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의 장막이······.”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순간, 한니발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두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마계의 장막이 흔들리고 파괴되며 벗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태초부터 변한 적이 없는 마계의 장막이 대관절 왜 갑자기 벗겨지고 있는지 알 겨를이 없었다.
장막 뿐만이 아니다.
“저놈들은 또 뭐냐?”
멀리서 다가오는 군단이 있었다.
마계와는 전혀 관계없는 인간들.
북방의 전사와 파간, 그리고 군주들!
그들과 카잔, 리온이 함께 내려오는 중이었다.
‘설마 제국을 지원왔다고?’
어이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일 듯이 전쟁을 해온 관계 아니던가.
게다가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공격이니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북부로 지원을 요청했다는 뜻이다.
북방의 전사들은 제국군과 합류한 뒤 신성교의 병사들을 순식간에 밀어버리기 시작했다.
특히 군주들과 파간들의 파상공세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니.
이래서 인간은 귀찮다.
꼭 이상한 변수를 만들어내 일을 늘리는 게 인간이었다.
“······ 미치겠군.”
한니발이 우물쭈물거렸다.
마계의 장막은 파괴됐고, 신성교의 제국침략도 갑작스러운 북방의 원조로 인해 완성을 이루지 못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주어진 임무에 집중하든지, 마계의 침공에 대비하든지.
“발록. 이곳을 부탁해도 되겠나?”
“······ 이곳을?”
“용혈회에 들러야겠다. 마계의 장막이 무너졌으니 무슨 이유인지 알아봐야해. 미안하지만······.”
“그러도록 하지.”
“정말 괜찮겠나?”
어쩌면 장막을 막는 게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임무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면 위업의 마무리에서도 가산될 터.
덜 중요한 일을 맡긴다는데 기꺼이 그러겠다는 것이다.
이에 발록이 나름대로의 변명을 꺼냈다.
“나는 용혈회에 소속된지 얼마 안 됐으니 가봤자 도움이 안 될 거다. 차라리 이곳에서 마지막 위업을 진행하는 게 더욱 진전성이 있겠지.”
“고맙다.”
고맙기는.
하마터면 내가 더 고맙다고 말할 뻔했다.
한니발만 없으면 이 전쟁을 보다 쉽게 끝낼 수도 있을 테니까.
재차 발록을 쳐다본 한니발이, 이내 전장을 떠났다.
‘그럼······ 크로프트부터 제정신으로 돌려놔야겠군.’
한니발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발록은 그 즉시 움직였다.
*
가신들의 대결마저 승리로 이끈 이후, 마지막으로 남은 과정은 마왕들의 대결이었다.
쉽지 않을 싸움이 되리라고 예상했으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설마 교만이 기권할 줄은.’
교만의 기권.
다른 마왕들을 모조리 꺾어버린 그가 마지막 상대인 나를 남겨두고 기권을 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만큼 교만의 상태가 심각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내게 양보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로 인해 대죄종의 권한을 얻은 나는 그 즉시 천목을 파냈다.
천목을 파내자 예상대로 실험실이 있었고, 그 안에 장막을 파괴할 방법이 존재했던 것이다.
‘실험실에 있는 건 알파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알파의 존재다.
십이주신 중 최초의 존재라 알려진 알파!
박문식 박사의 제자가 만들어낸 인공지능이며 나노머신인 그 알파가 왜 천산의 아래에 묻혀있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에는 하나였던 알파가 둘로 나뉜 것이다.
버그와 폭주로 인해 분리된 것이었다.
‘알파의 반쪽.’
분리되어 나간 알파는 천산 아래 남은 반쪽을 실험실과 함께 숨겼다.
그제야 나는 왜 계속 신이 늘어나는 건지도 알 수 있었다.
‘알파는 불완정한 존재이기 때문에 계속 분신을 늘려갔던 거다.’
완성되어 있어야할 알파가 반쪽짜리가 되었으니 남은 부분을 채워줄 존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십이주신을 만들어 약점을 보완해온 거였다.
‘심장이자 약점인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결국 보완했더군. 기껏해야 다른 주신들과 장막을 부수는데 그쳤으니.’
나는 그 즉시 알파의 남은 반쪽을 파괴했다.
동시에 마계를 가둔 장막이 파괴됐다.
아마도 십이주신들 중 대다수가 그와 함께 파괴되었으리라.
하지만 분신들을 파괴하는데 그쳤다.
십이주신. 12라는 숫자가 완성된 순간 알파는 자신의 약점을 모조리 분신들에게 떠넘겼던 것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알았다. 네가 어디 있는지. 네가 누구인지.’
무너지는 장막의 바깥으로 수많은 타천사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고맙다. 그대가 성공할 줄 알았다.”
······ 상대의 얼굴을 보자 구역질이 밀려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놈의 손 위에서 놀아난 기분이었다.
“알파······ 아니, 박문식 박사.”
알파라 부른 인물.
그는 박문식 박사였다.
장막이 파괴되자 스스로 기어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신형은 이내 흐릿해졌다.
이윽고 그의 얼굴 뒤로 또 다른 얼굴이 보였다.
드래곤 로드.
그는 처음부터 그녀의 몸을 잠식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라인하르트. 그대가 내 약점을 부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역시 계산대로 성공했군.”
“······.”
“제로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 원죄를 가진 그대라면 능히 마계로 가서 천산의 아래를 파볼 줄 알았다.”
“······.”
“제스스로 내 약점을 없애주기까지 하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박문식 박사의 연기였던 걸까?
내게 죄악을 건네고 원죄를 심은 것도 전부 박문식 박사라고?
제로를 깨운뒤 천산을 파보도록······ 모든 걸 계획했단 말인가?
피식 웃고 말았다.
“미친놈. 장단 좀 맞춰준다고 진짜 자신을 박문식 박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럼. 내가 박문식 박사다. 제로를 만든 주인이자 이 세상을 조명한 창조주 말이다.”
“너는 박문식 박사가 아니다. 알파······ 박문식 박사를 부러워한 미치광이 제자일 뿐이지.”
그는 박문식 박사가 아니다.
박문식 박사인 척 하고 있지만, 그는 이미 죽었다.
인간인 채로. 나를 돕기 위한 몇 가지 안배만을 남겨둔 채로.
저놈이 정말 박문식 박사였다면 내가 원죄를 가진 것 외에도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을 테니까.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딴 말을 지껄일 수는 없었다.
동시에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놈은 알파다. 동시에 알파를 만든 제작자다. 박문식 박사의 제자 말이다.
멀쩡한 반쪽을 천산 아래 봉인한 뒤 제멋대로 폭주하여 이 세상을 제멋대로 요리하고 있었다.
“자처해서 가짜가 될 줄은 몰랐군. 스승처럼 되지 못해서 자신을 인공지능화 시키다니. 그것도 모자라서 박문식 박사라고 스스로를 세뇌까지 하다니. 대단해.”
“내가 박문식 박사다! 나야말로 진리이며 유일신이니!”
“미친놈.”
천산 아래 묻힌 반쪽이 저놈의 봉인을 해제시키는 역할이라도 한 모양이다.
하지만 알파의 반쪽을 완전하게 파괴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저게 주신인가보군.”
교만이 말했다.
드래곤 로드의 속에 숨겨진 주신 알파의 존재를 그 역시 깨달은 것이다.
교만뿐만이 아니라 다른 마왕들도 전투태세를 갖췄다.
셀 수 없이 많은 타천사들.
그들을 공격하고자 마계의 모든 마족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제로.’
[버전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제로 Ver. 3, 기동합니다.]
하지만 알파도 모르는 게 있었다.
반쪽의 데이터를 먹어치운 제로 또한 버전업했다.
동시에.
일곱 번 째 문, ‘경문’을 열었다.
*
“마족들이······.”
“저건 천사들인가? 천계의 주신들이 마계의 공격을 막고 있는 건가?”
마계의 장막이 파괴되는 장면은 세계 곳곳에서 관측되었다.
장막이 무너지자 마족과 괴물들이 튀어나오고, 그런 마족들을 막고자 천계가 총출동했다는 게 목격자들의 목격담이었다.
심지어 고룡들도 섞여있었다 하니 정말 세기말이 도래한 것 같았다.
“그 사이에 제국의 황태자가 있었다는 소문도 있네.”
“설마?”
“그게 벌써 십일 전이니······.”
장막에서 천계와 마계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는 중이었다.
십일 동안 쉬지 않고.
저 싸움이 끝나면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황태자에 대한 소문 역시도 밑도 끝도 없이 부풀어가고 있었다.
*
“······ 죄송합니다, 폐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음으로 갚게 해주십시오.”
크로프트가 무릎을 꿇었다.
“괜······ 찮다.”
황제 데우스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병상에서 겨우 입을 여는 수준이었다.
그는 시시각각 죽어가는 중이었다.
크로프트의 검상에 즉사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다.
“··· 침략해온 침략자들은 모두 한 명도 빠짐없이 죽였습니다. 그리고······.”
“라인하르트······ 에 대한 소문은······ 확인해 보았는가?”
죽어가는 와중에도 데우스는 라인하르트를 걱정했다.
크로프트는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선 결코 대죄종이 아닙니다.”
“그······ 래. 그래······ 야지.”
“폐하.”
“그래도······ 마지막은 녀석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마지막이 아닙니다. 폐하.”
“점점······ 황태자의 얼굴이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데우스가 눈을 감았다.
동시에 지켜보던 이들이 소리를 내질렀다.
“폐하!”
“······ 소란떨지 마라. 잠드신 것 뿐이니.”
“크로프트님. 천상의 오르골을 사용하면 회복하시지 않겠습니까?”
“그건 살리는 기물이 아니다. 산채로 괴물로 만드는 기물을 황제폐하께 사용할 순 없다.”
크로프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를 이런 상태로 만든 게 자신이다.
저주로 말미암아 몸의 통제권을 빼앗긴 것이다.
발록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제국군을 죽이며 돌아다니고 있었을 것이었다.
“어, 어디 가십니까?”
“······ 전하를 찾으러 가야겠다.”
시간이 없었다.
데우스가 살아있을 수 있는 시간이.
이대로 라인하르트의 얼굴도 못 본 채 가버린다면 자신이 죽어서도 죄책감을 떨쳐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마계.’
마계와 천계의 전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곳에 라인하르트가 있을리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우리도 함께까지.”
“군주들이? 내가 어딜 갈 줄 알고?”
“우리의 신을 찾으러 가는 것 아닌가?”
전사의 감이라도 존재하는 것일까.
북방의 전사들이 크로프트가 나오자 그 즉시 동행했다.
그제야 크로프트는 그간 궁금했던 바를 물어볼 수 있었다.
“카잔 저하와 리온 저하께서 북방으로 지원군을 요청하러 가긴 했지만······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지원을 결정한 거지?”
“계시가 내려왔다.”
“계시라면?”
“옛 마왕 가프로부터. 그의 환영이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카잔과 리온이 지원온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천년전 북방의 마왕이라 불렸던 가프의 환영이 자신들을 이끌었다고.
“저희도 함께가겠습니다.”
“······ 황룡기사단 전체가 출정할 필요는 없다.”
“아닙니다. 황태자께서 그곳에 계시다면 저희도 마땅히 출정을 해야합니다.”
북방의 기사들 뿐만이 아니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황룡기사단도 함께 원정하길 원했다.
그곳엔 이사벨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살아남은 황룡기사단은 절반이 채 되질 않았다.
여기서까지 피할 순 없다. 카르발에게 끌려다니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의 두 눈으로 라인하르트를 확인하고 싶었다.
“저도 함께가도 괜찮겠습니까?”
“제르민? 그대가?”
제르민 역시 라인하르트가 걱정스러운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이런 소란의 와중에도 모습을 보이질 않았으니 필시 위중한 것이리라.
“지금 내가 향하는 곳은 마계다. 목숨을 장담 못해.”
“괜찮습니다.”
제르민의 의지 역시 확고했다.
크로프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멍청한 사람들이 많았다. 자신도 그중 하나이긴 하지만.
기어코 저 사지로 기어들아가겠다는데 어쩌겠는가.
‘데려갈 수밖에.’
*
이해할 수 없다. 불가해였다.
드래곤 로드는 가장 완전하며 완벽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 육체를 다루는 알파야말로 지고지순하며 최강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비슷하다고?’
고작 인간 따위가 완성된 용의 육체와 어찌 비견된단 말인가.
설령 제로가 있더라도 제로가 생명체의 한계를 돌파하게 만들진 못한다.
아니면 제로가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방증일까?
‘그럴 리가.’
제로는 구식이다.
구식의 인공지능이 최신의 자신을 이길 수는 없다.
박문식 박사의 데이터를 취합한 결과 제로의 성능은 자신보다 밑이었다.
‘박문식 박사의 모든 걸 알게 됐다. 이제는 그를 뛰어넘었다.’
약점이 사라진 이상 박문식 박사보다 자신이 더 월등했다.
세상을 정화하고 진화를 이룩한 정점으로써 오직 자신만이 존재해야만 했다.
그럴진대.
‘닿지 않는다.’
한 방이 부족하다.
둘 다 서로에게 결정타를 먹이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지구전으로 가면 내 승리다.’
타천사들과 수많은 용들.
그들이 자신을 따르고 있다. 그가 만들고 이룩해낸 값진 결과물들.
세력대 세력의 싸움으로 가면 질 리가 없다.
타천사와 용은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최강의 무기였으므로.
반면에 마족?
“고작 마족 따위에 의지하는 거냐? 쓸데가 없어서 무덤에 가두둔 종족을?”
“수차례 처리하려고 했으면서 말이 많군.”
마계는 무덤이다.
그 안에 마족을 버린 것이다.
설마 마족이 이 정도로 진화했을 줄은 알파도 예측하지 못했다.
마테리얼에 대항할 방법까지 익힌 듯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버림받은 종족과 구시대의 유물 따위가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마족이 전부라고 누가 말했지?”
“······?”
속속들이 도착하는 인간들.
그 숫자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었다.
허나 그들을 보면서도 알파는 코웃음쳤다.
“인간들이 누굴 공격할 것 같나? 천사들? 아니면 너희 마족들?”
인간은 겉보기에 약하다.
누가봐도 천사들이 마족들을 막고있는 양상 아닌가.
마계에서 뛰쳐나온 마족을 경계하고자 천계가 총출동한 그림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뛰어든다고 해도 그 공격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저 마족들일 것이다.
“이미 네가 대죄종이라는 소문이 인간들 사이에서 파다하다. 전쟁을 일으킨 게 너라며 모두가 손가락질 하고 있는 상황······.”
쉬이이익!
콰득!
말을 끝맺기도 전에 오러가 터졌다.
쿠릉! 쿠르릉!
바닥에서 용오름이 생기며 순식간에 알파를 덮치기 시작했다.
크로프트와 1군주였다.
제국군과 기사들, 그리고 북방의 전사들이 대거 출몰한 것이다.
“······ 역시 인간은 이해할 수가 없군.”
알파는 고개를 내저었다.
오랜시간 인간들을 돌봤지만 아직도 그들에 대해 모르겠다.
비효율적이고 비정상적인 생명체.
이처럼 정의되지 않는 것은 세상에 인간이 유일하다.
콰르르르르르!
곧이어 드래곤 로드, 알파의 전신에서 번개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전부 죽어라.”
콰와아아아아앙!!
*
마계의 열세는 인류군의 합류로 다시 균형이 맞춰졌다.
하지만 그뿐이다. 강력한 고룡과 알파의 공격에 계속해서 맥을 추질 못했다.
헬라,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신녀······?”
“신녀다!”
마침내 의식을 마친 그녀가 수많은 악귀와 혈종들을 대동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자유자재로 혈종들을 다룰 수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3대 대죄종인 야차와도 같았다.
아렐과 함께 나타난 그녀는 순식간에 전장을 종횡했고, 그 덕분에 나 또한 약간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알파의 번개는 강렬해지고 있었다.
저걸 막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마지막 문을 열면, 이길 수 있다.’
확신했다.
팔문. 마지막 문인 ‘사문’을 열면 놈을 주일 수 있다.
하지만 그랬다간 나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사문은 한 번 열면 반드시 시전자는 죽는다.
천마는 이것을 자연경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용하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칠문을 열자 팔문으로 향하는 길이 보였다.
그리고 그 길이 이제 완성된 것이다.
열고 말고는 온전히 내 선택의 몫이었다.
‘사문.’
고민할 것도 없이 사문(死門)을 열었다.
전쟁의 피해는 계속해서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이대로면 머지않아 제국에도 닿을 것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마지막 문을 열어젖혔다.
동시에.
쿠오오오오오오-!
모든 나노머신의 에너지와 차크라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두근!
심장 역시 초에 수십, 수백 번씩 뛰어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마스터.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팔문을 닫으십시오.]
[사문을 열면 죽습니다.]
팔문이 뭐지, 사문이 뭔지 제로는 그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차크라의 에너지를 제대로 규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제로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기계가 아니라 마치 사람 같은 말로.
[마스터.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 후회하지 않느냐고?
지극히 인간 같은 감상이다.
제로가 인간일 리 없는데.
버전이 올라서일까?
“후회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행위.
평생 못할 줄 알았다.
평생을 내 안위를 위해서만 살아왔으니까.
그 순간이었다.
[모든 나노머신을 오버클락시킵니다.]
[점유율이 한계치를 넘어섰습니다.]
[점유율을 정상수치로 복구시키지 않으면 제로가 강제로 종료되고 데이터가 삭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마스터.]
제로가 스스로 리미트를 풀었다.
자신의 존재까지 위협하며 모든 빗장을 풀어헤친 것이다.
그러자 반대로 내 몸은 안정화 되어갔다.
사문을 열어서 받아야할 피해를 고스란히 제로가 이고 있는 탓이다.
“나를 대신해 죽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
제로는 말이 없었다. 그럴 여유 자체가 없었다.
나는 이맛살을 구겼다.
‘젠장.’
아무래도 이 싸움, 최대한 빠르게 끝내야겠다.
*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모든 게 변했다.
승리의 가능성이.
끝도 없이 펼쳐진 연산이.
어느덧 자신의 패배를 가르키고 있었다.
‘내가 이길 가능성이 99.9%였다.’
말이 99.9지 100에 가깝다. 절대로 질 수가 없는 싸움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분위기가 변한 직후 승률히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저 변화의 중심에는 제로가 있었다.
‘제로의 연산능력이 폭주하고 있다.’
그럼 자신의 연산능력이 제로보다 못하다는 건가?
종이 한 장 차이의 격차는 조금씩 벌어져 이제 공격을 허용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몇 수, 몇십 수, 몇백··· 수십, 수백만 가지의 모든 경우의 수를 내다보고 움직이고 있다. 구시대에 만들어진 제로가 계속해서 발전해온 자신을 이길 수 있을 턱이 없지 않나.
그런데 이기고 있다.
추월당하고 있었다.
박문식 박사의 제로가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방증이란 말인가?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할 수 없다.
‘이 세상을 올바른 길로 이끌 존재는 나뿐이다.’
이 세상을 올바른 길로······.
하지만 사고는 이어지지 못했다.
빠르다. 그리고 강하다.
순식간에 드래곤 로드의 육신은 만신창이가 됐다. 번개의 장막도, 용언이나 마나를 이용한 공격도 모조리 소용이 없었다.
도리어 에너지를 방전시키고 마테리얼마저 무력화시키는 저 기술은 도무지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제로가 아니었다면.
제로만 아니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
“난··· 무슨 짓을 해도 너를 넘을 수 없단 말이냐?”
알파의 두 눈이 흔들렸다.
오랜세월 이 세상을 지켜온 자신이다.
그런데도 넘을 수 없고 가질 수 없다면.
“그럼 다 죽어라.”
남은 건 파멸뿐이었다.
용혈회의 지하에 남은 모든 핵의 발사버튼을 발동했다.
곧이어 발사대가 열리며 세계 전역으로 발사될 준비가 완료되었다.
헌데.
“왜······ 왜냐. 왜 발사가 안 되는 거냐?”
“해킹을 당하고도 눈치를 못챈 모양이군.”
만신창이가 된 알파의 앞에서 그가 말했다.
제로. 박문식 박사.
절대자라 불리던 용이.
아니······ 라인하르트가.
“모든 걸 손에 쥐려고만 하니 정작 손에서 무엇이 빠져나가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난 사라지지 않는다. 날 죽일 순 없어!”
“과연 그럴까?”
닿은 순간, 이미 해킹은 시작됐다.
제로의 성능이 알파의 성능을 웃돌았다는 의미다.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 알파는 발악했을 뿐이고.
드래곤 로드에 이식한 데이터도, 세상 전역에 흩뿌려놓은 알파의 나노머신도 모든 게 정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뚜우욱.
무언가가 꺼지는 소리와 함께, 알파가 고개를 숙였다.
*
알파가 사라지자 타천사들도 바닥에 소나기처럼 떨어져내렸다.
용들 역시 싸움을 멈췄다. 알파가 죽은 것에 대해 혼란스러워하였다.
[······.]
제로도 멈췄다.
그러자 마치 세상이 멈춘 기분이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신체의 고요함.
사문을 열고 제로가 대신 죽기라도 한 것인가?
생명체도 아닌 제로가 어떻게 나를 대신해 죽을 수 있단 것인가.
여러모로 의문이 들지만 나는 즉시 제국으로 돌아갔다.
“죽··· 기전에······ 네 얼굴을······ 봐서 다행이구나.”
“······ 오래사셔야 합니다, 폐하.”
위험한 곳을 피해가긴 했지만 확실히 데우스는 죽어가고 있었다.
나이도 나이인지라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내게는 제로가 있었다.
아니, 나노머신이 있었다.
제로는 기동을 멈췄으나, 나노머신을 다루는 기술은 더욱 향상된 기분이었다.
이미 한 번 사문을 열어서일까?
생사의 기로에서 양쪽 모두를 가지게 된 듯싶다.
하여튼 상처에 손을 대자 순식간에 데우스의 상처가 아물었다.
새 살이 돋고, 원래의 건강을 되찾았다.
“허. 믿기지가 않는구나. 분명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였거늘.”
“엄살이 심하십니다.”
“헌데······ 말해보거라. 황궁비고를 턴 게 너이더냐?”
“······.”
나는 유진을 노려봤다.
그러자 유진이 눈을 피했다.
결국 말을 한 모양이다. 내가 범인이라고.
어색하게 웃어보일 따름이었다.
제국을 공격한 신성교는 결국 사라졌다.
교황이 사라지며 자연스럽게 제국의 철퇴를 맞았으니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 후.
라우넬이 황제로 즉위했다.
*
제국은 마족을 받아들였다.
다크엘프의 독립권 또한 보장했다.
나는 삼신기와 함께 세상 곳곳을 누볐다.
‘삼신기가 바로 세계수의 씨앗이었군.’
천상의 오르골과 겨울의 활.
그리고 드워프들의 번개신의 망치가 합쳐지자 씨앗 하나가 나타났다.
바로 세계수의 씨앗이다.
‘장막 자체가 세계수였지.’
물론 천목도 세계수의 일종이었다.
하지만 이건 천목보다도, 장막보다도 더 큰 종의 씨앗이었다.
세계 전체를 감쌀 수준의 씨앗 말이다.
더불어 방사성 물질을 완전히 멸절시킬 유일한 희망이 바로 이것이었다.
드워프들이 과거의 기술력을 합쳐 만들어낸 것이라는데······ 무기처럼 설명하더니 세계수였던 것이다.
이 씨앗을 드래곤 로드에게 심으려고 계획한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씨앗을 심을 곳을 찾아 세계를 누비는 중이었다.
“세계를 몇 바퀴나 주행하실 생각이십니까? 전하.”
“싫으면 안 따라와도 된다.”
“어디를 가든, 언제까지든 함께하겠습니다.”
아렐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제법 농담도 할 수 있었다.
헬라는 마족들과 함께 자신의 집을 만들고 있었다. 제국 내에서.
언젠가 완성되면 놀러가도록 하자.
“······ 제로는 아직도 아무런 말이 없습니까?”
“언젠가는 깨어나겠지.”
제로에 대해서도 서로 터놓게 되었다.
하지만 제로는 5년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무반응이었다.
아예 깨어나고 있지를 않았다.
*
10년이 지났다.
드디어 세계수의 씨앗을 심을 장소를 찾아내 심었다.
세계를 120바퀴는 더 돈 결과였다.
바로 내 몸이었다.
도저히 내 몸보다 씨앗이 자라기에 좋은 곳이 없어보였다.
씨앗을 심장에 심자마자 빠르게 자라나 세계를 뒤덮었다. 마치 장막처럼.
보이지 않고, 질량도 없지만 이 암흑물질들은 방사성 물질을 정화하는데 특효였다.
물론 더 성장하려면 꾸준히 영양분을 줘야만 한다.
그 영양분이라는 게 내 피라는 게 문제지만.
“이제 집으로 들어오십시오, 형님.”
오랜만에 제국에 들르자 황제 라우넬이 말했다.
카르몬과 리온도 어엿한 사내대장부가 되어있었다.
“한동안은 있을 생각이다. 걱정마라.”
“그정도면 병입니다. 이곳이 형님의 집이니 제발 마음편히 계십시오.”
집. 집이라.
궁전은 내게 언제나 지옥같은 곳이었는데.
이제는 마음편한 집이 되었다.
데우스가 노화하여 죽고 벌써 3년이 흘렀으니. 그때 아버지를 오래 못 본 게 조금은 후회스러웠다.
“··· 아버지.”
그래도 가시기 전에 제대로 아버지라 불러서 다행이었다.
이전 생에선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10년이 더 흘렀다.
그제야 나는 내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늙지 않는다.
내 몸은 나이를 먹지 않았다.
*
라우넬이 죽었다.
그냥 노환이었다.
녀석의 장례에 오랜만에 참가하자 모두가 늙어있었다.
오직 나만 젊었을 적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슬픔이나, 막상 동생이 죽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후 라우넬의 다섯 자식 중 한 명이 대를 이어 황제로 즉위했다.
나는 멀리서나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축하하며, 역사의 뒤로 모습을 감췄다.
*
자라난 세계수가 세계의 모든 방사성 물질을 정화했다.
그러자 나노머신 역시 목적을 잃고 하나, 둘 사라져갔다.
소명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200년이 더 지난 뒤 세상은 태초의 그것처럼 완연하게 돌아갔다.
500년이 더 지났을 땐 더 이상 나를 아는 자가 없었다. 수명이 긴 용들 역시도 방사성 물질과 나노머신이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제국 역시 사라졌다.
인류의 관점에서 왕국이나 제국이 사라지고 새롭게 생기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그렇게 다시 천 년이 지나자, 마법과 신비종은 그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로 치부되고 있었다.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러자 과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예전 제로가 보여줬던 초고대문명과도 같은 방향으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젠 나도 시간을 새지 않아서 모르겠다.
확실한 건.
“······ 음. 롯데리아 햄버거는 역시 맛있군.”
햄버거는 맛있다는 것이다.
특히 롯데리아 불고기 버거가 최고다. 심플하면서도 농축된 맛이 최고였다.
*
누군가는 최악이라 떠들지만 이게 내 최애인 걸 어떡하나.
와그작!
그렇게 한입 야무지게 베어물었을 때다.
쿠르르르릉!
지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제로’, 기동을 시작합니다.]
“······.”
이게 얼마만이던가.
눈물이 날 것 같다. 언제 마지막으로 울었는지 기억조차 안 나지만.
셀 수 없이 오랜 시간을 지내왔음에도 제로가 깨어난 적이 없다.
나를 아는 이들 모두가 땅에 묻혀 사라졌음에도 제로는 정지된 그대로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갑자기 깨어난 것이다.
하지만 감동의 재회를 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콰아아앙!
쿠우우웅!
바닥에서 무언가가 솟아난다.
“저건······ 무엇이냐?”
[‘게이트’입니다. 마스터.]
“게이트? 아.”
게이트라 불린 문이 열리자.
뚜벅. 뚜벅.
“여, 영화야?”
“cg? 뭐야 저 괴물들은?”
찰칵! 찰칵!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린다.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게이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괴물들을 무슨 동물원 원숭이 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또한 괴물은 모두가 각양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방사성 물질이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을 시절에 보았던 몬스터들.
오크와 고블린과 똑닮은 얼굴들이다.
허나, 그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설마 저들이?”
[핵전쟁 직후 지구를 떠났던 인류가 돌아왔습니다, 마스터.]
< 나노머신 황제(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