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탐나는구나.”
탐욕.
천산의 마왕 중 하나인 그가 먼발치의 헬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본래라면 천산 경배의 날에 신녀가 나타나야 했지만 천목이 뿜어내는 저주가 너무 강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으니 안전을 위해 기일을 미룬 것이다.
어차피 신녀의 역할은 77일간의 의식을 끝내고 자격을 쥔 마왕에게 먹히는 것이었으니.
“아무리 마왕이시라도 더 접근하시면······.”
마족들이 탐욕을 둘러쌌다.
모두 신녀를 모시고자 중립적으로 구성된 마족들이다.
숫자는 적지만 역할에는 충실하다. 설마 천산에서 자신을 막아설 줄이야.
탐욕은 피식 웃고 말았다.
“걱정하지 마라. 구경 만 할 생각이었으니.”
지금은 구경만 할 생각이다.
애당초 헬라를, 신녀를 건들면 전쟁이다.
다른 마왕놈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발걸음한 건 궁금했기 때문이다.
일전 회의에서 한 번 보기는 했지만 경황이 없지 않았나.
‘아름답군.’
숨 막힐 듯이 아름답다.
아름다움의 가치는 종족을 불문하고 비슷했다. 하물며 탐욕은 세상의 모든 부와 아름다움을 쥐고자 하는 욕망의 마왕이었으니 헬라를 탐내는 건 당연한 이치다.
헬라는 제단 안에서 조용히 수양중이었다.
흰색의 의복과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임에도 상당한 태가 났다.
‘신녀라서 그런가? 천산의 정기를 받을수록 미모가 더 빼어나지는군.’
천산은 신녀에게 반응하고 있다.
천산의 정기가 신녀에게 모여들고 있다.
그럴수록 신녀는 하루가 다르게 아름다워져 가고 있었다.
한껏 정기를 머금은 채 77일간의 의식에 들어가면 그 자체로 반쪽의 신이 된다. 반쪽의 신을 먹어치운 마왕은 완전체로 거듭나며 대죄종의 자리에 오른다.
꿀꺽!
‘갖고 싶다. 탐하고 싶다.’
탐욕은 혀를 내둘렀다.
저 여린 몸을 부여잡고 미친 듯이 탐하고 싶었다.
이만한 탐욕이라니.
탐욕의 권능을 가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토록 갖고 싶어지는 감정은.
탐욕이 이를 악물었다.
손이 떨리고 눈이 빠져나올 것만 같은 기분을 겨우 억제할 수 있었다.
회의장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강렬한 매혹의 냄새다.
지금도 이럴진대 며칠만 더 지나도 참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진해지고 있다.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어차피 넌 나의 것이 되리라.’
탐욕은 애써 미소지었다.
갖고 싶은 것을 그는 갖지 못한 적이 없었다.
의식이 모두 끝났을 때 최종 승자는 자신이 될 것이었다.
77일의 의식을 마치고 나왔을 때, 신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될 것이었다.
교만? 나태? 질투?
놈들을 상대할 방법은 진즉에 생각해놓았다.
‘유일한 변수는 폭식일진대.’
허나 이제 막 마왕으로 등극한 폭식에 대한 대비는 하지 못했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인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라는 게 하나, 둘 밝혀지고 있는 실정이었으니.
‘마냥 무시할 수도 없지.’
단순한 인간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놈은 천마의 이름을 이었다.
천마신공마저 익혔으며, ‘무공’에 대한 진가마저 드러나지 않았는가.
무공이 악귀화를 막는 열쇠였다니.
시간이 지나면 놈은 거대한 세력마저 일굴 것이다.
물론 어중간한 세력은 도움이 안 된다.
그 세력에 다른 마왕이 접하느냐가 중요 쟁점이었다.
‘하지만 마신전은 모든 게 완벽해야만 비로소 이길 수 있는 싸움이다. 결정적으로 폭식의 무력에 대한 확신이 없을 테니 배신도 없을 터.’
탐욕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교만은 강하지만 혼자다.
반면 탐욕은 혼자가 아니었다.
교만을 견제하고자 사전에 짝을 맞춰두었다.
아무리 마왕들끼리는 신용이 없다지만 적어도 교만의 편에 붙지는 않을 것이다.
남은 건 폭식인데······ 얼마나 강한지 알 수도 없는 미지수에게 붙어먹을 마왕은 없다.
겉으로 보기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으니까.
느껴지는 마력은 인간치곤 대단했지만 그뿐이었다. 마왕들을 동요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힘을 숨겼더라도 이곳은 천산이다.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는가.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 폭음이 들리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탐욕은 저도 모르게 기운을 끌어모았다. 자신을 보호하고자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그가 몸에 지닌 666가지의 ‘유물’들이 함께 반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폭발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것을 곧 탐욕은 깨달았다.
단순한 ‘기세’ 만으로도 절로 방어를 하게 만들다니.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다른 마왕이 전력으로 공격을 해온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어떤 미친놈이 전쟁이라도 시작하려고 하는 걸까?
“······ 뭐냐, 저것은.”
하늘을 올려다본 탐욕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려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계와 중간계를 나누는 ‘막’이 뚫려있었다.
저건 외부에서 내부로 침입하는 걸 경계하는 보호막이다.
고룡들조차도 저 막을 뚫지는 못한다.
마왕들도 마찬가지다.
‘막’은 마나를 먹어치우는 기질을 갖고 있었으니, 마나에 의한 모든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탓이다.
물론 저 막이 뚫리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수천 년에 한 번씩 뚫리며 이상현상을 야기하곤 하였다.
예컨대 중간계에서 큰 변화가 불어닥쳤을 때.
새로운 주신이 탄생하는 그 순간.
막에 구멍이 뚫리며 거대한 ‘균열’을 낳곤 했으니.
“······ 대체 어떤 미친놈이?”
구오오오오-!
균열.
천산의 바로 위로 균열이 나타났다.
탐욕은 인상을 구기며 막이 뚫린 경로를 추적했다.
그리고 한 지점에 시선이 닿았다.
‘폭식의 궁? 설마 저게 폭식이 저지른 짓이라고?’
폭식의 궁에 다른 마왕이 있을 리 만무하다.
말인즉슨 폭식이 경계를, 막을 뚫어버렸다는 뜻이다.
고룡들도, 심지어 마왕들도 하지 못하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게다가 뚫리기 직전 느껴졌던 거대한 기세.
‘경계를 뚫을 무력조차도 갖추고 있단 말이냐?’
고룡도, 마왕도 뚫지 못하는 벽을 놈이 뚫었다.
이해할 수 없는 놈이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한다.
약해빠진 줄 알았는데 경계를 뚫어낼 힘마저 갖고 있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쩌면 자신을 포함한 마왕들조차도 놈을 조심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변수.
탐욕의 눈썹이 절로 구겨졌다.
*
[‘말피엘’ 소멸했습니다.]
[‘본 메일’의 강도 외피를 초과하는 데미지입니다.]
[파괴력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 나노머신의 에너지가 방전됐습니다.]
[비상전력으로 가동을 시작합니다.]
빠르게 떠오르는 제로의 메시지들.
나는 그것들을 읽을 겨를도 없이 하늘에 뚫린 구멍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고를 친 것 같다.
“······ 상상 이상이로군.”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마치 물 먹은 스펀지 같다.
여섯 개의 문을 동시에 열자 엄청난 파괴력을 갖추게 되었다. 하늘을 부숴버릴 정도라니. 팔문을 모두 열면 신이 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심지어 나노머신이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구역을 아득히 넘어섰다.
겨울의 활을 이용하는 것보다 강력하다.
활과 활시위를 당기는 동작도 필요 없으니 활용도 면에선 훨씬 좋았다.
‘말피엘의 외피를 단번에 뚫어버릴 정도다. 원죄의 힘을 빌렸을 때도 이 정도의 출력은 나오지 않았건만.’
말피엘과 싸울 때 원죄의 힘을 빌려 놈을 죽이긴 했지만 단번에 외피를 뚫지는 못했다.
그런데 지금 육문을 열자 놈의 외피를 한 방에 뚫어버린 것이다.
‘이 정도의 파괴력이라면 맞추기만 하면 고룡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고룡뿐이겠나.
마왕이라고 할지라도 피해갈 순 없으리라.
드래곤로드······는 모르겠다. 그녀가 싸우는 걸 본 적이 없으니.
확실한 건 드래곤로드라도 정면으로 맞으면 무사하기 힘들다는 거다.
‘그런데 하늘을 막고 있는 막이 뚫릴 줄은 몰랐군.’
마계의 하늘을 막고 있는 두꺼운 막.
마계와 중간계, 그리고 우주를 가르는 완벽한 결계다.
위성으로 살폈을 때도 저 막으로 인해 내부를 볼 수가 없었다.
저 하늘만큼은 견고하게 뚫리지 않는 요새의 그것과도 같았다.
헌데 그게 뚫린 것이다. 육문의 파괴력에 의해서 말이다.
‘저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현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광풍과 함께 하늘에서 무언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날개를 달고 있는 무언가.
저 날개가 무척이나 낯이 익다.
‘마테리얼!’
말피엘이 주신에게 선물받았던 마테리얼 구조의 날개다.
말피엘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나는 아렐에게 이식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 뚫렸다고 저런 것들이 나타나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위성으로 살펴보았을 땐 저런 놈들이 없었는데?’
그 수가 수백, 수천에 달한다.
만약 마계의 하늘 위에 저런 놈들이 있었다면 진즉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마계로 들어오며 모든 통신이 끊겼지만, 내가 마계로 들어오기 전까진 없었던 존재들이다.
즉.
‘내가 마계로 들어온 직후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고 봐야겠군.’
아무래도 바깥 상황이 변한 것 같다.
쿵!
쿠아아앙!
쿠쿠쿠쿠쿵!
마테리얼의 날개를 가진 강철의 인간들이 지상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
“왜 천산의 위에 균열이?!”
“‘타천사’다!”
광풍과 함께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강철의 존재를 바라보며 마족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쾅! 콰아아앙!
은빛으로 빛나는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꽂히며 산을 파괴했다.
딱히 다른 공격은 필요도 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지상에 박히는 것만으로도 파괴력은 충분했으니까.
“타천사가 왜 지금 이 시기에? 저 균열은 또 뭐란 말이냐?”
교만이 인상을 구기며 모습을 드러냈다.
타천사.
중간계가 용들의 구역이라면, 저 타천사들은 에덴의 존재들이다.
거짓된 이상향. 가짜 신들이 모여있는 곳.
그곳의 가디언이 바로 타천사였다.
‘중간계가 종말할 때마다 마계엔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을 통해 타천사들이 들어오곤 했지.’
새로운 주신이 태어날 때마다 막에 균열이 생긴다.
그 균열을 통해 타천사들이 들어와 한바탕 마계를 휘저어놓곤 하였다.
하지만 아직 시기가 이르다.
열세 번째 주신이 탄생하려면 시기상조였다.
하물며 이곳은 천산이다.
천산의 위에 균열이 생긴 적은 마계가 탄생한 이후 단 한 번도 없다.
‘방금 전 있었던 그 폭발. 그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하늘이 열린 건가?’
폭발이 일어난 순간.
아니, 일어나기 직전.
교만은 느꼈다. 가공할 위력과 그 안에 잠재된 기세를. 자신도 모르게 힘을 끌어올릴 뻔하지 않았던가.
누가 일으킨 현상인지는 몰라도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운이자 위협이었다.
내부에서 일부러 막을 허물고 균열을 일으키려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단순 소란으로 끝나진 않을 것이었다.
이곳은 천산.
가장 많은 마족들이 모여있는 곳이었으니.
이곳이 무너지면, 마계 역시 무너진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다만.”
쿠릉! 쿠르르릉!
교만의 전신에 검은 번개가 서리기 시작했다.
“일단 다 박살내고 생각해보마.”
흑뢰(黑雷)를 균열을 향해 던졌다.
동시에.
쩌어어어어어어어어억!
균열의 근처에서 터진 흑뢰는 순식간에 하늘의 반쪽을 먹어치웠다.
< 타천사(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