화를 건 사람이 엄대협이었기 때문이다.
이 거지같은 상황에 엄대협의 쓸데없는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이 의뢰를 맡겼는데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에딩턴은 전화를 받았다.
“후우. 그래, 무슨 일이지? 일이 다 끝난 건가? 사실 지금 내가 전화를 받을 상황도 기분도 아니니 보고할 거 있으면 얼른 해.”
그렇게 짜증을 담아 얘기했지만, 들려온 엄대협의 말에 또 한 번 정신이 위로 휙 날아갔다.
“뭐, 뭐라고? 아무래도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뭐가 어떻게 됐다고?”
-여기 상황 끝났습니다. 마법사가 여기 있었습니다. 그······ 롤프 헬턴? 이름이 그랬죠? 레시피도 확보했습니다. 용병 둘도 잡았고.
“로, 롤프 그놈이 거기 있었어? 그걸 잡았다고? 네가?”
-아뇨. 제가 아니라 반이 잡았습니다. 제가 실력자 하나 엮었다고 말씀 드렸죠? 그 사람입니다.
“다, 당장 이리로! 당장 회사로 와!”
-여기 있는 놈들은 어쩝니까? 그냥 방치합니까?
“아니! 그러면 안 되지! 내가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지. 인계하고 바로 회사로 와! 레시피 갖고 오는 거 잊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에딩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그나마 숨구멍 하나 뚫었군.”
경호팀이 몰살당한 건 굉장한 실책이었지만, 그건 자신만의 일이 아니니 책임을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롤프 헬턴을 잡고 레시피를 확보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공이었다.
자신이 의뢰한 능력자가 해결했으니까.
롤프 헬턴이 있었다면 그쪽으로 보낸 녀석들로는 결코 그놈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용병까지 두 놈이 있다고 했다. 어떤 식으로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데, 그걸 뒤집었다.
딴 놈들은 몰라도 자신은 살았다.
에딩턴은 소파에 축 늘어진 채 엄대협이 오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