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군. 혼자 처리하기엔 시간이 부족할 텐데?’
교만의 델바란은 두문불출하는 폭식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천산의 규율 중 ‘천산 경배의 날’에 마왕이 입을 옷은 직접 짜는 게 원칙이다.
물론 그렇다고 원단을 정하고 디자인을 짜고 재봉질을 하는 마왕은 없다. 아무리 개성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마왕이 직접 옷을 만드는 모습은 퍽 웃기지 않은가.
다른 마왕들은 휘하 마종과 마령들에게 대략적인 디자인 정도만 요청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폭식은 다르다.
‘규율대로 처신하지 않으면 참석 자체를 불가하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이미 다른 마왕들은 모두 ‘천산 경배의 날’에 입을 옷을 완성한 뒤였다.
이제 막 들어온 폭식만이 미완성 상태였으니 더 강한 잣대를 들이밀어 제알아서 포기하게끔 할 생각이었다.
규율대로. 원칙대로 폭식이 직접 자신을 표현할 옷을 만들라는 것.
혈마종이나 음마령의 도움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정말 혼자서 30일 안에 가무를 익히고 옷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 완성도가 얼마나 볼품없겠는가.
그야말로 눈을 뜨고 못 볼 지경일 것이다.
“정말 혼자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말이냐?”
“예, 위대한 교만이시여. 폭식은 오직 혼자서 ‘경배의 옷’을 만들고 있습니다.”
감시자가 말했다.
폭식의 궁을 지켜보는 감시자는 셀 수 없이 많다.
자신이 지시한 자들 외에도 다른 마왕들 역시 관심을 가지며 지켜보고 있다.
빈틈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정말로 만들고 있다.
그 말을 듣고 교만은 피식 웃고 말았다.
“완성도는커녕 ‘경배의 날’에 걸맞은 의상조차도 기대할 수 없겠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걱정?
그런 건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애당초 이제 막 마왕이 된 애송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것도 마계출신조차 아닌 중간계의 인간이다.
아무리 죄악의 권능을 지녔다 한들 인간이 마족의 축제에 얼마나 알고 준비를 할지 기대하는 것조차 어리석은 일이다.
그저 비웃음만 나올 뿐.
‘인간은 가짜 신들의 품에서 조종당하며 살아가는 모조품들이지.’
수만 년을 살아온 교만은 중간계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제법 상세히 아는 편이었다.
‘주신과 용들은 특정 주기로 인간을 청소한다. 개체수의 증가를 막고, 인간이 강해지는 걸 꺼리기 때문일 터.’
마지막 위업.
인간에겐 종말과도 같은 일을 수없이 반복하는 게 저 신이라는 작자들이다.
자신들의 허용 가능한 범위에서 인간이 생존할 수 있도록.
어항 속의 물고기와 다를 바가 없는 게 바로 인간이었다.
아니, 물고기라는 평도 아깝다.
벌레다. 벌레와 다를 바가 없다.
허나 그보다도 더욱 웃긴 것은.
‘그러면서도 변화 없이 저 가짜 신들을 따르는 인간들. 자신이 어항 속의 물고기나 벌레 따위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의심 없이 따르기만 하지.’
그래서 교만은 인간을 싫어한다.
혐오한다.
시간이 지나도 그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맹목적으로 저 가짜 신들을 믿기 때문이다.
멍청하며 안일하다. 아무리 체계적으로 세뇌됐다고 하더라도 일말의 의심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교만은 단 한 번도 인간이 신에 대한 ‘불신’을 품는 걸 본 적이 없다. 한데 뭉치지 못하고 분열하며 항상 멸망하는 게 인간이었다.
끝내 신을 저주하면서도 결국은 신을 찾는 게 그들이었다. 그래서 숱하게 반복되는 멸망에 순응하고 있는 게다.
참으로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종족이다.
반면에 마족은 어떤가.
오직 신에 대한 미움과 반감으로 뭉쳐있다. 저 가짜 신의 타도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마족이 뛰어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만은 2대 대죄종인 천마와 3대 대죄종인 야차 역시 싫어했다.
특히 천마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컸다.
‘또한 천마는 힘이 있으면서도 마계를 구하지 않은 존재다.’
마계가 태동한 이후 가장 강력했다 전해지는 존재가 천마다.
하지만 천마는 무공 따위나 만들며 평생을 보냈다.
마계를 구할 힘이, 저 신들을 멸할 힘이 있으면서도 그러지 않았다.
적어도 3대 대죄종인 야차는 그 정도의 힘은 없었으니 그저 권력에 취한 무능한 놈으로 치부하더라도 천마는 아니었다.
그래서 교만의 델바란은 천마를 싫어한다.
인간을 혐오한다.
그런데 그 두 가지 경우를 모두 갖춘 놈이 나타났다.
‘폭식. 인간이며 천마를 계승한 자······.’
인정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없다.
어째서 무능력한 인간에게 천마의 이름이 계승되었는지.
인간이 어떻게 원죄의 권능을 이은 것인지도.
그래서 싫어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규율에 따라 천산의 마왕이 되었으니 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 누구도 너를 진짜 마왕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천산 경배의 날’은 천산, 더 나아가 마계 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행사다.
그런 날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나타나 창피를 당한다면 어느 마족이 그를 따르려고 하겠는가.
앞으로 있을 ‘마신전’에선 마족들의 기반을 닦는 것 역시 중요하다.
아무런 인상도 주지 못하고 그저 눈살만 찌푸리게 만드는 마왕은 마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것이고 마신전에서도 자연히 나가떨어지게 되어있었다.
“기대되는구나. 경배의 날이.”
놈이 얼마나 비웃음 거리가 될지.
교만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
천산 경배의 날.
천산에 있는 백만의 마족과 모든 마왕이 한데 모이는 큰 행사다.
이는 ‘천목’을 안정시키기 위한 날이기도 하였다.
천산의 중심부에서 하늘까지 뻗은 ‘천목’은 7년 주기로 비정상적인 활동을 보인다. 상상을 초월하는 저주와 마나를 동시에 내뿜기 시작하는 것이다.
“저, 저게 뭐야?”
“저주가 눈에 보일 정도라니······.”
천산의 마족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마계의 주류라 인정받는 열 네 종족들.
그들은 천목을 바라보며 기겁하고 말았다.
“허. 경배의 날을 수십 번은 겪었지만 오늘이 가장 심한 것 같군. 신녀께서 나타나신 것 때문인가?”
천목이 내뿜는 저주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경배의 날을 수십, 수백 번 겪은 마족들도 이 정도로 진한 저주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천산 바깥은 난리가 났겠군.”
“빨리 진정을 시켜야 할 텐데······.”
그나마 천목의 주변은 괜찮다.
천목이 내뿜는 건 저주뿐만이 아니었던 탓이다.
저주를 희석하는 마나도 함께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천산 바깥은 그야말로 지옥도일 터였다. 저주는 마나보다도 더 빠르게 퍼지고 영향력을 끼친다.
그리고 천목이 내뿜는 저주가 강력할수록 마계 전역에서 악귀들이 들끓는다.
마족들이 기를 쓰고 천산에 들어오려는 이유다.
“마왕들께서도 이번만큼은 쉽지 않겠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천목과 교감할 수 있는 건 오직 ‘원죄’를 지닌 천산의 마왕들뿐이다.
천목의 앞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교감하며 천목의 화를 가라앉히는 것이다.
하지만 저주가 심할수록 마왕들 역시 곤욕을 겪는다. 교감 도중 죽는 마왕도 있을 지경이었다.
이 정도로 심한 저주라면······.
‘최소한 한 명은 죽을 수도.’
반면에 천목을 진정시킨 마왕은 마계 전체에서 주목될 것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으로 대다수의 마족은 ‘교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교만이야말로 차기 대죄종이며, 마계를 구원할 구원자라고 말이다.
“교만께서 해내시겠지.”
“무슨 소리. 나태께서 해내실 거다.”
“멍청한 놈들. 최후의 승자는 질투님이시다.”
물론 다른 마왕을 추종하는 추종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단 한 명도 ‘폭식’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새롭게 추대된 마왕이라면 소란이 되어야 마땅하나 마족들은 폭식이 인간이라는 걸 알고는 아예 무시하는 중이었다.
“쯧쯧. 오늘이 지나면 최소 둘은 바뀌겠군.”
“혈마종과 음마령의 자리를 누가 차지하려나?”
“‘미라족’이 가장 유망하지 않을까?”
당연히, 폭식을 따르는 혈마종과 음마령에 대해선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도리어 그들의 처우를 놓고 농담을 나눌 수준이었다.
혈마종은 실력은 있지만 외골수고, 음마령이야 원체 나약했으니 교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혈마종과 음마령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예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그때였다.
“아! 하늘이 가려진다.”
“‘밤’이 드디어 시작되는가!”
하늘이 어둠으로 물든다.
천목의 저주가 하늘 끝까지 닿았다는 증거다.
곧이어 세상이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끝나지 않는 밤의 시작.
경배의 날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화아아아아악!
천목이 빛나기 시작한다. 투명한 빛을 뿜어대며 마치 꽃처럼 곳곳에 빛을 피우기 시작했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피어났다.
모든 마족은 숨을 죽인 채 그 빛줄기를 따라갔다.
빛이 새어 나오는 곳, 그곳에 천산의 마왕들이 있었다.
“······!”
교만, 탐욕, 질투, 나태.
그들이 천목과 함께 빛난다.
원죄를 지닌 마왕에게 천목이 반응하는 것이다.
오직 그들에게만 천목은 빛을 발한다.
‘아름답군.’
‘아아, 교만이시여!’
아름다운 빛의 무리 속에서 마왕들은 더욱 환하게 빛났다.
그들의 개성에 따라 만들어진 의상은 천목의 빛이 스며들어 광채를 내고 있었다.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폭식은?’
‘왜 폭식은 천목의 빛을 받지 않는 거지?’
하지만 어디에도 폭식은 없었다.
천목의 빛을 받지 못했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인간은 경배의 날에 어울리지 않아.’
‘칠죄악을 지니고도 천목이 거를 정도라니.’
그야말로 초유의 사태다.
칠죄악을 지닌 마왕이 천목의 빛을 받지 못한 경우는 없었다.
약하고 강하고와는 관계 없이 칠죄악의 권능을 지녔다면 무조건 천목의 빛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일이 벌어지자 마족들은 그러면 그렇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니까. 마왕이라 부르기에도 수준이 떨어지니까 그러는 것 아니겠나.
천목이 거를 정도면 말은 다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게 착각이라는 걸 모두 깨달을 수 있었다.
후아아아아아아!
천목이 비명을 내지른다.
이윽고 붉은 빛이 번지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붉은빛이라니······!”
경악했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붉은 빛이라니!
천목이 붉은빛을 내며 교감한 경우는 천산의 역사상 딱 한 번을 제외하면 없었다.
1대 대죄종, 원죄.
가장 포악하며 가장 짐승 같았다 전해지는 마신!
그는 마왕이었던 시절에 천목의 붉은 빛에 반응했다. 이후 최초로 대죄종의 자리에 오르며 지금 천산의 모습을 이룩해냈다.
그 전까지 천목은 미친 듯이 저주를 내뿜어대고 있었다. 천산은 저주의 덩어리였으며 아무도 천산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죄가 대죄종이 된 이후 천목을 안정시키는 법과 천산의 규율 등이 재정되며 마계 전체가 평화를 되찾았다.
물론 이후 주신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가장 마족다운 패기를 보여준 대죄종으로 평가받는 게 원죄였다.
하지만 더욱이 놀라운 건 빛을 받은 폭식의 모습이었다.
폭식의 라인하르트.
즉위한 이후 바깥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던가.
모두가 잔뜩 비웃을 작정으로 그를 보았지만.
“허······.”
“생각보다······.”
비웃을 수가 없었다.
< 마왕(1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