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134화 (134/146)

하늘이 걷힌다.

밤이 끝나고 있었다.

7년 주기로 발생하는 천목의 이상현상이 마침내 끝나간다는 방증이다.

누가 밤을 지웠느냐.

누가 천목을 재웠는가.

매번 의식이 진행될 때마다 논의되는 이야기.

하지만 이번에는 이견이 없을 듯했다.

모두의 눈이 오직 한 명에게 쏠려있었으니까.

“폭식의 라인하르트.”

이름을 불렀다.

교만이. 천산의 마왕 중에서도 가장 까탈스럽다고 여겨지는 그가.

이번 의식은 폭식의 시험대와도 같았다. 과연 인간인 그가 마왕으로서 적합한지에 대해 따져보는 장이었다.

물론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시험장이었다.

아무리 잘해도 모두가 편견을 가진 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허나, 그럼에도.

“천산의 마왕이여.”

교만은 인정했다.

그가 이름을 불렀다는 건 이제는 이변이 없다는 의미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라인하르트를 진정한 폭식이자 천산의 마왕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소리였다.

교만뿐만이 아니다.

다른 마왕들, 마족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그가 보여준 건 단순한 안무가 아니다.

‘······ 너는 나에게 무엇을 보여준 것이냐?’

교만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검무를 보고서.

그의 변화와 마족들의 변화를 느끼고서.

처음 악귀가 된 망령들의 이름이 적힌 망토를 가져왔을 때만 하더라도 ‘제법’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첫 의식에서 방향점, 지향점 따위를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누구보다도 개성적이며 강렬했기에 교만은 아름답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마왕이란 자리는 그저 감성적이라 해서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닌 탓이다.

‘내가 무엇을 본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보여줬다.

검무를.

하지만 단순한 검무 또한 아니었다.

그것을 뭐라고 해야 할까.

교류하며, 이어지는······.

순간적으로나마 하늘 너머를 본 것 같은 이 기분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래도 확실한 건 있었다.

저 검무는 결국 무공의 연장선이다.

무공을 익힌 마족들의 내부에 변화가 일고 있었다.

“천마신공은······ ‘완성점’이었군.”

완성점이라는 것.

스스로 완성되며 모두를 완성하는 마침표와 같은 것이라는 걸.

하지만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그러지 않은 건가.

교만은 천마를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힘이 있으면서도 마계를 고립시켰다고. 그만한 힘이 있으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은 무책임한 왕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적어도 1대 대죄종인 원죄는 싸우기라도 하지 않았나.

3대 대죄종인 야차는 무능해서라고도 해도.

그래서 교만은 다짐했다.

자신이 대죄종이 된다면, 힘을 갖추어 세상 바깥으로 나가겠다고 말이다.

폭식이 말했다.

“천마가 무공을 만들고 나눈 이유는 오직 이 한순간을 위해서다.”

이 한 순간.

각성의 순간을 위해서라고.

교만이 물었다.

“마족이 ‘악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말이냐?”

이 변화의 궁극에 무엇이 있는지 교만은 파악했다.

결국 악귀가, 혈종이 되는 걸 막기 위함이다.

이곳 마계의 저주는 너무나도 강력했다. 그 저주를 막기 위해 마족은 더욱 많은 마나를 품는 식으로 진화해왔다.

하지만 과도한 마나의 적재는 부작용을 야기했다.

이름을 잊고,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들어 악귀가 되는 것이다.

그 폭주 현상을 막는 게 바로 무공이며 천마신공이라는 이야기다.

‘악귀가 되는 걸 막는다고?’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이야?’

지켜보는 수많은 마족의 눈에 빛이 새어 나왔다.

악귀가 된다는 것. 자신을 잊어버린 채 변한다는 것만큼 두려운 게 또 있을까.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마족이든 마왕이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결국 변하고 만다. 그래서 잊을 기미가 보이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그런데 막을 수 있단다. 해결방법이 있단다.

관심을 안 가질 마족은 없으리라.

“힘이 있어 세상을 정복한다고 해도 모두가 죽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 하여 천마는 더 먼 미래를, ‘희망’을 그린 것이다. 언젠가 나타날 자신의 후계자가 이 악몽을 없애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천마는 씨앗을 뿌렸다.

씨앗이 자신의 대에서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지만 언젠가는 가능하리라고 믿으면서.

그 후계자가 바로 폭식, 라인하르트라는 뜻이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무공이라는 것이 천마신공에 의해 완성된다면 모든 마족이 익히도록 하면 되지 않았는가?”

“죄악의 마왕들이여. 그대들은 무공을 익혔는가?”

“··· 익히지 않았다.”

교만을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무공?

그딴 걸 왜 익혀야 하는가.

굳이 익히지 않아도 이미 자신은 강하다.

그런 건 약자들이나, 일반적인 마족이나 익히는 것이다.

“아무리 중요성을 설파해도 막상 겪지 않으면 필요 없다고 치부하는 법이다. 특히 마왕들처럼 자신을 ‘완성되었다’라고 착각하는 이들은 더더욱.”

··· 그 결과 필요 없다고 치부해버렸다.

마왕들이 솔선수범하여 익히질 않으면 그 분위기는 고스란히 마계 전역으로 뻗쳐나간다.

강제해서 익히게 해봤자 한계가 있다.

결과가 나오지 않는 한.

보이는 게 없는 한 불신을 계속될 테니.

애당초 ‘마나를 비우라’고 하는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자가 몇이나 있겠나.

하지만 보여줬다.

지금 이 순간, 변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느 정도 무공을 진심으로 익힌 자들이었다.

폭식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다. 무공을 익혀라. 비우는 법을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저주로부터 멀어질 테니.”

*

혈마종은 전율했다.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마님은 정복보다 우리 마족을 생각하셨다. 그리고 폭식의 마왕이야말로 진정한 천마님의 후계자, 재림이니!’

오랜 시간 천마에 대한 오해들이 있었다.

2대 대죄종 천마가 겁쟁이라거나,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자라는 것이다.

그 오해가 순식간에 깨졌다.

천마야말로 모든 마족을 생각하는 자비로운 존재다. 마족의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진정한 신이었다.

그리고 폭식의 마왕 라인하르트는 그 신의 후계자였다.

혈마종의 입장에선 가슴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무공을 익히면 악귀가 될 가능성이 작아진다는 게 진짜였나 보군.”

“그냥 소문으로만 여겼는데 ······.”

의식이 끝난 이후 마족들의 입은 바빠졌다.

그중 가장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게 혈마종이다.

어쨌든 혈마종이야말로 가장 먼저 폭식을 알아보고 충성한 자였으니.

혈마종이 시선의 중심에서 입을 열었다.

“마나는 저주를 지워주지만 동시에 악귀화를 촉진한다. 무공은 이 마나를 올곧게 다룰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무공을 익혀도 악귀화가 진행된 마족은 많을 텐데?”

“일반적인 무공으로는 ‘마나의 길’을 확립할 수 없다. 그 길을 알 수가 없다. ‘천마신공’의 도움 없이는 말이다.”

“천마신공이 완성점이라는 게 그럼?”

“천마신공을 익힌 자만이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 무공을 익혀 자신의 내면을 깨달은 자만이 그 ‘올바른 길’에 오를 자격을 얻는 것이지.”

자격이 있는 자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실제로 라인하르트의 검무를 보며 무공을 익힌 마족들은 깨달음을 얻었다.

신체 내부에서 흐르는 ‘올바른 마나의 길’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천마신공처럼 팔문을 열어 자연경에 오르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 ‘팔문’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올바르게 마나를 순환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 무공을 익히고 자격이 생기면 폭식께 부탁드려야하는 건가?”

“폭식께선 자격이 있는 자들에 한하여 천산 바깥의 마족이라 할지라도 기회를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아······!”

폭식.

천산의 마왕이나 되는 자가 천산 바깥의 마족들까지 신경을 쓴다.

만약 악귀화가 진행되는 걸 막을 수만 있다면 엄청난 숫자의 마족들이 천산으로 몰려올 것이다.

이게 정말 가능하다면 칠마종, 칠마령에 속하지 못한 마족의 부류들도 더 이상 공포에 몸을 떨지 않아도 되리라.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세력을 일구게 될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었다.

오랜세월 마족들을 괴롭힌 저주를 벗어나게 해준다니 그야말로 대격변이다.

“‘마신전’이 시작되고 폭식께서··· 그······ 변고를 당하시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곧 시작될 마신전.

오직 한 명만이 마신이, 대죄종이 된다.

당연히 마왕들이 죽어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천마신공을 익힌 건 오직 폭식뿐이시다. 폭식께서 돌아가시면 당연히 ‘완성점’은 없다.”

후계자도 없다.

누군가 가르쳐서 익힐 수 있다면 진즉에 천마의 후계자가 나왔어야 했다.

고로, 폭식이 죽으면 천마신공도 사라진다.

올바른 길로 인도할 인도자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혈마종의 대답을 들은 마족들의 눈에 복잡함이 서렷다.

자신이 따르는 마왕이 대죄종이 되길 원하지만 그 과정에서 폭식이 죽는다면?

오랜 마족의 숙원을 해소할 길이 영영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민들을 한다는 것 자체로 이미 인정받았다는 의미겠지.’

혈마종이 뿌듯함에 미소를 지었다.

고작 하루만에, 마족들은 라인하르트를 천산의 마왕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다른 마왕들과의 대결을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여론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폭식께선 길을 잃고 헤메는 마족을 인도해주실 구원자시다.’

하지만 내심 걱정되는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족들의 길을 인도해줄 자가 폭식이라는 걸, 라인하르트라는 걸 혈마종은 맹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었다.

그가 만에 하나 마계를 떠난다면?

갑자기 나타났듯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향수병이라도 걸릴 수 있는 것 아닌가.

‘···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라인하르트는 오직 마계의 구원자여야만 했으므로.

*

‘천마도 이런 경우는 상정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의식이 끝난 직후 궁으로 돌아온 나는 잠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순간 수많은 마족들과 교류하며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내게 벌어진 일은 도무지 상식선에서 생각할 수 없는 경우였다.

천마신공을 만든 천마마저도 나 같은 경우를 상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경문(景門)이라.’

여섯 번째 문.

그게 한꺼번에 열렸으니까.

나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순수 나노머신에서 방출되는 에너지를 차크라와 잘 융합한 덕분일까.

‘얼마나 강해진건지 잘 모르겠군.’

단순 나노머신의 에너지 축적이나 활용의 정도로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보니 제로도 내 무력의 정도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나가는 마족을 붙잡아 싸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증강현실’을 구현합니다.]

[Lv. 150 ‘말피엘’을 생성합니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있었다.

현실로 말피엘을 데려오면 그만이었으니.

물론 다른 이들에겐 안 보일 테지만, 내게는 똑똑히 보였다.

레벨 150의 말피엘.

원죄에 몸을 맡겨 이겼던 녀석.

하지만 지금이라면 원죄의 힘 없이도 충분히 해볼만할 것 같다.

“그 재수없는 면상도 오랜만이로군.”

“······.”

녀석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곧장 공격을 위해 움직였다.

거대한 용의 동체. 입을 벌려 단번에 나를 낚아챌 준비를 한다.

나는 문을 열었다.

개문(開門)에서 경문(景門)까지 여섯 개의 문을 확 열어젖힌 것이다.

동시에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머리가 어지러울만큼 기운이 폭발하는 기분.

날아드는 말피엘을 향해 움직였다.

“음?!”

주먹을 뻗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주먹과 함께 몸이 날았다.

힘을 주체할 수가 없다.

동시에.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 마왕(1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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