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132화 (132/146)

의류란 무엇인가.

[몸과 외모를 꾸미기 위한 복장입니다. 또한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세 가지 요소 중 하나로 보온과 방어, 품위 따위를 위해 사용됩니다.]

제로의 백과사전 같은 대답.

말인즉슨, 치장을 위한 도구다.

그리고 오직 인간만이 이 ‘옷’에 집착한다.

어떠한 이종족들도 이렇게 ‘옷’에 구애받지는 않는다.

그래서 마족들의 의식에 입을 옷이 중요하다는 말은 꽤 충격적이었다.

“오직 인간만이 옷과 치장에 목숨을 건다. 입지 않으면 수치심을 느끼고, 사회생활 자체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크엘프인 아렐은 딱히 옷에 구애되지 않는다.

다른 엘프들도 편하게 주요부위를 가릴 정도면 아무거나 입어도 된다는 주의였다.

유독 인간들만이 옷에, 입는 것에 구애되는 것이다.

“그럼 마족은 인간인가? 그들도 옷과 치장에 목숨을 거는데?”

내가 묻자 아렐은 고개를 저었다.

“유사성은 있지만 인간과는 다른 이유이지 않겠습니까?”

“다른 이유라면?”

“마족은······.”

아렐은 말끝을 흐렸다.

분명히 인간과는 다른 이유로 옷을 중요시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러자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답했다.

“마족은 개성을 중요시합니다. 언제 악귀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구분할 수 있는 겉의 치장을 조금씩 다르게 하는 편입니다.”

빌헬름이었다.

의류작업에 들어간 뒤 혈마종과 음마령의 접촉은 최대한 피하고 있었다.

괜한 덜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곳 천산과 관계가 없는 아렐이나 빌헬름은 곁에 두었다.

아무리 혼자 만든다고 해도 어느 정도 손과 발이 되어줄 이는 필요했던 탓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빌헬름의 말대로다. 이름을 잊으면 악귀가 되고, 무덤에 갇히지. 악귀는 다 비슷하게 생겼으니 악귀가 되었을 때 자신을 구분할 수 있는 치장품이 더 중요할 테고 말이다.”

“······ 정확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빌헬름이 놀란 눈을 했다.

악귀를 가두고자 만든 탑.

그것은 무덤이다.

악귀가 되는 마족은 망자다.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무덤을 만들어주고, 그 탑에 생전에 마족이 갖고 있었던 물건을 넣어준다.

악귀가 되면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라인하르트에게 따로 알려준 적은 없었다.

마족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는 벽을 넘어온 외인이지 않나.

‘천마 이자백의 이름도 갑자기 생겨났지. 귀인인 건 분명한데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외눈족인 빌헬름은 장벽의 수많은 관리자 중 하나다.

말이 관리자이지 제 죽을 곳에 있는 것과 같았다.

천산의 주류로 인정받지 못한 마족들의 최후는 죄다 비슷했으니까.

결국 이름을 잃고, 악귀가 된다.

모든 걸 포기한 채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는데 그날 수많은 이름을 계승한 라인하르트가 나타났다.

더불어 신녀까지.

솔직히 헬라라는 여자가 신녀라는 말을 크게 믿지는 않았다.

만약 거짓이라면 천산에 도착한 이후 빌헬름 역시 죽었을 것이었다.

‘진짜 신녀였다. 게다가 그는 천산의 마왕이 됐고······.’

그때까지만 해도 천마 이자백의 이름은 라인하르트에게 계승되지 않았다.

그런데 천산서고를 나선 그 시점부터 천마의 이름이 추가되었다.

‘변화의 중심에 서신 분이다. 이 빌어먹을 현실을 바꿔줄 구원자일지도 모른다.’

마계의 현실.

이곳 천산과는 전혀 다른 악몽들.

하루하루 죽어가기만을 기다리는 그 공포를, 자신을 잊어가는 마족들이 짓는 그 눈동자를 빌헬름은 잊을 수가 없었다.

주류가 아니라서 그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들.

빌헬름이 천산에 오른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하소연이라도 해보려고. 따져라도 보려고 온 길이었지.’

신녀라는 말의 진실 여부는 처음부터 크게 상관이 없었다.

천산의 마왕들에게 한 마디 해보려고 온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천산 바깥의 일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교만조차도 용들이 만든 장벽이 한순간 꺼졌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솔직히 그땐 정말 어이가 없었다.

마계의 모든 걸 알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장벽에 대해선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야하지 않나?

‘마왕들은 바깥 일에 크게 관심이 없다. 그러니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분이라면, 아예 외지에서 온 계승자라면······.’

어쩌면 라인하르트야말로 이 현실을 바꿔줄 구원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인간과 마족이 옷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다르다. 내 방식대로 디자인을 정했다간 비웃음만 살 테지.”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빌헬름이 의지를 굳혔다.

최대한 그에게 협조하자고.

······ 그 의지를 읽은 내가 웃으며 말했다.

“마족들의 ‘개성’을 모아와라.”

“이곳 천산에 거주하는 마족들의 개성을 말입니까?”

“그런 거라면 혈마종이나 음마령에게 부탁했겠지. 허나 빌헬름, 너라면 천산 바깥 마족들의 개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터.”

천산 바깥의 마족들.

폐기되어 버려지는 자들에 대한 개성이라니.

그딴 것을 알아서 뭘 한단 말인가.

“그런 거라면 자신 있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든다.

다른 마왕들은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것들까지 파악하려는 저 자세가.

빌헬름이 의지를 불태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

······ 그리하여, 현재.

붉은빛을 보며 나는 이체를 띄었다.

천목에서 흘러나온 저 붉은 빛에 진짜 원죄가 반응하고 있었으니까.

마족들의 반응 역시 심상치 않았다.

[천목이라 불리는 대수(大樹)에서 비정상적인 양의 방사성 물질과 나노머신의 배출을 확인했습니다.]

[천목의 중심부에서 특정 주파수를 확인했습니다.]

[코드네임 ‘사신’입니다.]

[‘사신’이 특급 프로세스 ‘칠대죄악’에게 반응합니다.]

죽음의 신. 그게 저 천목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신은 칠대죄악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내가 지닌 폭식과 분노에게.

더불어 원죄에게.

하지만 나는 원죄를 가둔 철창을 열지 않았다. 원죄에게서 강렬한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문의 제어권한은 어디까지나 내게 있다.

가프는 열쇠를 사용하는 방법에 관해 확실하게 일깨워주고 떠났으니까.

적어도 지금 놈을 풀어줄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허······.”

“생각보다······.”

마족들의 반응을 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교만은 검게 늘어진 천을 몇 겹이나 만 두꺼운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자신의 개성을 보이기에 충분하다는 듯.

탐욕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황금의 갑옷과 장신구를 착용했으며, 질투는 붉은색의 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붉은색의 면사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나태 역시 이전과는 달리 회색의 망토와 제복을 걸친 채였는데, 아무리 봐도 마족의 의상 역시 인간의 그것과 굉장히 비슷했다.

‘인간이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건지, 그들이 인간에게 영향을 받은 건지.’

확실한 건 인간과 마족은 닮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바닥을 끌 정도로 기다란 망토를 걸치고 레이스가 달린 검은 옷을 입었다. 검은색 가면까지 썼으나 이 자체로는 크게 인상적인 점은 없다.

하지만 망토는 헤지고 찢어져 있었다.

수많은 찢긴 망토들을 엮어서 만든 것처럼.

색감과 재질, 찢긴 정도가 가지각색이었다.

일반적이라면 쓰레기를 엮어 만든 쓰레기로 볼 텐데, 그런 것들이 한데 엮여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색감의 배치와 찢어진 정도 따위를 모두 계산하고, 장인의 손길로 덧대어도 저런 완성품은 나오기 어려울 것 같았다.

얼마나 어려운 수준의 재봉인지 알고 있기에 마족들은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작 30일가량으로 저만한 완성품을······?’

교만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망토 하나뿐이다.

하지만, 하나면 족했다.

“아!”

“망토 위에 글자가······!”

그뿐만이 아니다.

망토 위에 촘촘하게 떠 오르는 글자들.

정(正)자로 쓰인 단어는 분명히 마족의 언어였다.

‘자신의 이름이라도 적어놓은 건가?’

마족의 글자로 적어놓은 이름이라.

교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만큼이나 개성적인 것은 없다. 그것을 깨우치고 자신의 이름을 적어놓았다면 마족들의 감성을 움직일 순 있을 것이었다.

‘그런 것치곤 글자가 너무 많군.’

하지만, 글자가 너무 많다.

촘촘하게 새겨진 글자는 무려 2천자가량이었다.

그리고 그 글자들은 모두 각기 다른 이름들이었다.

“하슬러, 판테논, 가르비아나, 마루······ 어디서 들어본 이름들인데.”

“잠깐. 악귀가 된 마족들의 이름 아닌가?”

이름을 잊고 존재를 잊어 악귀가 된 자들.

지금은 잊혀진 그 이름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중에는 유명한 이름들도 섞여 있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설마 저 글자들이 전부 악귀가 된 마족들의 이름이라고?”

“허······.”

모든 마족이 침음을 흘렸다.

두 눈에는 감탄이 떠올랐다.

이름이야말로 개성이다.

이미 사라진 이름.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그 이름들은, 그야말로 유일한 개성일 것이다.

모든 악귀의 이름이 적혀있진 않겠으나 마족들도 모르는 마족들의 이름을 수도 없이 새겼다.

마치 묘비(墓碑)처럼.

저건 옷이 아니라 망자의 이름이 적힌 묘비다.

찢기고 헤졌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이름들이었다.

그 어디에도 폭식의 이름은 없다.

오직 망자의 이름만을 적어놓았다.

누구도 하지 못한 발상.

그 발상을 마족도 아닌 인간이 해냈다.

동시에 라인하르트를 바라보는 마족들의 시선이 변했다.

직접 입으로는 꺼내지 못했으나 저 이름들이 그들의 심장을 간질이고 있었던 탓이다.

잊으면 끝이다. 탑 안에 가두어 괴물처럼 여기고만다.

하지만, 그 누구라도 악귀가 될 수 있었다. 결국 모두가 잊어 영영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남았다.

기억하는 자가 있었다.

저 망토에. 저 인간에게.

‘······ 어이가 없구나.’

교만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고작 망토 하나.

하지만 하나면 충분하다.

아니,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저건 하나가 아니라 수백, 수천 가지의 완성품과도 같았으니까.

자신의 이름이 아닌 남의 이름을 새기는 것.

마족은, 마왕은 오직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개성을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지 않나.

남의 이름을 수도 없이 새겨놓은 찢어지고 헤진 망토를 누가 만들 생각을 하겠는가.

“······ 아름답군.”

교만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옷. 입는 것에 집착한다는 건 결국 ‘감성’이 짙다는 뜻이다.

마족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성적이다.

단순히 입을 옷을 디자인할 게 아니라 그 점을 파고들어야 했다.

그리고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빌헬름의 도움을 빌리길 잘했군.’

빌헬름은 악귀가 된 마족들의 이름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 계승된 마족의 이름들도 하나도 빰짐없이 달달 욀 정도였으니.

그의 지혜를 빌려 망토에 악귀가 된 망자들의 이름을 수놓았다.

그 결과 마족들은 동요했다.

나를 비웃으려던 교만조차도 눈가가 떨릴 지경이었다.

“‘의식’을 위한 안무는 익혀놓았겠지?”

교만이 물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아아아아아아-!

동시에, 천목에서 더욱 많은 방사성 물질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마왕들이 일제히 천목의 가까이 다가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교감. 감정의 힘.’

내가 바란 것이다.

저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교감. 저들의 감정을 뒤흔들어 내게 집중시키는 것.

천마는 무공이라는 씨앗을 뿌렸다.

아직도 인식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그래도 많은 마족들이 무공을 익히고 있다.

씨앗은 이제 발아를 시작했고 결실을 맺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천마신공은 교감으로부터 시작한다.’

혈마종이 그랬듯이.

천마신공을 보고 벽을 넘어 ‘특별한 힘’을 깨닫는 것.

일반적인 서클과도 다른 무한의 그 표식은 ‘거대한 원동력’이었다.

천마조차도 이 힘에 대해서 제대로 분류하지 못했으나 한달이 지난 지금, 나는 왜인지 이 힘에 대해 알 것만 같았다.

‘이것은 교류의 힘이다.’

과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그 무엇으로도 정의하지 못하는 것.

바로 감정의 교류다.

천마신공은 그 교류를 더 체계적이고 단단하게 만드는 기술일 뿐이었다.

소우주와 소우주가 만나 마침내 광활한 대우주를 만드는 방법.

하나로는 완성될 수 없으나 무한히 이어진다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천마가 말한 자연경이다.

쿠르르르!

직후 발을 굴리자, 순간적으로 주변 나노머신의 에너지가 끊겼다.

“처, 천마군림보!”

“흡······!”

알아보는 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다.

‘천마군림보는 모든 게 끊어지게 만들지만 동시에 이어지게도 만들지.’

혈마종은 단순히 내 안무를 보고 벽을 넘은 게 아니다.

그 역시 천마군림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나노머신의 에너지가 방류된 채 짧은 순간이나마 자기 자신을 맛본 덕이다.

동시에 나와 이어진 덕이다.

천마가 뿌려놓은 씨앗. 무공을 익힌 자만이 그 찰나의 순간을 깨달을 수 있다.

그조차도 천마신공을 익힌 자와 교류하고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펄럭!

망토를 펄럭였다.

발끝에서 머리 끝에 이르는 이 소우주를 따라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아······!”

“······!!!”

< 마왕(1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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