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이다.’
바하뮬 추기경은 교황의 서신을 받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속속들이 성기사들이 추가 증원되며 어느덧 숫자는 처음의 세 배를 넘겼다.
고작 천의 숫자로도 제국의 정예병을 물리쳤거늘, 이제는 도저히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성전이 선포된 이상 패배는 있을 수 없다.
하물며 리겔 왕국을 비롯한 신성교를 따르는 왕국들의 지원도 속속들이 도착하는 상황.
반면에 제국은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한 번의 충돌로 승패는 확실하게 나뉜 셈이다.
“······ 황제가 직접 병사들을 지휘하겠다며 나섰다고?”
하지만 제국군의 소식을 전해들은 바하뮬 추기경은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제국군이 후퇴후 한창 대치 중인 전장이었다.
크로프트의 배신으로 적진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그대로 밀어붙이면 끝날 싸움이다. 만약 황자들이 나섰어도 쉽게 이겼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직접 나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성왕이라 불리는 그는 아직도 대륙 전역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데우스를 따랐으며 제국군들의 신용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그런 그가 전장에 나선다?
제국군 역시 필사적으로 변할 수밖에.
‘황제가 직접 나선 건 완전히 예상 외로군.’
겁쟁이 황제가 전장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있는 일이다.
언제나 뒤에서만 조종하던 그가 전두지휘를 한다?
죽을 때까지 그럴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황제는 황제라 이건가?
재정비를 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허나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수도 없다.
‘재생이 과열되면 오르골로도 살릴 수가 없어.’
까마귀 성녀는 철창 안에 갇혀 삼신기인 천상의 오르골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신성교의 병사들은 무한한 재생능력을 얻었지만 결국 재생의 끝은 죽음이었다. 과용 된 재생으로 말미암아 덩어리처럼 변해 죽어가는 것이다.
오르골로 재생된 천 명의 병사가 모두 죽었다.
후속부대가 증원되었으니 신성교 역시 재정비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시간을 끌면 불리한 건 우리다.’
하지만 이곳은 제국이었다.
보급도, 반응도 모두 그들이 빠를 수밖에 없다. 기습적인 공격으로 혼란을 야기했을 뿐 장기전으로 가면 필패다.
“크로프트. 모범을 보여라. 황제를 죽이는 거다.”
“······.”
크로프트. 아니, 크로프트 였던 것이 고개를 돌려 바하뮬 추기경을 바라봤다.
순간 그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용을 죽이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다.
‘제국 최강의 검사라더니, 그 이름이 허명은 아니었지.’
인간이 용을 죽일 줄이야.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찍어눌렀다.
마나샤워를 겪고 전성기이던 시절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허나 저주로 인해 크로프트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크로프트를 앞세워 공격한다면 저들 역시 무너질 수밖에 없을 터다.
황제를 죽이면 금상첨화다.
그가 죽는다면 더 이상 피를 흘릴 필요도 없다.
제국 역시 신성교의 발아래 들어오게 되리라.
“가라.”
슉!
크로프트의 신형이 사라졌다.
*
크로프트는 최강의 검사였다.
제국의 얼굴이며 자랑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그가 변절했다는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아아악!”
“사, 살려줘!”
고작 한 명.
크로프트 홀로 전장을 휘젓고 있었다.
거짓이기를, 연기이기를 바랐지만 크로프트의 손속에는 일말의 감정이 없었다.
반면에 제국군 모두가 크로프트를 알고 있다. 그의 검이 자신들에게 향하는 걸 죽으면서까지 믿을 수 없었다.
“폐하. 크로프트경의 움직임이 평소와 다릅니다.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것 같습니다.”
유진이 말을 듣고서야 데우스는 한시름 놓았다.
진짜 배신이 아니라 그저 조종당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문제였다.
조종당할 뿐인 크로프트를 죽여야 하는가?
홀로 쳐들어왔으니, 아무리 그가 강해도 숫자 앞에선 장사가 없었다.
결국 둘러싸여 최후를 맞이하리라.
아군의 피해가 늘어나고 있는만큼 사정을 두어선 안 된다.
하지만··· 상대는 크로프트였다. 평생 자신에게 헌신하며 모든 걸 포기한 영웅. 제국을 위해, 황제 데우스를 위해 그림자가 되길 자처했던 남자.
“전선을······ 뒤로 물리거라.”
그를 죽이라 명할 수가 없었다.
*
전선이 제대로 갖춰지기도 전에 후퇴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연달아 발생했다.
결국 신성교가 정비를 마칠 때까지 제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한 것이다.
덕분에 유리한 고지에서의 모든 싸움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전선에 직접 나선건 최악의 악수(惡手)였다.
허나 그것을 바로잡아줄 사람이 없었다.
크로프트도, 라인하르트도 없지 않은가.
유진은 궁정마법사지만 전투에는 무지했다. 무영창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나 결계에 특화 된 천재였으니.
전쟁의 천재라 불리던 카를로스 대공은 이미 처형한 뒤였다.
대공가의 자식들 역시 모두 죽거나 분열됐다.
‘제국이 이토록 약했던가?’
하나, 둘 병사들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나약함을.
평화가 너무 길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신성교는 제대로 전쟁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진흙탕으로 싸울 줄 아는 자들이었다.
천하의 신성교가 제국에 이런 개싸움을 걸어오리라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라인하르트 황태자께선······.”
“이 시국에 대체 어디로 사라지신 거야?”
하나, 둘 불만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나섰음에도 제국의 황태자는 어디서 무얼하고 있단 말인가.
제국의 희망이라 노래부를 땐 언제고 정작 필요할 땐 없다.
‘혹시 무서워서 숨은 거 아니야?’
‘숨은 게 아니라면 아직껏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잖아.’
황태자의 행방을 아무도 모른다.
나타나지도 않는다.
이 상황이라면 어디에 있든 모를 수가 없을 텐데.
전쟁이 두려워 숨은 게 아니고선 말이다.
“너희의 황태자는 악마교단의 전신인 대죄종이다! 제국이 악마교단과 손을 잡았다는 방증일지니!”
겨우 전선을 구축하자 바하뮬 추기경은 마음대로 떠들고 있었다.
황태자가 악마교단의 대죄종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악마교단의 패악질은 세상의 모두가 알고 있는 바! 그곳의 그릇된 신인 대죄종을, 악마에게 먹힌 황태자를 황제는 감싸고 있다! 아직도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그 증거다!”
황태자가 악마교단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없는 명분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해.”
“기습적으로 공격한 놈들이 말이 많구나!”
물론 그 말에 반박하는 기사들도 많았다.
하지만 일반병사들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이 싹튼 건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정작 당사자인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떨어진 사기는 아예 바닥을 쳤다.
제국군이 흔들리고 있다는 게 확실시 되자 바하뮬 추기경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나타날 리가 없지. 황태자는 여기 있으니.”
한니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어 한니발이 발록을 쳐다봤다.
한니발은 발록이 제국의 황태자, 라인하르트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물론 발록이 인간의 형태로 라인하르트 흉내를 낸다고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다. 솔직히 여태껏 걸리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이놈이 인간의 외견을 잘 구분 못해서 살았군.’
하지만 한니발은 인간의 외형을 구분할 줄 몰랐다.
인간이 개미의 외견을 구분할 수 없듯이 말이다.
이건 다른 용들도 비슷했다.
그나마 용끼리의 파장으로 서로 구분하는 게 전부다.
“흐흐. 사기가 바닥을 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나.”
나타나지 않는 황태자.
오명을 쓴 그가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전쟁의 결과가 벌써부터 보이는 듯했다.
그런 한니발의 모습을 보며 발록이 내심 침음을 흘렸다.
*
최악의 선택, 최악의 시기, 최악의 적이었다.
비가 내리며 바닥이 진창이 된 날.
한 치 앞을 구분할 수 없는 안개 속에서 울음소리가 터져나갔다.
“폐, 폐하!”
“아아······!”
황제 데우스가 피살당한 것이다.
제국의 검, 크로프트에게.
“··· 아버지?”
라우넬 역시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피를 분수처럼 내뿜는 황제를 바라볼 수밖에.
*
황제가 죽었다!
이 소식이 제국 전역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제국 내에서 신성교의 공격을 받아 황제가 죽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전장에서 들려오는 이런 소식이 거짓일 리 만무했다.
누가 거짓으로 황제의 죽음을 꾸미겠나.
전쟁 중인 터라 정상적인 승계식은 없었지만 그 뒤를 라우넬이 잇게 됐다는 소문 또한 무성히 퍼져나갔다.
라인하르트.
악마교단에 영혼을 판 그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신성교의 선동이 그대로 먹혀들고 있는 것이다.
“황태자께서 대죄종이라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교황이 직접 천명하지 않았나?”
“그래. 신성교가 직접 공표할 정도면······.”
“전하의 안좋았던 소문들 잊었나? 갑자기 사람이 바뀌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게야.”
황태자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한 번 퍼지기 시작한 여론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소문은 소문을 낳고, 이내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또 다른 소문을 생성하는 자들.
백성들조차 단합이 안 되어 분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인하르트 황태자를 찾아서 바쳐야 끝난다.”
“이 모든 게 악마 황태자가 만든 참상 아닌가!”
악마 황태자라는 이명이 부활한 순간이기도 하였다.
모든 책임을 황태자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패배도, 황제의 죽음도, 신성교의 침략조차도.
*
황제는 죽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죽지는 않았다.
숨은 붙어있었으니까.
“대죄종 라인하르트 황태자를 넘겨라! 그리하면 천상의 오르골로 황제를 살려주고 전쟁도 끝내겠다.”
바하뮬 추기경이 자신있게 외쳤다.
황태자 라인하르트를 넘기면 모든 걸 끝내겠다고.
하지만 라우넬은 라인하르트가 어디있는지조차 모른다.
그만이 아니라 모두가 모르고 있었다.
황태자가 아예 자리에 없는 것을 확신하기에 저런 소리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저 황태자가 목적이라면 느닷없는 습격이 아니라 대화로 시작했을 테니.
빠드득.
라우넬이 이를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황제는 숨이 멎기 직전이었다. 천상의 오르골이 아니면 살리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없는 라인하르트를 바칠 수도 없다.
설령 라인하르트가 있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저하.”
“······ 이대로 전선을 물릴 수는 없다. 이 뒤는 수도다.”
고작 3주였다.
3주만에 수도 근처까지 전선이 밀린 것이다.
남은 병사는 이만 안팎.
급하게 징집한 병사들을 합쳐도 삼만이 채 안 된다.
수도가 함락되면 모든 게 끝이었다.
‘이대로 전부 포기해야만 하는가?’
라우넬은 쓰러진 황제를 바라보았다.
아직 숨은 쉬고 있지만······.
‘라인하르트······.’
위험할 때면 항상 나타나던 게 라인하르트다.
그런데 왜.
제국이 위험에 쳐했는대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암담함에 라우넬이 내심 한숨을 쉬던 그 순간이었다.
쿠르릉!
콰르르르르르르르!
광음과 함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지각변동.
마계의 장막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 마지막 위업(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