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137화 (137/146)

교만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부산하게 떨어지는 타천사의 잔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흑뢰를 벗어난 타천사는 백여 마리.

그것들을 모조리 정리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여 분 남짓이었다.

흑뢰마저 무시했던 타천사들이 폭식의 몸짓 하나하나에 박살이 나고 있었다.

‘저게······ 폭식인가.’

폭식이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다.

가진바 마나의 양이 워낙에 보잘것없어 무시했건만.

막상 움직이기 시작하자 교만의 눈에도 쉽사리 구분되지 않을 만큼 빠르다. 타천사들의 움직임을 예측하여 따라잡는 것을 보면.

‘예측하고 있다.’

그래.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속도’보다 놀라운 것은 폭식이 가진 ‘예측능력’이었다.

타천사들이 움직일 몇 수 앞의 경로를 읽어내고 미리 제압하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마치 미래를 ‘읽는’ 것만 같은 움직임이었다.

더불어.

‘폭식은 마테리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자신의 살을 죽게 만들고 도려내게 한 저 마테리얼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폭식은 정면으로 마테리얼의 날개를 잡아내고 게걸스럽게 뜯어버렸다.

이유는 알 것 같았다.

‘폭식은 마나의 영향에서 자유롭다. 천마신공······ 무공 때문이겠지.’

무공.

마나를 비우고 육신의 가능성을 끌어내는 공부.

하지만 완성되어있는 존재인 마왕에겐 필요 없는 공부였다.

그래서 무시하고 괄시했다. 2대 대죄종인 천마가 아무리 강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있는 자신의 것을 내버리면서 익힐 정도의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다.

착오였다. 오만이었다.

마나에 의존하자 적들은 마나를 파훼하는 방법을 가져왔다.

‘천마는 먼 미래의 일까지 내다보고 있었단 말인가?’

마나에 의존하면 결국 마족의 미래는 없다는 걸.

무공을 익혀야만 비로소 저주에서 벗어나고, 적들의 공격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다는 걸 천마는 미리 알았던 걸까?

‘적들이 저 마테리얼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순간 폭식이 나타났다. 천마의 후계자를 자칭하며.’

천마의 이름을 이은 자. 폭식의 라인하르트.

녀석이 나타난 시기는 너무나도 공교롭다.

신녀와 함께 나타나더니, 이번엔 장막을 열어 타천사들을 들여보냈다.

타천사들은 흑뢰를 파훼했으나 역으로 다시 타천사를 파훼할 방법을 폭식은 갖고 있었다.

‘마치 예언처럼. 누군가의 의도처럼······.’

타천사들을 모조리 정리한 뒤 폭식은 자신의 앞에 재차 나타났다.

“뒷수습을 부탁하지. 나는 조금 쉬어야겠으니.”

폭식의 안색은 파리해져 있었다.

마나가 고갈되어 방전된 존재처럼.

하지만 폭식이 보여준 하늘에서의 전투는 교만조차도 경각심이 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타천사의 속도와 혀를 내두를만한 예측능력, 가공할 힘까지.

자신이 직접 전투에 나섰어도 비슷한 결과를 내긴 쉽지 않을 터일진대.

‘지금이라면 손쉽게 죽일 수 있을 터.’

척 보기에도 폭식은 힘을 잃었다.

힘을 모조리 쓴 지금이라면 폭식을 보다 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닭을 죽이는 것보다 쉽게.

목을 비틀어 죽이면 그만이다.

이 소란을 일으킨 폭식을 살려둘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 그러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폭식이 마계의 미래를 위한 안배라면?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소명할 기회는 줘야했다.

그가 그저 인간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죽였을 터이나.

‘폭식은 천산의 마왕이다.’

마왕이니까.

어쨌든 타천사들을 제거한 폭식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건 규율에 어긋난 짓이다.

아무리 폭식을 견제하고 방해하던 교만일지라도 스스로의 명예를 모르는 자는 아니었으니.

적어도 마왕이라면 그에 걸맞은 최후가 필요한 법이었다.

*

육문의 해방이 끝나자 순식간에 온 몸의 세포가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피부가 푸석해지고 주름이 생기며 전신에서 열이 빠져나간다.

급속도로 몰려오는 피곤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지경이었다.

‘연달아 쓰면 진짜로 죽겠군.’

이만한 피로감은 실로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만약 육문을 연달아 개방하면 그땐 죽음을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주먹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 느낀 희열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육체적 능력이 순식간에 수십, 수백 배로 격상했다.

마나와 차크라.

두 개의 힘을 합친 덕분에 순식간에 열어젖힌 경문.

그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문을 열어둔 동안은 가히 무적과도 같았다.

다만, 지속시간에 문제가 있었다.

‘길어야 10분. 그 이상 열어둬도 죽는다.’

10분이면 모든 기운이 소진된다.

소진되는 속도를 조절할 수는 없다. 문을 적게 여는 것 외엔.

하지만 10분이면 어지간한 고룡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10분이면 고룡도 죽일 수 있는 힘.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지.’

칠문, 팔문을 열면 어느 정도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 괜찮으십니까?”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아렐이었다. 아렐이 나를 등에 업고 있다.

“미칠 듯이 피곤하군.”

“이런 모습을 마족들에게 보여도 괜찮습니까?”

마족들이 나를 얕잡아보면 어쩌냐는 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괜찮다.”

이미 타천사들을 잡으며 보여준 모습이 있다.

이제 나를 허투루 볼 마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제로투’에게서 부족한 에너지를 공급받습니다.]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합니다.]

[충전이 완료될 때까지 접촉해있기를 권합니다.]

그런데 아렐의 등에 업혀있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방전된 제로가 재기동하더니, 아렐에게서 충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피로하긴 했지만 조금은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아렐에게 심어둔 제로의 복사본인 제로투가 제로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모양이었다.

“충전기인가.”

“예?”

“아무것도 아니다.”

“예.”

아무튼 빠르게 재생된다면 다행이었다. 이 피로감을 길게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자연회복을 하려했다면 족히 수십일은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렐에게 접촉하자 빠르게 회복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

순간 아렐이 고개를 갸웃했다.

힘을 주어 최대한 가까이 접촉했기 때문이리라.

“신경쓰지 마라.”

“······ 예.”

아렐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설마 이상한 착각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얼굴을 볼 수 있으면 표정을 확인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졸리군.’

강렬한 수마가 나를 덮쳐온 탓이다.

*

눈을 뜨자 아렐이 보였다.

그것도 꽤나 걱정하는 눈초리로.

“내가 얼마나 잔 거지?”

“··· 육일이 지났습니다.”

육일이라.

육문을 열어서 육일인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고개를 털었다.

‘살아있는 걸 보니 즉결처형은 면한 모양이군.’

육일간 무방비였다. 아렐이 있다지만 마왕들이 마음먹으면 언제든 나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살아있다는 건 일단 넘어갔다는 것이다.

특히 교만.

그가 나를 인정했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천산의 마왕으로 말이다.

천산의 마왕끼리는 서로 죽일 수 없다는 규율이 있으니.

“조금 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전하.”

“괜찮다. 그보다 옆에서 계속 나를 간호한 것이냐?”

“예······.”

충전 역할을 하는 아렐이 옆에 있어서 그나마 빠르게 깨어난 것 같다.

몸도 찌뿌둥하긴 했지만 어느정도 회복한 듯싶었다.

아렐이 아니었다면 수십일은 더 잠들어있지 않았을까?

“헬라는?”

“아직 의식에 돌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

내가 뻗은 사이에 의식이 진행됐다면 골머리가 아플 뻔했다. 마신전에 참가하지도 못한 채 탈락하는 초유의 상황은 면한 것이다.

“고맙다.”

“······? 당연히 제가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그럴까?

이곳은 사지다. 마계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남을 위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내 행보에 관해 의심치 않으며 묵묵히 따르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어지간히 충직한 기사라도 하지 못했을 텐데.

자리에서 일어난 뒤 나는 곧장 바깥으로 향했다.

‘닫히긴 닫혔군.’

천산 위의 균열이 닫혔다.

장막이 제스스로 회복했다고 해야할까.

저 보이지 않는 장막에 관해선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할 것 같았다.

“폭식이시여. 드디어 나오셨군요.”

“혈마종. 그리고 음마령. 나를 기다렸나?”

둘 다 헬쑥한 모습으로 궁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혈마종은 안절부절한 얼굴로 급히 말했다.

“다행입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마왕회의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마왕회의?”

“예. 균열이 열린 것에 대한 처우에 관한 회의라고······.”

“나의 처우에 대한 회의라는 말이냐?”

“아마도······ 그럴 겁니다.”

“내가 없이 나의 처우를 결정하겠다?”

“탐욕과 나태께서 회의를 열고자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마왕회의는 둘 이상의 마왕이 찬성하면 진행되는 게 관례인지라.”

같은 마왕임은 인정했으나 정식 마왕회의를 통해 자격을 박탈할 수도 있다.

아마도 이번 회의를 통해 내 자격을 박탈하고 공격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교만은?”

“교만께선 회의를 여는 것 자체를 반대하셨습니다.”

이건 또 의외였다.

회의의 주제가 뭔지 알면서도 반대했다?

규율대로 나를 처리할 수 있음에도 반대할 줄이야.

여태껏 가장 많이 나를 괴롭힌 게 교만이었다.

그가 대놓고 반대하는 건 상상도 못했는데.

‘탐욕, 그리고 나태라.’

문제는 그 둘이었다.

적어도 나의 처리에 대해 탐욕과 나태는 꽤 적극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를 포함한 현존하는 천산의 마왕은 다섯.

교만이 반대하고 탐욕과 나태가 찬성한다. 나머지 하나는 질투였다.

나 역시 반대의 입장이니 2:2지만 질투의 선택에 따라 뒤집힐 수 있는 것이다.

과반의 마왕이 자격의 박탈을 논하면 정말 박탈이 될 수도 있었다. 규율에 따라선 말이다.

그래도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나 없이 나의 자격박탈을 논한다?’

내가 쓰러져있는 것을 알면서도 진행했다.

지난 육일간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모를 리가 없다.

깨어난 뒤에 진행했다면 이처럼 기분이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중대사안을 졸속으로 처리하려는 게 기분이 나쁜 것이다.

항변할 기회마저 주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교만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마왕회의를 주최한 건 자기들 입맛에 맞게 처리하겠다는 의도다.

물론 나에 대한 경계심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내가 타천사들을 정리하는 걸 봤을 테니.

장막을 깬 것 역시 느꼈을 테니.

‘교만이 우두머리인 줄 알았는데. 이번 일로 균열이 생긴 모양이군.’

게다가 교만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금이 간 듯 보였다.

그간 느낀 바로는 교만의 의도에 반하려는 마왕은 없었다.

그런데 교만이 반대했음에도 마왕회의가 주최되었다.

탐욕, 그리고 나태.

둘은 교만이 약해졌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건지.

그러니 내게 겁을 먹은 두놈이 설레발을 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겠다.

실망이 크지만, 의도를 안 이상 가만히 당해줄 수도 없었다.

“알겠다. 회의에 참석하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 뒤집어버려야겠군.’

< 타천사(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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