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 칼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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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엄대협은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칼덴 제약의 이사였다.
칼덴 제약은 이 도시, 크랙톤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제약회사였다.
크랙톤은 인구 2천만의 거대 도시였다. 도시 안에 있는 제약회사의 수만 해도 20개가 훌쩍 넘는다.
그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니 위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칼덴 제약의 이사, 에딩턴은 거만한 표정으로 소파에 기대 엄대협을 깔아봤다.
“앉지.”
엄대협이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에딩턴은 좀 의아했다. 설마 정말로 엄대협이 자신에게 연락할 줄은 몰랐다.
아주 작은 인연이 있었다. 엄대협의 아버지와 관계된 일이었다.
작은 도움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작은 변화가 에딩턴을 칼덴 제약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해 주었다.
그 인연이 엄대협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아주 오래전 지나가듯 엄대협에게 한 번 연락하라고 말했다. 당연히 연락처도 주었고.
하지만 엄대협이 연락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바닥에서 브로커로 전전하는 엄대협이 자신과 연결될 일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데 오늘 난데없이 연락이 왔고, 이렇게 자신과 마주앉게 되었다.
“뭐, 어려운 일이라도 있나? 참고로 내가 힘써줄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작을 거야.”
에딩턴은 미리 한 발 뒤로 뺐다. 이래야 나중에 생색내기도 좋다.
“자, 이제 말해보게. 무슨 일이지?”
엄대협은 에딩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쓸 만한 실력을 가진 프리랜서 능력자를 한 명 엮었습니다.”
에딩턴은 굳이 뒷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맡길 일거리 없나 알아보러 왔군?”
“예. 맞습니다. 칼덴 제약이라면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할 일이야 넘쳐나지. 사람이 모자라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데려다 쓸 수는 없어. 어그러지면 곤란한 일이 수두룩해. 그럴 바에는 차라리 방치하는 게 낫지.”
“실력은 확실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엄대협은 눈을 빛내며 에딩턴을 바라봤다. 저 말이 나왔다는 건 기회를 잡았다는 뜻이다.
“롤프 헬턴이라는 마법사가 있어.”
에딩턴은 그렇게 말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불쾌하다는 듯이.
마법사라는 말에 엄대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마법사라니, 설마 정말로 마법사와 싸우라는 뜻인가?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어. 그저 마법에 갓 눈을 뜬 애송이 마법사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엄대협의 눈에 어린 놀람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어설퍼도 마법사는 마법사, 능력자보다 훨씬 위험한 족속이었다.
“이번에 우리 신약 개발부에서 새로운 포션 레시피를 개발했는데, 그걸 롤프 그놈이 빼돌려서 들고 도망쳤지.”
에딩턴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법사가 없어서 애송이임에도 불구하고 받아줬는데,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았지. 우리가 얼마나 화끈하게 대우해줬는데. 한데 알고 보니 애초부터 그걸 노리고 들어온 놈이었어.”
“그럼 이미 추적 중이겠군요.”
“당연하지. 아주 교활한 놈이야. 썩 괜찮은 능력자들을 여럿 포섭해서 호위도 하고 미끼로도 써먹고. 하여튼 그런 상황이지.”
“그 마법사를 처리하는 의뢰입니까?”
에딩턴의 입가에 살짝 비웃음이 어렸다.
“에이, 그건 아니지. 아무리 애송이라도 마법사인데 그걸 어설픈 프리랜서에게 맡길 수야 있나. 내가 원하는 건 롤프 그놈이 고용한 능력자들이야. 일단 확인하기로는 용병이었는데, 어쩌면 처음부터 한패였을 수도 있어.”
에딩턴은 엄대협의 표정을 확인했다. 여기까지 말했는데 불안한 표정이면 없던 일로 하는 게 나았으니까.
한데 엄대협은 의외로 담담했다.
“용병이 몇이나 됩니까?”
“일단 열. 네가 맡을 건 그 중 두 명이야.”
“두 명 말입니까?”
“두 명씩 짝지어서 움직이고 있으니까. 두 명은 맡아야지.”
에딩턴을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롤프의 위치는 이미 파악했어. 그쪽은 우리 회사 경호팀이 알아서 할 거야. 문제는 나머지 놈들이지.”
“마법사만 잡으면 끝나는 거 아닙니까?”
“레시피를 딴 놈이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아······!”
엄대협은 이제야 이 의뢰의 의미를 파악했다. 레시피가 딴 곳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레시피에 복사방지 마법 처리를 해서 당분간은 딴 데로 퍼져 나갈 염려는 없어. 그럴 틈을 안 주려고 우리가 계속 몰아쳤거든.”
그렇다고 레시피가 그거 하나뿐인 것은 아니었다. 예비로 보관하던 레시피가 있으니까.
아니, 더 정확히는 예비 보관 레시피가 털린 것이다.
“아직 특허 등록도 안 한 레시피야. 서둘러 정리해야 하지.”
“맡겠습니다.”
엄대협의 대답에 에딩턴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을 들고 작전 개요를 정리한 문서를 엄대협에게 보내주었다.
“시간 없으니까 즉시 움직여.”
“예.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엄대협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의뢰비 협상 같은 건 할 생각도 못했다. 그저 이렇게 의뢰를 받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에딩턴은 엄대협이 나가자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다섯 번째 팀, 잠시 대기시켜. 아니, 가만히 있으라는 건 아니고, 테스트 삼아 다른 놈한테 맡겼으니까, 감시하다가 안 될 것 같으면 끼어들라고 해.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확인해보고.”
제대로 검증도 안 된 프리랜서 능력자를 어떻게 믿고 이런 중요한 일을 맡기겠는가.
애초에 이건 엄대협에게 기회를 열어주기 위한 일일 뿐이다.
약간 귀찮아졌지만, 이 일이 잘 해결된다면 새로운 일꾼을 얻을 수 있으니 나름 괜찮았다.
능력만 잘 확인해도 나중에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다. 물론 기준을 넘어선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 * *
반태수는 엄대협과 함께 용병들이 숨어 있다는 장소로 향했다.
“저기, 난 꼭 같이 안 가도 되지 않을까?”
반태수가 대답하지 않자 엄대협은 답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할 일이 좀 있어서 이제 가볼까 하는데.”
슬그머니 뒤로 빠지려던 엄대협의 어깨를 반태수가 덥석 잡았다.
“길 안내 해야지.”
“아니, 무슨 애도 아니고 내가 길까지 찾아줘야 돼?”
반태수는 대답 대신 가만히 쳐다봤다.
엄대협은 그 시선에서부터 느껴지는 압박감에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알았다, 알았어. 내가 가야지. 대신 나 내버려두면 안 된다. 거기 있는 애들이 손가락 한 번 까딱 하면 나 같은 건 그냥 꽥이야. 알지?”
“지금 들어서 알게 됐으니까, 이제 가자.”
엄대협의 얼굴에 불안감이 잔뜩 드리워졌다.
“아이씨, 애초에 시작하지를 말았어야 했어.”
두 사람은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목적지로 향했다.
걸어서 이동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차로 이동해도 40분 이상 가야 하는 거리였으니까.
엄대협은 운전을 하고 반태수는 그 옆에서 엄대협이 보내준 문서를 확인했다.
“근데 칼덴이라는 회사, 크긴 한가?”
“크지. 인구 2천만이나 되는 도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제약회사니까.”
“인구가 2천만이나 돼?”
“그보다 좀 더 많다고 봐야지. 아니, 여기 살면서 인구도 몰라?”
반태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인구 좀 모를 수도 있지. 그런 거 알아낼 시간에 마법 술식 하나 더 짜는 게 이득 아닌가.
엄대협이 입을 다문 반태수를 힐끗 바라봤다.
“그런데 넌 어디서 지내냐? 전에도 보니까 그냥 사라졌던데.”
“먼 곳.”
“멀어? 설마 다른 도시에서 온 거야?”
“뭐······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
서울에서 왔으니 다른 도시에서 온 건 맞다. 먼 곳이기도 하고.
“다른 도시 어디? 여기서 제일 가까운 도시가······ 서메롯?”
반태수는 대답대신 물었다.
“거긴 거리가 얼마나 돼?”
“거리? 글쎄? 크랙톤이랑 서메롯 사이가 아마······ 한 120킬로쯤 될 걸?”
반태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스케일이 훨씬 컸다.
가까운 도시가 120킬로라니. 그럼 그 사이에는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도시를 왜 그렇게 멀리 지은 거야?”
엄대협이 피식 웃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도시를 누가 어떻게 지었는지 알게 뭐야.”
“아니, 그래도 120킬로면 너무 멀지 않아? 한 40킬로 정도만 떨어져 있어도 될 거 같은데.”
“어림도 없는 소리. 그 사이에 마수 소굴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이상 현상을 일으키는 지역도 수두룩하고. 도시 밖은 지옥이야.”
“그럼 다른 도시로는 아예 못 가는 건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엄대협이 운전 중이라는 것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려 멍하니 반태수를 바라봤다.
“너 무슨 어디 딴 세상에서 살다가 오기라도 한 거야? 그런 당연한 걸 왜 물어?”
반태수는 속으로 아차 싶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거 모르면 죽는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열 살 먹은 애도 아는 걸 물어보니까 그러지.”
“야야, 앞에 봐. 나 보면서 운전하지 말고.”
엄대협은 그제야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다행히 차가 별로 없어서 사고는 나지 않았다.
“당연히 비행기로 이동하지.”
“아······ 비행기. 하늘은 의외로 안전한가봐?”
“뭐······ 비교적? 날아다니는 마수가 없는 건 아닌데, 비행기는 그보다 훨씬 높은 곳을 지나가니까.”
엄대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진짜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내가 외진 데 틀어박혀서 공부만 해서 그래. 나 전화기도 없었던 거 알지?”
“뭐······ 그야 그렇지.”
“근데 언제 도착해? 아직 멀었나?”
“마침 거의 다 왔다. 조금만 기다려.”
엄대협은 5분쯤 더 가다가 적당한 곳에 차를 댔다.
“아우, 여긴 변두리에서도 특히 바깥쪽이라 진짜 오기 싫은 곳인데.”
도시의 치안 수준은 바깥쪽으로 향할수록 낮아진다.
변두리 쪽의 치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기는 그 변두리 중에서도 바깥 쪽, 그러니까 힘이 없으면 그냥 당하는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아까 문서는 확인했지?”
“그래. 의뢰금이 고작 천만 겔이라는 것도 잘 봤다.”
“야, 의뢰금이 중요해? 연줄 만드는 게 중요하지. 이번 일 잘 해결하면 의뢰금이 껑충 뛸 테니까 걱정 말고 일이나 확실히 해.”
천만 겔이 작은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끼 일을 할 때도 같은 액수를 받았다. 아니, 그때는 수수료를 뗐으니 실제 의뢰금은 아마 2천만 겔이었을 것이다.
더 힘든 의뢰를 반값에 받아왔으니 어이가 없었다.
물론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직 반태수는 돈이 필요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미리미리 돈을 잘 챙겨둬야 한다.
“다음 의뢰는 내가 잘 지켜보겠어.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려.”
반태수의 말에 엄대협이 인상을 팍 썼다.
“다음도 하려고? 그냥 이번만 하고 말면 안 될까?”
“되겠냐.”
엄대협은 포기했다는 듯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젠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그러니까 저 창고에 그놈들이 있다는 거지?”
“그래. 뭐, 마법사 빼고는 죽이지 말라는 얘기가 없으니 편하게 해. 여긴 마법사도 없잖아. 근데······ 너 진짜 할 수 있는 거 맞지?”
“걱정 마셔.”
반태수는 그렇게 말하고 일단 영역화부터 펼쳤다. 마력이 정보수집 패턴을 증식하면서 창고를 향해 쭉쭉 나아갔다.
“어?”
반태수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엄대협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뭐가 이상해?”
“안에 두 놈이 아니라 세 놈인데?”
“뭐?”
반태수는 고개를 몇 차례 갸웃거렸다.
“그리고 확실치는 않은데······ 그 중 한 놈이 마법사야.”
“뭐?”
엄대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