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성녀.
불신한 자에게 내리는 철퇴의 이름이다.
까마귀 성녀가 나타날 때마다 대재해가 일어났다. 왕국 하나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도 있을 정도로 그 이름은 공포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수백 년간 그 이름은 언급된 적이 없었다.
수백 년간 신성교를 위협하는 적은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신성교가 자랑하는 비장의 무기이며 최후의 통첩이었다.
‘대죄종의 사냥에 엡실론을 꺼내실 줄이야.’
철창 안에서 검은 머리칼을 지닌 여인.
안대를 쓴 채 쇠사슬로 결박당한 그녀가 바로 엡실론, 까마귀 성녀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바하뮬 추기경의 두 눈엔 불길함이 자리 잡았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무기. 그러나 신성교를 위해. 우리의 주신을 위해. 저것은 사용되어야 한다.’
바하뮬 추기경은 교황의 지시로 엡실론의 이동을 지시받았다.
엡실론은 그 자체로 거대한 저주의 덩어리.
신성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최악의 무기다.
지난 300년 동안 꺼내지 않은 엡실론을 교황이 직접 꺼내 들었다.
대죄종의 사냥을 위해.
그 대죄종을 숨겨준 제국을 공격하고자.
‘제국은 악마교단을 숭배하고 있다. 감히, 감히!’
아미르 추기경과 자스민 성녀가 제국의 사슬에 갇혔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교황은 황제가 악마교단에 의해 세뇌되었다고 판단, 비밀리에 엡실론을 꺼내어 제국의 공격을 바하뮬 추기경에게 명한 것이다.
이는 국제외교상 말도 안 되는 짓이지만 상대는 악마교단이었다.
상식과 정의에 위배되는 놈들을 사냥하려면 자신들 역시도 잠시 악을 빌려야만 했다.
게다가 엡실론 뿐만이 아니다.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성녀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그뿐인가.
바하뮬 추기경은 하늘 위를 올려다 봤다.
‘용.’
신성교의 뒤에는 용이 있었다.
추기경인 그조차도 소문만 들었을 뿐 실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윽고 거대한 성벽이 보였다.
아리아 영지. 제국의 수도로 향하는 길목에 놓인 천혜의 요새.
가장 빠르게 수도로 향할 수 있는 지름길이지만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다고 전해지는 무적의 갑옷!
하지만 제아무리 무패의 요새라도 이만한 전력을 버틸 수는 없으리라.
“공격하라! 성전이다!”
*
“교황이 미치지 않고서야······!”
“아리아 영지가 함락되었습니다!”
“이 속도면 이틀 후면 수도에 도착할 겁니다!”
전략실 내부.
대신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실시간으로 상황을 보고받으며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데우스의 인상은 펴질 줄을 몰랐다.
제국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 아무런 예고도, 징후조차도 없이 쳐들어왔다. 그만큼 급진적으로 이루어진 공격이다.
숫자는 적다. 하지만 저들은 그 적은 숫자로 천혜의 요새인 아리아 영지를 함락시켰다.
“아리아 영지가 함락되는데 얼마나 걸렸다고 하였느냐?”
데우스가 묻자 원수부대신이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세··· 세 시간입니다. 세 시간 만에 쑥대밭이 되었다고······.”
“제국이 세워진 이래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던 게 아리아 영지 아니었나?”
“아시다시피 주변 모든 영지에서 병사들을 차출한 상황인지라······ 아리아 영지 내부에 병사 수가 평소보다 적었습니다.”
카를로스 대공과 대공가의 기사들을 물리고자 병사들을 차출했다.
황가의 상비군만으로는 대공가의 세력을 모두 감당할 수 없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단번에 처리하려면 그만한 무력을 동반해야만 하였다.
그 틈을 타서 신성교가 쳐들어왔으니 아리아 영지가 3시간 만에 함락되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아리아 영지는 천혜의 요새다.
백 명의 군사로 만 명의 군사를 막을 수 있는.
그런 곳이 병사가 적다 하여 3시간 만에 함락되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신성교의 저력이 강한 것이다.’
상대가 강한 것이다. 그저 그뿐이었다.
“숫자는?”
“숫자는 대략 천명 정도인 것 같습니다. 제국이 모르게 기습적으로 아리아 영지를 공격하려면 그 이상의 숫자는 말이 안 됩니다.”
제아무리 신성교가 베일에 싸여있어도 제국의 정보력을 무시할 순 없다.
많은 숫자의 병사가 출정을 했다면 진즉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니, 출정 전에 알았으리라. 그리고 대비했겠지.
하지만 이번엔 몰랐다. 당연히 대비도 못 했다.
말인즉슨,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출병식이라는 거다. 그 숫자도 많지 않은 게 당연했다.
최대로 잡아야 천 명.
혹은 그보다 적다.
“현재 수도에 있는 병사의 수는?”
“상비군 삼만에 차출한 병사들까지 합치면 팔만이 넘습니다.”
팔만.
강제징집 없이 팔만이면 엄청난 숫자다.
성인들을 징집하면 그 숫자는 이십만을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팔만은 정예군이다.
제대로 훈련된 일당백의 병사들.
정예군 팔만이면 주변 왕국들을 쑥대밭으로 만들기엔 충분하다.
여기에 기사들까지 합세하면 무적이다. 질 수가 없다.
북방을 정벌하는데 카를로스 대공이 20만의 병사를 투입했지만 그 대부분은 강제징집병이었다. 실제 정예는 오만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금지된 약물을 사용한 것이고.
아무리 용이 있다지만, 까마귀 성녀가 있다지만 그래 봤자 천 명.
단순 수치로만 봐도 80,000 : 1,000이다.
80배의 격차.
비교불가다. 상식적으로 보면 그렇다.
‘아리아 성벽은 10만 대군으로도 뚫지 못했다.’
허나 10만 대군을 천 명의 숫자로 패퇴시킨 게 바로 아리아 성벽이었다.
그리고 저들은 천 명의 병사로 아리아 성벽을 3시간 만에 뚫었다.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아무리 병사가 적어도 아리아 영지엔 고위의 마법사와 기사가 많았다.
‘교황이 갑자기 왜?’
신성교는 교황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교황은 제국의 공격을 명했다.
왜?
우선 이유를 알아야 한다.
이유를 알아야 대처할 수 있다.
사자를 보내도 답은 오지 않을 테다. 대화가 통하는 상태였다면 갑자기 기습을 해오진 않았을 테니까.
생각을 정리한 데우스가 대신들을 향해 말했다.
“아미르 추기경과 자스민 성녀를 데려오너라.”
*
아미르 추기경과 자스민 성녀의 꼴을 말이 아니었다.
제법 오랜 시간 갇혀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신성교가 제국을 갑자기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신성교가······ 제국을 공격했습니까?”
아미르 추기경이 기겁하며 물었다.
이에 데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나절 전에 아리아 영지가 신성교에 의해 함락당했다.”
“교, 교황께서 허락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교황이 허락했으니 이루어진 것이다.
신성교의 모든 의지는 교황의 의지와 같으니까.
“··· 라인하르트 황태자 때문이겠지요.”
그때 자스민 성녀가 입을 열었다.
라인하르트. 그 이름을 듣고 데우스는 인상을 구겼다.
“황태자가 대죄종이라는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때문이란 말이냐?”
“대죄종은 악마교단의 주신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주신은 오직 알파뿐. 교황께서 움직이셨다면 알파의 계시를 들어서겠지요.”
신의 계시.
교황의 의지로 신성교를 움직이지만, 그런 교황은 신의 계시에 의해 움직인다.
알파가 계시했다면 교황은 따라야만 했다.
“주신이 황태자를 대죄종이라 하기라도 했다는 것이냐?”
“까마귀 성녀가 움직였다면, 예.”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자스민 성녀는 까마귀 성녀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성녀끼리 통하는 게 있기라도 한 건지.
이어 자스민 성녀가 데우스에게 조언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라인하르트 황태자를 황태자의 직에서 파면시키고 신성교에 바치십시오.”
라인하르트를 파면하라.
신성교에 바쳐 주신의 화를 면하라······.
신성교와 전면전은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다.
제국도, 신성교도 서로 파멸할 테니까.
신성교를 따르는 수많은 왕국이 동참한다면 세계전쟁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 주신의 계시가 있다면 라인하르트를 파면시키는 게 맞다.
“제국의 안전을 생각하십시오.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이 피를 흘리게 될 것입니다.”
“······ 황태자가 대죄종일 리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혹, 황태자께서 갑자기 변하지 않았습니까?”
자스민 성녀의 말대로였다.
라인하르트는 갑자기 변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무능하기 짝이 없었을진대.
어느 순간 알을 깨고 나오더니 모든 문제를 해결해버렸다.
카를로스 대공을 처형시킨 것도, 북방의 평화협정 역시도 라인하르트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라인하르트가 알을 깨고 나온 게 아니라 대죄종으로 변해서라면?
“칠대죄악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옵니다. 평범한 농부의 몸에, 귀족의 몸에, 심지어 성녀의 몸에도. 그렇게 죄악이 된 숙주는 강력한 힘과 권능을 얻게 되지요. 라인하르트 전하께서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말을 삼가거라. 감히 짐의 앞에서 황태자를 두둔하느냐?”
“어느날 갑자기 천한 농부가 대마법사의 혜안과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날은 처녀가 잉태를 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 최후는 결국 죄악이었습니다. 가족을, 마을을, 왕국을 태워버리며 저주의 낙인을 남겼습니다. 하물며.”
“······.”
“그 죄악들의 왕, 대죄종이라면 얼마나 저주의 크기가 크겠습니까? 감당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래서 황태자께선 자주 사라지곤 하셨겠지요. 권능을 제국 내에서 사용할 순 없을 테니. 지금도 제국 내에 안 계시지 않습니까?”
구구절절 맞는 소리다.
라인하르트는 자주 자리를 비웠다.
황제의 직마저 거부하며 세상을 떠돌았다.
그게 대죄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죄악에 삼켜졌다면 이미 그분은 폐하께서 아시는 황태자 전하가 아닐 것이옵니다. 오히려 전하를 죽이신 원수이지요. 그러니······.”
“닥쳐라.”
데우스는 분노했다.
그의 두 눈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폐하. 화를 가라앉히시고 이성적으로······.”
“닥치라고 하였다.”
스팟!
크로프트의 검이 자스민의 목을 겨누었다.
자스민 성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는 짐의 아이다. 짐이 멀리하였다고는 하나 제자식도 못알아볼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다.”
라인하르트는 변했다.
갑작스럽게. 예고도 없이.
명석해졌으며 더 이상 고통에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누가봐도 이상한 상황이다.
누가봐도 라인하르트의 변화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라인하르트의 변화가 무엇을 가져왔는지 보아야했다.
라인하르트로 인해 데우스는 공포를 이겨냈다. 카를로스 대공에게 대적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걷어낼 수 있었다.
다른이에게 자신감을 주는 존재가 죄악이라고? 대죄종이라고?
황제의 직마저 동생에게 양보할 정도로 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녀석이다. 분열된 동생들을 하나로 화합하여 황가를 결속시킨 것도 라인하르트였다.
라우넬, 카잔, 카르몬, 리온.
네 황자가 모두 라인하르트를 따르고 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라인하르트를 무시하거나 없는 사람 취급하던 아이들이.
황비들 대부분도 라인하르트를 지지한다.
페르세포 대공마저도 말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기행을 펼치긴 했다.
북방에서 탄생한 신성군주가 라인하르트라니. 아직도 믿겨지지가 않을 지경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아이는 짐의 아이다.’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자식이었다.
이미 멀리 돌아오지 않았는가. 더 멀리 돌아가야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품을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대죄종이라는 누명을 벗길 터다.
주신? 교황? 신성교?
감히.
제국을 공격하고 황태자마저 낙인을 씌우려고 해?
데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슬퍼런 눈빛으로. 그가 황제에 직위한 이후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눈빛으로.
“오냐. 전쟁을 원한다면, 전쟁을 해주마.”
< 마지막 위업(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