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은 균열의 내부를 직접 확인했다.
균열의 내부. 벌레처럼 바글거리는 타천사들을 두 눈에 담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적어도 장막을 치워버려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조하고 있었다.
빠르게 힘을 모아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마신전을 단축해야만 했고.
교만이 입을 열었다.
“긴급조항을 발동한다 하더라도 마신전의 필수적인 요소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적어도 모든 이가 납득할만한 진행은 되어야하지.”
마계를 이끌 대죄종을 정하는 건 그저 마왕들에게만 중요한 게 아니다.
마족 전체를 위하는 일이었다. 임의로 아무런 진행 없이 대죄종을 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마왕이 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은 곧 대죄종이 되기 위해 필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혈종과 가신, 그리고 마왕의 힘겨루기는 당연히 포함되어야만 한다.”
77일간 진행하는 의식을 전부 빼고 가장 중요한 세 가지만 포함시키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교만의 의견에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탐욕. 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뇌까렸다.
“신녀의 의식을 무시하자? 그게 가장 중요한 것임은 잘 알고 있을 텐데?”
77일간 신녀는 의식에 들어간 뒤 진정한 대죄종의 반쪽이 된다.
마왕들 중 대죄종으로 선별된 자만이 그 반쪽을 먹고 완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의식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제외하자니. 이해할 리 만무했다.
“장막 안을 들여다 봤다면 그런 안일할 소리는 못 할 것이다. 저것들이 마계를 먼저 침공해오면 그 피해는 다시 복구할 수 없다.”
가장 오랫동안 타천사들의 침략을 막아온 게 교만이다. 그래서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장막 안의 타천사들이 일제히 마계를 공격해오면 수복 불가능한 피해를 볼 것이라고.
마계가 몰락할 것이라고 말이다.
마계의 몰락을 막기 위해선 먼저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규율대로 77일간 의식을 진행한다면 그만큼 공격당할 가능성만 높여주는 꼴이다.
이윽고 교만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폭식의 말이 맞다. 저들은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 우리는 가만히 정체만 되어있지. 저들이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끝마쳤음에도 우리는 그들이 공격해올 거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것만큼이나 위험한 게 또 있을까.
상대가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도 모르고 있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상황은 없다. 정보력의 부재와 안일함이 만든 환장의 조합이었다.
또한 저들이 공격해오리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방치하는 건 무능력한 것이다. 무책임한 것이었다. 의무와 책임을 동일시하는 게 마왕은 아닐지라도 마계의 존속에는 모든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게 그들이지 않던가.
‘분노하고 있군.’
교만은 분노하고 있었다.
이는 천계를 향한 것도, 다른 마왕들을 향한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분노하는 중이었다.
자신의 무능력함만큼은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게 교만인 탓이다.
무엇보다 마계를 지키는 일에서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그렇게도 견제하고 싫어하던 내 의견마저 수렴한 걸 보면. 아니, 적극적으로 대신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솔직히 의외였다.
가장 보수적인 줄 알았던 그가 도리어 가장 적극적으로 변화를 말하고 있다는 게.
이윽고 교만이 마왕들을 둘러보곤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 투표로 정하도록 하겠다. 긴급조항의 발동에 찬성하는 마왕들은 손을 들라.”
거부는 거부하겠다는 단호한 얼굴로.
*
혈종.
마왕, 혹은 그러한 급에 다다른 존재가 악귀화하면 되는 게 혈종이다.
일반적인 악귀보다 크고 강력하며 오직 마왕만이 다룰 수 있기에 상징처럼 여겨지곤 한다. 천산의 마왕이 되는데 필수조건이 한 기 이상의 혈종을 이끌 것이었으니 말은 다 했다.
당연히 마신, 대죄종이 되려면 혈종 역시 강력해야만 하는 건 당연한 일.
‘원래의 마신전이라면 토너먼트식으로 진행했겠지만.’
콜로세움과도 같은 거대한 경기장의 안에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마족이 긴장한 채로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기장의 중심엔 다섯 기의 혈종이 거친 숨을 내뱉는 중이었다.
“긴급조항을 들먹인 걸 후회하게 될 거다.”
탐욕이 이죽였다.
긴급조항의 의례에 따라 진행을 압축한 것이다.
그로 인해 본래라면 토너먼트 식으로 진행됐어야 할 혈종의 대결이 이처럼 한꺼번에 진행되게끔 바뀐 것이었다.
동시에 진행하게 되면 어느 정도 객관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탐욕처럼 이미 다른 마왕과 손발을 맞춘 상태라면 더더욱.
‘모든 진행이 단축된다면 유리한 건 나다.’
탐욕의 두 눈에 희열이 자리잡았다.
긴급조항이 발동된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오히려 잘됐다.
대죄종이 되면 나머지 반쪽은 후에 처리해도 충분하다. 신녀의 의식은 따로 진행하고 대죄종의 직함을 먼저 다는 것도 나쁘진 않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혈종의 대결에서 승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부분에 있어서 탐욕은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혈종의 무력이란 것은 거기서 거기다.’
혈종은 강력하다. 악귀와는 확연히 비견될 정도로. 하지만 혈종끼리의 우열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오히려 혈종을 다루는 마왕의 지배력이 더욱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건 숫자다.’
혈종은 숫자의 절대적 우위를 꺾을 수 없다.
물론 대결에 참가할 수 있는 혈종의 숫자는 하나다.
하지만 다른 마왕과 손을 잡는다면 둘도, 셋도 될 수 있다.
‘나태와 질투는 이미 나와 한 배를 탔지.ㅊ
마왕들이 손을 잡았다.
교만의 압도적 승리를 견제하고, 천목을 베어내려는 폭식이 대죄종이 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이었다.
교만의 견제야 원래부터 존재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폭식이었다.
‘미친놈.‘
정말로 미친 게 분명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천산의 상징과도 같은 천목을 베어내겠다는 소리를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천목을 베어내는 순간 마계는 저주로 오염될 것이다.
모든 마족들이 악귀화 되어 자멸할 게 분명하다.
절대로 폭식이 대죄종이 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구오오오오!
혈종간의 대결이 시작되자 가장 먼저 탐욕과 나태의 혈종이 교만의 혈종을 양쪽에서 마크하기 시작했다.
2:1.
나머지 하나. 질투의 혈종은 폭식의 혈종인 아수라를 막아서고 있었다.
계획대로다. 탐욕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무리 교만의 혈종이라도 나와 나태의 공격을 동시에 받아내긴 힘들겠지.’
콰직!
콰르륵!
양방향에서 밀어붙이자 교만의 혈종이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교만의 혈종은 더욱 크고 강력하지만 두 혈종이 동시에 밀어붙이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교만의 혈종에 대해선 이미 연구가 끝났다.
탐욕은 대죄종이 되고 싶었다. 가장 걸림돌이 되는 건 교만이었고, 교만에 대한 모든 것은 이미 연구가 끝난 상태였다.
제아무리 교만의 혈종이 강력해두 동시에 양쪽에서 공격하면 막지 못한다. 혈종은 가뜩이나 시력이 약한데다 반응 역시 빠르지 못한 탓이다.
놈이 무릎을 꿇으면 남은 건 폭식의 아수라였다.
아수라.
이 대결에서 유일한 변수라면 당연히 그것이었다.
어느 마왕에게도 길들여지지 않은 혈종.
하여 벽에 거의 버리다시피 내놔뒀는데 그걸 폭식이 데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허나, 그래도 혈종이다. 아수라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 역시 다수의 혈종의 공격을 버티진 못할 테다.
질투의 혈종은 아수라를 상대로 오로지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이었다.
정면대결을 피하며 시간을 끌다가 교만의 혈종이 정리되는 즉시 공격할 것이다.
아무리 아수라가 날고 기어도 결과는 정해져있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콰득!
쿠아아아악!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광음과 함께 혈종 하나가 바닥에 쓰러진 건.
혈종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음······?!”
“어, 어떻게?!”
탐욕과 질투의 두 눈가가 떨렸다.
다른 마왕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쓰러진 혈종은 질투의 것이었다.
설마 혈종 아수라가 질투의 혈종을 쓰러트린 건가?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허나 이해할 수가 없다.
최대한 정면대결을 피하라고 일렀거늘.
오직 시간을 끄는게 목적이었다. 시간조차 끌지 못할 정도로 아수라가 강력하지 않고서야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혈종 아수라의 모습이었다.
붉게 달아오른 동체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폭식이 장막을 뚫고 균열을 열 때처럼.
구오오오오오-!!!
혈종 아수라가 포효했다.
그 직후 혈종 아수라가 쓰러진 질투의 혈종을 덮쳤다.
이후 괴성을 내지르며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콰아아앙!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주먹을 내리칠 때마다 혈종의 피부가 폭발하듯 뜯겨나갔다.
근육이 드러나고 뼈가 드러났다.
강하다. 다른 혈종들보다도 더.
허나 그보다 더욱 압도적인 건 혈종 아수라의 피부표면에 보이는 전혀 다른 물질이었다.
어느덧 혈종 아수라의 전신에 쓰여진 것.
“마테리얼······?”
착각할 리가 없다.
타천사의 날개와도 같은 철의 재질이 아수라의 상체를 갑옷처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마테리얼!
마왕조차 위협하던 그 물질을 혈종이 어떻게?
탐욕이 고개를 돌려 폭식을 바라보았다.
‘웃어······?’
어느덧 폭식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매달려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상정하고 있었다는 듯.
그리고 그 상황을 타개한 것 역시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
질투의 혈종을 재기불능으로 만든 뒤 아수라가 다른 타깃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탐욕과 나태의 혈종은 여전히 교만의 혈종을 상대로 승부를 내지 못한 상태였다.
순식간에 상황이 뒤집혀 2:2가 된 것이다.
그 누구도 상정치 못한 상황이다.
교만조차도 혈종의 대결만큼은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탐욕을 비롯한 마왕들의 견제가 들어올 것이라고 이미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견제조차 무의미하게 만들 또 다른 존재가 나타날 것은 역시나 예상하지 못했다.
허. 마테리얼은 뒤집어 쓴 혈종이라니.
“······ 마테리얼을 혈종에게 이식한 거냐?”
교만이 어이없는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어깨만 으쓱해 보일 따름이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마테리얼의 이식은 이미 한 차례 해본 적이 있었다.
죽어가는 아렐을 대상으로 제로투와 같이 말이다.
허나 제로투는 오직 하나뿐이다.
혈종에게 이식할 또 다른 제로는 없었다.
다만, 아렐에게 없던 재생능력이 아수라에겐 있었다.
마테리얼의 성질을 온전하게 이식하기 위해선 압도적인 재생능력이 필수였다.
그리고 혈종은 이미 상상을 초월하는 재생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아수라는 그 부분에 있어선 다른 혈종들보다 탁월했다.
‘정말로 될 줄은 몰랐다만.’
마테리얼은 마나의 성질을 오염시키는 물질이다.
당연히 혈종에게 이식하는 건 불가능할 줄 알았다.
하지만 독도 잘 쓰면 약이라고 했던가.
아수라는 생각 외로 마테리얼을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갑옷처럼 이용하기 시작했다.
마테리얼을 사용하는 혈종이라니. 그야말로 무적 아닌가.
구오오오오오-!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경기장으로 쏠렸다.
결판이 난 것이다.
< 마지막 위업(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