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139화 (139/146)

“판결하겠다.”

대법관의 목소리를 들으며 카를로스 대공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제국의 지엄한 재판장이었다.

황제를 비롯한 황가의 사람들과 대공가의 귀족들이 한데 모여 이 재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라우넬······!’

평소라면 여유로웠을 카를로스 대공이 두눈에 불을 켠 채 라우넬을 노려봤다.

라우넬 황자.

놈이 자신을 엮을 결정적인 증거를 북방에서 찾아냈다.

리치 데이몬의 탑.

그곳에서 대공가가 ‘공양’에 바친 수많은 시체들을 발견한 것이다.

단순히 시체만 발견되었다면 카를로스 대공을 엮을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마나연공법이었다.

인신공양에 의한 마나연공. 그것이 대공가의 기사들이 익히는 마나연공법과 같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대공가의 기사들 중 유독 소드마스터가 많은 이유가 바로 그 연공법 덕이었다.

그런데 라우넬은 비밀리에 숨겨진 그 탑을 찾아내고 자신과 엮어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니라고 주장하면 그만이니까.

‘등을 돌렸다. 귀족들이. 기사들이. 가신들이.’

대공가의 마나연공법과 연관지은 건 관련자들이 배신했기 때문이다.

증거를 들이밀고 겁박하니 내부고발자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청렴하기로는 다시 없을 라우넬 황자가 그런 짓을 벌였다는 것도 믿기지가 않지만.

설마 그딴 협박에 주요 기사과 가신들이 굴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라우넬이 북방의 평화협정을 성공적으로 끝마쳤기 때문일까?

‘아니다.’

물론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결정적이지 않다.

결정적인 인물은 따로 있었다.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

놈의 변화와 움직임에 두려움을 느껴서이리라.

비룡기사단을 필두로 부패한 귀족들을 순식간에 처리한 실력도 일품이었다.

노련한 정치가도 이정도의 결단력을 보이며 빠르게 움직일 순 없다.

모든 걸 미리 알고 있지 않고서야.

라우넬의 변화 역시 라인하르트가 이끌어냈다. 라우넬은 이제 적당히 청렴하며 남의 약점을 쥔 채 협박할 줄도 알았다.

‘하지만 나를 처형시킬 순 없을 거다.’

열 명의 법관 중 여섯 명이 이미 대공의 사람이다.

대법관이 결정을 내린다 할지라도 법관들의 의사를 무시할 순 없을 터였다.

뿐만인가?

자신을 처형하면 내전이다.

아무리 황가에 대한 위신이 달라졌다 할지라도 카를로스 대공이 가진 힘은 충분히 제국을 넘볼 수준이었다.

태평성대를 좋아하는 황제가 설마 내전을 바라겠는가?

“인신공양을 하며 흑마법을 향유한 죄. 악마교단과 거래하며 금지된 약물을 다룬 죄. 금지된 약물을 병사들에게 유포한 죄. 백성들을 수탈한 죄. 거짓 소문을 일삼아 황가를 모욕한 죄. 기타 47종의 죄에 대한 처벌은 결코 가벼울 수 없다.”

대법관을 자신을 처형시킬 수 없다.

황제가 직접 그를 움직인다 해도 마찬가지다.

애당초 황제가 내전을 바라지 않는데 어떻게 대공인 자신을 처형시킨단 말인가?

어불성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여, 카를로스 대공은 미소지었다.

어느 정도의 처벌을 면할 수는 없겠지만 목숨만 붙어있다면 재기할 수 있다. 적당히 갇혀있으면 눈치를 보다가 사면해줄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많은 걸 양보해야겠지만······.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내 영향력은 절대적이니까.’

제국은 자신을, 대공가를 버릴 수 없다.

제국이 대공가를 잃으면 내전도 내전이지만 외적으로도 전쟁이 발발할 것이었다.

제국의 패권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왕국은 많았으니까.

그들과 연합하면 제국은 무너질 것이다.

그것을 알고서도 감히 처형시킬 수 있겠는가?

“피고 카를로스 대공에 대해 판결하겠다. 사형.”

“······?”

잠깐.

카를로스 대공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재판장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대공가의 사람들 역시 지금의 결과를 듣고 잠시 정지되어버렸다.

“이게 무슨······?”

“대법관. 다시 말해보시오. 누구를 사형시킨다고?”

가만히 듣고있던 대공가의 기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 혼란은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크로프트를 위시한 황가의 기사들이 대공가의 기사들의 목에 칼을 겨눈 것이다.

다시금 조용해진 재판장.

카를로스 대공이 대법관을, 라우넬을, 황제를 바라봤다.

“······ 나를 사형시키겠다?”

“죽음으로 갚으라.”

황제 데우스가 말했다.

죽음으로 갚으라니. 무엇을?

“내전이 일어날 것이다. 황가의 힘은 대공가를 결코 넘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카를로스 대공이 조용히 말했다.

더 이상 황제에 대한 예우 따위는 없었다.

허나, 황제 데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죽은 시체에게는 볼일이 없다는 듯.

‘황제 혼자서 이런 결정을 내리진 못한다. 누군가가 조력하지 않는 이상.’

카를로스 대공가에 대적할 수 있는 자?

대공가를 적으로 돌려도 충분히 상대가능한 자?

없다.

인간중에는.

인간이 아닌 자 중에 고르라면 딱 한명 있기는 있었다.

“······ 페르세포?”

아.

그제야 카를로스 대공은 전율했다.

페르세포 대공. 다크엘프인 놈이 황가에 붙었다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페르세포 대공은 수백년 동안 중앙정치에 개입한 적이 없다. 황가의 편을, 그렇다고 카를로스 대공의 편을 들지도 않은 무조건적인 중립.

그 거인이 황가의 편을 들었다면 이 결정도 가능은 하다.

“페르세포. 놈이 붙었구나. 귀족들과 가신들이 등을 돌린 것도 페르세포의 영향이었어. 언제부터······?”

이제야 퍼즐이 맞춰진다.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카를로스 대공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게 할 수 있는 존재는 황제도 라우넬도 아니다.

오직 페르세포뿐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

언제부터 그가 황가의 편을 들었단 건가?

‘라인하르트 황태자에게 다크엘프 기사 하나를 선물로 줬다고는 들었다만.’

설마 이 결정에도 라인하르트가 관여하고 있다는 뜻일까?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

더욱 짜증나는 건 이 자리에 놈이 없다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주제에 이만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겁쟁이 황제가 결정할 수 있도록 바꾸고, 선하며 청렴하기만 하던 라우넬이 수작질을 부릴 수 있게끔 변하게 했다.

제국 전체가 변하게하는데 라인하르트가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카를로스 대공은 인정할 수 없었다.

‘내 눈은 정확하다. 라인하르트는 그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잘못보았을 리 없다.

꼭두각시로 내세우며 제국을 손에 품으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농락을 당했다는 건데.

처음, 그 어렸던 때부터 그만한 혜안이 있었다고?

연기를 한 채 자신을 완벽하게 속였단 말인가?

······ 시작부터 끝까지 놈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빠드득!

카를로스 대공이 이를 갈았다.

이빨과 양손에서 피가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할 수 없어······!!!”

*

“감사합니다, 페르세포 대공.”

“괘념치 마십시오.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니.”

처형이 끝난 뒤.

단두대에 의해 역사의 이슬 속으로 사라진 카를로스 대공을 바라보며, 정원의 위에서 라우넬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페르세포 대공이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카를로스 대공의 처형이 가능했던 건 페르세포 대공 덕이었다.

‘그가 돕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을 거다.’

라우넬은 지난날을 되짚었다.

북방을 떠돌며 카를로스 대공에 대한 증거를 잡고 있었다.

평화협정을 끝마쳤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기어코 숨겨진 탑을 발견했지만, 이걸 카를로스 대공과 연결시킬 고리가 없었다.

그 고리를 페르세포 대공이 모두 제공한 것이다.

심지어 일이 끝난 이후에도 카를로스 대공가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포섭한 것 역시 페르세포 대공이었다.

“왜 저를······ 황가를 도와주신 겁니까? 한 번도······.”

“황가를 도운 적이 없었지요. 지난 수백 년 동안.”

“그런데 왜······?”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황가가 아니라 황태자를 도운 것뿐입니다.”

“설마 라인하르트 황태자를 말입니까?”

페르세포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라우넬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라인하르트와 페르세포 대공이 그렇게 각별한 사이던가?

대체 어느 사이에 페르세포 대공을 구워삶은 건지 알 수가 없다.

“많은 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은 라인하르트 황태자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국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 역시 그뿐이지요.”

“······ 예.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라우넬은 입안이 쓴 것을 느꼈지만 타당한 말이었다.

제국을 이끌어야 하는 건 라인하르트다.

아무리 그가 반대해도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제국은,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는 그를 원하고 있었으니까.

라우넬 역시 라인하르트를 대신해 황제가 되고픈 마음은 버렸다.

라인하르트가 자신에게 그 자리를 양보한다고 했을 땐 혹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라인하르트의 공백은 더욱 커질 뿐이었다.

“하지만 황태자께선 라우넬 황자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에 대한 말을 했단 말입니까?”

“예. 진정으로 제가 원하는 세상은 자신이 아니라 라우넬 황자가 만들 수 있다고 말입니다.”

“페르세포 대공께서 원하는 세상이라면······ 다크엘프의?”

페르세포 대공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곤 계속해서 말했다.

“또한 라우넬님이야말로 제국을 더욱 위대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입니다.”

“······.”

라우넬은 입을 닫았다.

설마 라인하르트가 페르세포 대공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 줄이야.

워낙에 과묵한 성격이라 칭찬에도 인색할 줄 알았는데.

라인하르트가 황제가 되면 제국은 더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제국을 더 위대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 과제는 오직 라우넬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과대평가다.

제국을 위대하게 만들 사람이라니.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고개를 털며 라우넬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내 지평선의 끝을 보곤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데······ 저게 보이십니까?”

“저것이라니요?”

“저 하늘의 끝에서 다가오는 게 보이지 않으십니까?”

“음······?”

라우넬의 말을 따라 지평선을 바라본 페르세포 대공이 이내 경악했다.

하늘의 끝에서 검은 물결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먹구름이 아니었다.

“까마귀······?”

자세히 보자, 까마귀였다.

하지만 하늘을 물들일 정도의 까마귀들이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페르세포 대공이 두 눈에 경악을 담은 채 외쳤다.

“까마귀 성녀입니다. 신성교단의 최악이라 불리는! ”

“까마귀 성녀? 설마 이전에 가둬둔 아미르 추기경과 자스민 성녀 때문에?”

페르세포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까마귀 성녀는 왕국 단위의 대량학살을 일으킬 때만 움직입니다. 지난 300년 동안 단 한 번도 세상에 모습을 보인 적이 없을 텐데······!”

“··· 왜 까마귀 성녀가 제국을 향해 다가오는 겁니까?”

“공격을 위해서겠지요. 평화를 위해 보낼 존재는 아니니. 그리고······ 까마귀 성녀만이 아닌 것 같군요.”

까마귀들 사이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것이 이내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하며 가공할 마나를 흩뿌리는 존재.

그것을 본 라우넬은 굳어버렸다.

“······ 용.”

거대한 검은색의 용이, 제국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 마지막 위업(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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