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은 단순히 몸을 사용하는 기술이 아니다.
잊고 있던 자신을 깨우고 인공적인 힘이 아닌 자연적인 힘을 각성하게 만드는 게 바로 무공이었다.
그리고 이곳 천산에는 상당수의 마족이 얕던 깊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무공이 천시받는 건 어디까지나 마왕들에 한해서였으므로.
칠죄악의 권능을 이어받아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마왕들은 따로 무공을 익히지 않았으나, 스스로를 불완전하다고 여기는 마족들은 모두 무공을 익혔다.
천마 이자백이 뿌려놓았던 씨앗.
그 씨앗들이 이곳에도 많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이 순간 각성(覺醒)하고 있었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무언가.’
그들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소우주와 마주했다.
천마신공의 묘리를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잠들어있던 소우주를 깨울 수 있었다.
곧이어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게 ‘마나’가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무언가.
이 세상의 태초부터 존재해온 생명 그 자체!
그게 자신의 내부에도 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그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씨앗은 마침내 발아해 그들의 몸에 열매를 남겼다.
동시에 심장을 옭아매던 마나의 흐름이 아예 뒤바뀌어버렸음을 인지했다.
‘마나가 안정화되고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던 마나가······.’
마족들도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나의 흐름이 불안정해지면 자신을 잊고 악귀가 된다는 사실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발물을 가슴에 안고 평생을 살아가는 셈이다.
그런데 지금 그 불안정한 기복이 사라지는 중이었다.
항시 몸을 거닐던 저주 또한 빠르게 감소하고 있었다.
‘축복이다.’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계신다.’
악귀가 되는 것은 그들에게 죽음과도 같다. 망자로 여겨진다. 그 폭주의 전조가 바로 마나의 불완정화였다.
그러니 이 현상은 그들에게 축복과도 같았다.
마나의 안정뿐만이 아니다.
마나를 담는 그릇. 고리의 모양 자체가 바뀌며 더 커지고 넓어진다. 본연의 가능성을, 무한한 성장의 길이 열렸다는 의미다.
화아아아아아-!
천목이 라인하르트에게 파란색의 빛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천마······.”
“두 가지 빛이라니······.”
붉은 원죄에 이어 파란색은 천마의 빛이다.
천마신공을 익히고 천마 이자백의 이름을 계승했다면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일이나.
하지만 천목이 한 마왕에게 두 가지 색을 동시에 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안무가 절정에 이르자 또다시 천목의 빛이 바뀐 것이다.
“황금의 물결이로군.”
“아름다워.”
“눈이 멀 것 같군.”
세 개의 빛.
특히 마지막 빛은 실로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는 말 외엔 표현할 수가 없었다.
황금빛의 물결이 쏟아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를 축복하듯. 그와 완전하게 교류하고 있었다.
동시에 마족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왕.’
‘천산의 마왕이시여.’
혈마종과 음마령을 비롯한 몇몇 마족들이 한쪽 무릎을 굽혔다. 깨달음을 얻은 자들도 오른쪽 손을 가슴에 얹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폭식.
인간이라 무시하고 비웃었던 그를, 천산의 마왕으로 인정한 것이다.
*
‘이만큼이나 방대한 저주는 처음이다.’
천목을 바라보는 마왕들의 시선에 약간의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오랜 시간 ‘경배의 날’을 겪은 교만조차도 천목이 이 정도로 저주를 뿜어내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죄악을 지닌 마왕들은 이날 천목과의 교감을 통해 저주를 끝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저주가 폭주해 악귀가, 혈종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탓이다.
‘이 정도의 저주라면······ 혈종이 나올 수도 있겠군.’
마왕이 폭주하면 혈종이 된다.
혈종이 미쳐 날뛰면 대참사가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의식 없이는 천목을 진정시킬 수 없다.
이만한 저주를 방관했다간 마계 전역이 붕괴할 테니까.
천목을 베면 되지 않느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천목은 마계의 버팀목이다.
저주와 마나를 동시에 내뿜으며 나름의 균형을 이루고, 중간계의 가짜 신들을 막는 결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벨 수 없다.
안정시키는 게 최선이다.
‘혈종이 될 낌새가 보이면 그 즉시 죽인다.’
의식에 진심이 아닌 마왕은 없다.
하지만 교만은 그 이후까지 내다보았다. 만약 혈종이 되려는 낌새가 보이면 그 즉시 처단키로.
혈종이 되는 걸 놔두면 천목을 부수거나 이곳 천산을 망가트릴 위험이 있었다.
그나마 탐욕이나 질투, 나태는 오랜 시간 의식을 지낸 경험이 있다.
하지만 한 명, 유일하게 폭식만은 이번의 의식이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처음의 의식이 역대 최고급으로 어려운 의식이 되었다.
폭주하여 혈종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게 누구냐 묻는다면 단연코 폭식일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안무를 익혔느냐고 물었던 것이고.
당연히 교만의 시선은 폭식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건 폭식의 안무가 아닐진대?’
하지만 폭식의 안무가 시작되고 교만은 이맛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칠죄악의 안무는 정해져 있다.
천목과 교감하며 천목을 안정시키는 춤은 각 죄악마다 조금씩 달랐다.
그런데 폭식은 정해진 안무가 아닌 자신만의 검무를 추고 있다.
‘··· 무공이로군. 천마신공에 담긴 검무인가?’
땅을 진동시켜 순식간에 마나를 동결하는 힘. 천마군림보다. 천마신공의 전반부이기에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 이어진 검무(劍舞)는 지극히 평범했다. 어느덧 손에 쥐어진 검을 아래에서 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역순으로 다루었다.
그것도 보는 이가 답답할 만큼 느리게 말이다.
‘마나의 모든 작용을 배제했다······ 마나를 배제한 육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거늘. 하지만 완전한 배제는 아니다. 모든 마나를 오직 한 곳에만 몰아두고 있다.’
마나는 육체를 움직이는 원동력과도 같다.
모든 생명체는 마나와 함께 성장하니 당연한 일이다.
작은 근육의 움직임 조차도 마나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생명체는 마나와 함께 공존하는 진화의 길을 택했다.
그런데 지금 폭식의 라인하르트는 그 마나를 모조리 배제했다. 한 톨의 마나마저 육체를 돕는 걸 거부한 채 오로지 본인의 힘만으로 움직이고 있다.
뼈가 없는 상태로 몸을 움직이는 것과 같다. 혹은 근육이 없는 상태로 힘을 내는 것과 같은 상태다. 그야말로 극한.
극한의 상태에서 움직이는 검무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지만 폭식의 몸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다시 마나가 돌아왔기 때문에?
‘아니다. 아예 다른 무언가. 완전히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다.’
마나가 텅 비게 되자 새로운 힘이 깨어났다.
저게 무엇인지 교만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저 힘이야말로 지극히 자연적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광활하며 위압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폭식은 마나의 힘을 완전히 버리고 새롭게 자신을 탈바꿈 시켰단 말인가?
교만의 델바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조차도 아니다.
한순간 방전되어 힘을 잃은 마나를 순식간에 몸의 한구석에 몰아넣었다. 완전히 증발시킨 게 아니라 마나를 한데 묶어 더 극적인 효율을 내고 있었다.
새로운 힘과 마나가 함께 소용돌이친다.
저걸 뭐라고 해야할까.
‘공존.’
거부하지 않는다. 부정하지 않는다.
천마의 룬에 담긴 광활한 기운과 마나는 공존할 수 없다.
천마 역시도 마나를 전부 버리라고 했으나 그 역시 완성되진 못했다.
그래서일까. 폭식은 아예 새로운 제 3의 힘을 일깨웠다.
저걸, 저 힘을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혼돈.’
공존의 다른 말은 혼돈이다.
*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든다.
천마는 버리라고 했다.
하지만 제로를 버릴 수는 없었다.
제로 역시 나의 재능이고 내 일부라면 그걸 버려야 얻을 수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제로를 부정하는 건 나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으므로.
또한 생명체는 결국 나노머신과 결합하여 진화해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이 진화의 산물을 마냥 부정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
아무리 인위적인 것일지라도 오랜시간 생명에 깃들어 진화를 만들었다면 이 역시 결국 돌고 돌아 결국 자연적인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래서 버리지 않았다.
다만, 용도를 바꿨다.
‘나노머신의 폭주원인은 너무 많은 쓰임새에 있다.’
너무나도 의존해왔다.
하지만 처음부터 나노머신의 쓰임새는 정해져있었다.
저주를, 방사성 물질을 정화하는 것.
육체를 치유하고 회복을 돕는 것.
그 쓰임새를 넘어서 모든 것에 활용하려하니 과부하가 날 수밖에.
나는 과감하게 이 구조를 바꿨다.
[방전된 나노머신을 한곳에 모아, 압축합니다.]
[불완전한 나노머신을 폐기합니다.]
[용도미상의 비인가 나노머신을 삭제합니다.]
몸에도 독기가 쌓이면 굼떠지고 병이 나듯이.
나노머신도 오래 사용하거나 체내에 오랫동안 존재하면 불안정해지기 마련이다.
몸에 쌓인 독소는 나노머신이 제거한다고 쳐도, 나노머신에 쌓인 독소는 그럼 누가 제거한단 말인가?
100% 자연소멸을 하는 게 아닌 탓에 결국 그런 것들이 쌓여 폭주를 일으키는 것이다.
‘내게는 제로가 있지.’
천마에게는 없었던 것.
그래서 그는 마나를, 나노머신을 모조리 버리는 길을 택했다.
불안정하며 독소가 쌓인 나노머신을 따로 골라낼 수 없으니까.
허나 나는 가능하다. 제로가 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고르고 골라낸 나노머신들을 한데 모아 다시 재구성했다.
건강해진 나노머신들을 발끝에서 머리 끝으로 흐르게 순환구조를 바꿨다. 길을 만들고 오직 필요한 곳에만 쓰이게끔 만든 것이다.
그러자 룬의 기운이, 분리되어있던 천마의 기운이 비로소 마나와 동화되기 시작했다.
교류.
이 또한 그와 같은 맥락이리라.
비로소 온전하게 몸을 노니는 기운들. 천마 이자백은 이것을 이렇게 불렀다.
‘차크라.’
업의 힘. 육체와 정신을 잇는 원형의 차크라라고.
【룬의 기운으로 말미암아 차크라를 열였다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팔문(八門)을 모두 열었을 때 비로소 우주를 깨닫고 자연경에 들게 되리라.】
【하나씩 열며 마지막에 다다르는 길은 불가해와도 같으니.】
개문(開門), 휴문(休門), 생문(生門), 상문(傷門), 두문(杜門), 경문(景門), 경문(驚門), 사문(死門)을 모두 열면 비로소 진정한 신이 된다는 것이다.
천마조차도 마지막 사문을 열지 못한 채 죽었다.
깨달았을 때 비로소 첫 번째 문인 개문을 열 수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개문(開門).
마침내 문이 열렸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휴문(休門).
두 번째 문. 그조차도 쉬이 열렸다.
천마 이자백은 하나씩 열어가야한다고 말했다.
하나를 여는 것조차도 불가해와 같으니 그야말로 고해의 길이라고.
오랜세월을 오직 팔문을 여는데 바쳤던 천마도 두 개를 동시에 열지는 못했다.
그러니 동시에 두 개가 열린 건 역시나 놀라운 일이다.
‘생문(生門).’
하지만 두 개로도 끝나지 않는다.
한 번 열린 문은 계속해서 다음 문의 빗장을 강하게 때리고 있었다.
세 번째 문인 생문까지도.
그러나 이 역시 끝이 아니었다.
‘상문(傷門).’
네 번째 문이 열렸을 때, 소우주의 무리들이 보였다.
수많은 소우주를 잇자 내 존재는 한없이 작아진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분명히 내가 있었다.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며 존재하는 나라는 존재가 말이다.
단순한 각성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단어로는 이것을 표현하기 힘들었다.
나였다.
이건 나를 알아가는, 오직 나를 위해 존재하는 과정이었으니.
이 정도면 족하다.
만약 천마가 보았다면 배가 아파 뒤집어졌을 광경.
헌데.
‘두문(杜門)······!’
불가해의 문이, 계속해서 열린다.
< 마왕(1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