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 아니, 폭식이시여. ‘천산 경배의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시기가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합니다.”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자, 혈마종이 말했다.
그는 이제 계승자를 넘어 내 옆에서 조언하는 완벽한 협력자가 되어있었다.
무덤덤하게 말하지만 저 부담스러운 눈빛.
‘내가 천마 이자백의 이름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회의에서 벌어진 소식은 순식간에 천산에 퍼져나갔다.
마왕들로선, 특히 교만으로선 감추고 싶었겠지만 새로운 마왕이 옹립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그때부터였지. 혈마종의 태도가 완전히 뒤바뀐 것은.’
물론 표면적으로는 ‘폭식의 주인이 천산의 마왕이 되었다’는 정도였지만 알게 모르게 소문이 퍼져나간 모양이었다.
2대 대죄종이자 천마라 불리었던 이자백의 이름을 내가 계승했다는 사실.
그때부터 나를 대하는 혈마종의 태도가 완전히 뒤바뀌었으니.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물었다.
“천산 경배의 날? 그게 무엇이냐?”
“······ 일전의 회의에서 아무런 말도 못 들으셨습니까?”
도리어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본다.
회의에서 여러 말이 오가기는 했다. 하짐나 천산 경배의 날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 톨도 나온 바가 없었다.
혈마종의 태도로 보아하니 당연히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 듯싶었다.
그런데도 들은 적이 없다는 건.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내게 말하지 않았다.
천산의 마족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사실.
너무나도 당연해서 안 했다는 건 이상하다.
마족과 마왕들이 모두 준비해야 하는 ‘경배의 날’이라면, 새롭게 마왕의 위에 오른 내게 관련된 내용을 전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였다.
“들어본 적 없다.”
“······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진심으로 미안한 얼굴이다.
개의치 않는다는 듯 바라보자 혈마종이 이어서 말했다.
“7년에 한 번 돌아오는 신성한 날입니다. 천산의 축제와도 같은 날이기에 모든 마족은 그 경배의 날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지요.”
“그게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가?”
“예. 앞으로 30일 뒤입니다. 그날······ 신녀님께서도 의식에 들어가실 겁니다. 그래서 이미 알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날짜는 대강 들었다만 그게 천산 경배의 날이라는 건 처음 듣는군.”
그래. 날짜는 들었다.
헬라가 천산의 의식을 위해 77일간의 수행을 시작하는 날짜. 그게 30일 뒤라고.
이후 의식을 하는 77일간 마왕들은 전쟁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 날이 천산 경배의 날이라는 건 금시초문이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만에 하나의 의혹조차도 날아갔다.
내 말을 듣고 혈마종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날까지 마왕을 보위하며 준비하는 건 이름을 계승한 마종과 마령들입니다. 바로 저와 음마령이지요. 폭식께서 창피를 당하신다면 그건 저희 때문입니다.”
“내가 창피를 당할 것이라 확신하는구나.”
“······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다면, 예. 그렇습니다.”
“뭘 준비해야 하지?”
“가장 중요한 것은 의상과 안무입니다.”
“안무? 춤?”
“7년마다 돌아오는 경배의 날에 ‘천목’은 엄청난 양의 마나와 저주를 내뿜습니다. 천목의 안정을 위해선 천산의 마왕이 직접 천목과 소통해야 합니다.”
천목.
그러니까······ 천산의 중심에 세워진 하늘 끝까지 닿는 큰 나무.
제로는 그 아래에 자신이 만들어진 연구실이 있다고 했다. 같은 신호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목이 7년 주기마다 나노머신과 방사성 물질을 내뿜는다는 말이었다.
천목의 안정을 위해 마왕들이 직접 ‘소통’해야 하는 거고.
“그 소통의 방식이 왜 하필 안무지?”
“전통입니다. 천산의 마왕만이 그날 유일하게 천목과 소통할 수 있으며, 그 소통을 위해선 몸을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게 어느 날부터 ‘춤’이라는 형태로 굳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나무와 소통하기 위해 춤을 춰야 한다니.
‘교만을 비롯한 마왕들도 그럼 춤을 추는가 보군.’
전통이라 하니 할 말이 없다.
게다가 나만 추는 게 아니라 다른 마왕들도 춘다지 않나.
가장 궁금한 건 나태였다.
나태는 회의가 시작될 때에도 바닥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만사가 귀찮다는 몸짓을 보이던 그도 춤을 출까?
짧게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의상과 안무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제법 걸리겠군.”
“예. 올해는 특히 그 규모나 중요도가 높습니다.”
“신녀가 나타났으니.”
“······ 맞습니다. 본래 천산 경배의 날은 마왕의 서열전과도 같았습니다. 천산의 마왕들은 다른 마왕을 해칠 수 없다는 규율 탓에, 이날을 빌미로 서로의 영향력과 역량을 과시하곤 하였지요.”
“안 그래도 마음먹고 준비하는 날인데 신녀까지 나타났으니 더하겠군.”
“그렇습니다.”
혈마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산에서 마왕은 마신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다른 마왕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해칠 수 없다.
하지만 마족은 본래 호승심이 강한 종족이다.
강자와 약자. 서로 서열을 나누려고 하는 건 본능과도 같다.
직접 싸우질 못하니 7년 주기마다 축제를 여는 것이다.
칠마종과 칠마령을 필두로 자신의 역량과 영향력을 과시한다.
춤도 추고 오락도 진행하는 모양인데.
‘건전하군.’
피가 튀기기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끝날 것 같긴 하다.
그 욕구를 저런 식으로 배출한다니 참으로 건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의상과 안무는 한 달이면 충분히 준비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면 사실 오래 걸릴 것도 없다.
혈마종과 음마령을 따르는 마족들을 시켜다가 만들게 하면 그만이니까.
당연한 것을 묻자 혈마종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의상은 직접 짜셔야 합니다.”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말이냐?”
“그 또한 전통입니다.”
옷을 직접 만들어서 입으라고?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내 옷을 내가 만들어 입어본 적이 없건만.
“마왕은 가장 개성적인 존재여야만 합니다. 스스로를 표현할 줄 아는 자여야만 하기에······ 옷을 짜는 기술을 가르쳐드릴 순 있을지언정 옷을 지어드릴 순 없습니다.”
“그걸 진짜 지키는 마왕이 있나?”
“없습니다만······ 이미 다른 마왕들은 옷을 완성시켰을 겁니다.”
“그렇다면 모두 나만 예외적으로 지켜보겠군.”
규율 대로라면 직접 지어야 하지만 진짜로 직접 의상을 만드는 마왕은 없다.
한 달밖에 안 남은 시간.
다른 이의 손을 빌리려고 하는 순간, 마왕들이 지적해올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교만의 델바란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그런 기분이었다.
‘창피를 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군.’
다른 이의 손을 일절 빌릴 수 없다.
내 손으로 의상을 디자인하고, 만들어야만 한다.
게다가 안무까지 익혀야만 하는 상황이다. 30일로는 턱없이 부족하리라.
“의상은 내 알아서 하마. 헌데, ‘검무’도 괜찮겠지?”
“예. 허나 ‘7대 죄악’ 모두 각각 정해진 안무가 있습니다.”
“권장사항이지 필수사항은 아니지 않느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생각해두신 안무가 있습니까?”
“천마신공에도 마침 괜찮은 게 있더군.”
“······?!”
“한 번 봐주겠느냐?”
“······ 허어억!!”
혈마종의 반응이 상상 이상이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경직하며 땀을 줄줄 흘렸다.
하기야, 혈마종은 천마의 열렬할 추종자라 했던가.
천마의 비기인 천마신공을 직접 보여준다면 흥분할 수밖에 없다.
‘천마신공은 몸에 세상을 담는 방법이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천마신공과 천마의 룬.
제로조차도 이 두 가지에 대해선 ‘미상’ 혹은 ‘불명’이라고 설명했으니까.
‘천마의 이름은 계속해서 계승되어 왔다. 내가 처음이 아니야.’
천마의 룬.
그것은 계속해서 계승되고 축적되어온 보물이다.
천마 이자백은 바로 이전 이 룬을 계승해온 존재일뿐.
룬 자체의 주인은 아니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나노머신이 아니다.’
룬에 담긴 것이, 나노머신이 아니다.
다른 룬들은 어찌됐든 나노머신들이 집약되어 있었다.
헌데 이 룬은 나노머신이 들어있지 않다.
그렇다고 방사성 물질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다.
‘······ 자연의 기운? 아니면 진짜 신의 기운이라고 해야하는 건지.’
모르겠다. 알 수 없는 힘이 담겨있는 건 분명한데 그걸 정의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기적이 나노머신에 의해 일어났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상식을 부숴트리는 물건이었다.
제로가 알법한 또 다른 ‘에너지’라면 당연히 나도 알았을 것이다.
제로조차 정의할 수 없는 기운이라면 정말 신의 힘이라고밖엔 볼 수 없지 않나.
문득, 박문식 박사의 말이 떠올랐다.
―자네는 신이 있다고 믿나?
내가 돌아온 것.
내 회귀를 지적하며, 그는 신을 언급했다.
저 하늘 위의 가짜 신들이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존재해온 ‘진짜 신’을 말이다.
정체불명. 그 역시 정의할 수 없는 존재임에는 분명했으니.
이 룬 역시 그러한 느낌이었다.
‘이 룬을 가진 자만이, 천마신공을 익힐 수 있다.’
결국 천마신공이란 특별한 룬의 힘을 빌어 세상을 담는 방법이다.
세상을 몸에 담는 ‘무공’이었다.
‘천마신공은 기적을 다룰 수 있는 힘이다.’
만들어진 기적이 아닌, 진짜 기적.
우주만물의 기운을 다룰 수 있는 무공.
나노머신에 의한 움직임이 아니라 그보다 더 상위에 존재하는.
‘어찌보면······ 진짜 마법사라고 할 수도 있겠군.’
이는 궁극의 마법사가 되는 방법이었다.
천마 이자백.
그는 천마신공에 대해 이렇게 적어놓았다.
《천마신공을 대성하여 ‘자연경(自然境)’에 이르면 수명의 제한이 없어지며 형과 식에 얽메이지 않게 된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생명체는 결코 자연경에 이르지 못한다.》
《방법은 하나. 끊임없이 계승되는 자연의 기물뿐이니.》
《이것, ‘룬’은 살아있는 것이 자연경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생과 사를 넘어 무한하게 이어진 ‘룬’은 귀속자에게 자연경에 대한 길을 제시한다.》
《룬에 담긴 ‘기운’은 나로서도 설명할 수 없으나, 분명한 건 가장 ‘신’과 밀접한 증거라는 것이다.》
《그 증거를 이용할 방법으로 천마신공을 만들었지만 본좌는 결국 대성하진 못했다.》
《허나 천마신공만이 이 ‘룬’의 가능성을 살필 수 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연자여, 계승자여. 부디 완성해주기를.》
《그리하여 본좌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주기를 바란다.》
천마 이자백은 평생을 천마신공에 몸바쳤다.
수많은 ‘무공’들도 그로 인한 산물이었다.
그 역시 우연히 ‘룬’을 계승한 것에 불과했기에, 이 룬에 담긴 힘을 이용할 방법으로 천마신공을 만든 것이다.
‘천마 이자백도 역시 이 룬에 담긴 힘을 설명하지 못했다. 허나 분명한 건 이 룬은 진정한 궁극으로 향하는 이정표라는 것이다.’
그것을 천마는 ‘자연경’으로 설명했다.
필히 죽는 생명체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영역.
그 영역을 닿게 해주는 게 바로 이 룬이라고.
당연히 그중에는 ‘검무’도 있었다.
“저, 정말 제가 봐도 괜찮겠습니까?”
“괜찮다마다.”
“아아······!”
감격에 젖은 혈마종이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정령검 칼리번을 꺼내들었다.
“잘 봐두어라. 순식간에 끝날 수도 있으니.”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발을 디뎠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세상을 그렸다.
검을 따라, 내 움직임을 따라, 세상이 물결쳤다.
“······.”
지켜보던 혈마종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예 넉을 놓았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검무다.
마나가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웅장함은 마치 대자연을 보는 것만 같았으니.
손을 따라서, 검을 따라서 자연이 움직인다. 세상이 움직인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설명할 순 있을까?
“아······!”
검무가 진행될수록, 그의 전신엔 그저 떨림만이 가득해져갔다.
하지만 계속해서 떨고만 있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 혈마종의 떨림이 멈췄다.
두 눈동자가 풀리며 전신에 힘이 풀어졌다.
곧 그는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다.
눈을 감고, 눈에 담았던 움직임을 계속해서 그렸다.
깨달음이었다.
그저 검무를 본 것만으로 혈마종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 마왕(1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