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채 조금 전 빌헬름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을 곱씹었다.
‘천마······.’
‘이자백?’
천마 이자백!
가장 강력했다 전해지는 대죄종의 이름을 잘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어떻게 ‘계승’했다는 말인가?
마족이 갖는 이름의 의미는 무척이나 크다. 이름을 잃은 자는 악귀가 되는 탓이다. 오로지 파괴밖에 모르는 괴물이 말이다.
그래서 다른 마족을 잡아먹어 그 이름을 억지로 계승하는 마족마저 있을 지경이었다.
당연히 누군가에게 이름을 알려주는 것 역시 굉장히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럴진대 이름을 ‘계승’한다는 건 더더욱 쉽게 할 수 없는 행위였다. 계승은 말 그대로 자신의 일부를 나눈다는 의미였다. ‘룬’을 나누어 운명을 묶는다는 것이다.
하여 이름을 계승하는 행위는 많이 할 수 없다. 죽기 전이나 자신이 정말 믿는 자가 아니면 절대로 이름을, 룬을 계승하지 않는다.
마종과 마령들이 오직 한 마왕에게만 이름을 계승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미 사라진 천마의 이름을 어떻게 계승한다는 거냐?’
천마는 죽었다.
모든 마족은 죽으면 룬을 소실한다.
그리고 천마 이자백도 다른 대죄종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존재다.
죽은 자, 이미 사라져 없는 자가 이름을 계승할 순 없지 않나.
“······ 잘못 본 것은 아니냐?”
교만이 물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빌헬름은 재차 고개를 저어보였다.
“대죄종의 이름은 마계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자백. 천마의 이름을 계승한 것이 확실합니다.”
이 역시 사실이다.
위대한 대죄종의 이름은 오직 하나뿐이어야만 한다.
계승자가 아니라면 그 이름은 쉽사리 입에 담는 것조차도 불문율처럼 여겨졌다.
‘거짓은 아닌가 보군.’
빌헬름의 태도는 당당했다.
거짓을 고하면 부족 전체가 몰살당한다 했음에도.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마의 룬을 갖고 있다고······?”
“나는 천마의 유일한 계승자다. 이제 자격이 부족하다 하지는 못하겠지.”
교만을 향해, 탐욕과 나태, 질투를 향해, 나는 가볍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자격. 저들은 내 자격을 논하고 있었다.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바깥에서 온 존재이기 때문에 편견으로 의심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검증을 통과했으며 자격마저 갖췄다는 게 증명된 이상 더 이상의 시비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나를 몰아붙이기 위해 시작한 회의가 외통수가 된 격이었다.
‘내가 사는 곳이나 마계나 사는 모습은 똑같군.’
이래서 편견이 무서운 것이다.
만약 교만이 편견 없이 나를 제대로 조사했다면 이런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으리라.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왔고, 어떻게 들어왔는지 정도만 알았어도 방식을 달리했을 텐데.
시간을 주지 않을 작정으로 빠르게 몰아붙인 게 외통수가 되었다.
교만이 말했다.
“천마의 이름을 계승했다고 천마의 힘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럼 이 자리에서 확인이라도 해 볼테냐? 허나 내가 힘을 사용하면 규율을 위반하게 된다. ‘죄악’을 해쳐선 마신전에 참가할 수 없지 않느냐?”
강하게 나갔다.
혈마종을 단번에 제압한 건으로 어느정도 내 무력에 대한 의문은 사라져 있을 것이었다.
뭐, 어디까지나 천마군림보 덕이지만 저들은 그 사실을 모를 테니.
“어이가 없군. 네놈이 나보다 강하다는 뜻이냐?”
교만의 얼굴에 정말로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동시에 살기가 뻗쳐나온다.
어마어마한 양의 나노머신들.
그것들이 살기를 띤 채 주변을 강하게 짖눌렀다.
그것은 용언보다도 더 강력한 저주였다.
용혈회의 성룡들에게서나 느꼈을 수준의 강함이다.
‘알렉과 비슷하거나 더 강하다.’
죽음의 용, 알렉.
그와 비견하거나 더 강할 것 같다.
어지간한 존재라면 즉사할 정도의 양. 아무리 강해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나.
[‘정신보호’ 프로텍트가 가동합니다.]
[해당 ‘비인가 나노머신’들의 직접 접촉을 불허합니다.]
[접촉 불허를 위한 에너지의 소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나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교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제로가 교만이 뿜어내는 모든 나노머신과, 영향을 받은 주변 비인가 나노머신의 직접 접촉을 차단해버린 것이다.
장시간 이어지면 문제가 되겠지만······.
“글세, 약할 것 같지는 않은데. 너를 포함한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말이다.”
“오만하군.”
“그건 너의 권능 아닌가? 교만과 오만은 비슷한 말이니.”
자신의 위협이 씨알도 먹히지 않자 교만의 눈썹이 찡긋거렸다.
정말 아무런 영향도 없어보이는 내 모습이 생각과는 달랐던 모양이다.
“··· 나를 포함한 이곳 모든 마왕들과 비교해도, 네놈이 강하다는 말이냐?”
나는 미소지었다.
교만이 굳이 이런 말까지 묻는 저의가 무엇이겠나.
나라는 존재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약한 것 같은데, 약하다고 확신을 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서는 강한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내게 넘긴 것이었다.
“적어도 둘은 데려갈 수 있을 것 같군.”
“······.”
하여, 나는 더 자신있게 말했다.
앞의 모든 말은 사실이었으니 허세 하나쯤은 섞어 넣어도 될 것이다.
스으으.
동시에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여태껏 농담처럼 나를 대하던 나태조차도 눈빛을 달리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탐욕이나 질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만하고 광오한 놈.
넷중 둘을 데려갈 수 있다는 저 발언이 심기를 건드린 것이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교만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른 마왕들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소모적인 자격에 대한 논쟁을 계속할 생각인가? 아니면 겸허히 받아들인 채 앞으로의 논의를 시작할 것인가?”
모든 논쟁은 격파했다.
아니, 애당초 격파할 것 자체도 없었다.
사실대로만 말해도 이미 내 자격은 충분했으므로.
천산의 마왕이 되기 위한 조건.
마신전에 참가하기 위한 조건.
저들과 내 격의 차이에 대한 의문까지 한꺼번에 풀었다.
그러니 논쟁 자체가 의미가 없다. 시간낭비다. 그것을 깨달았으면 슬슬 인정하고 다음 사안이나 이야기하라는 말이었다.
이 회의를 주도하는 건 어쨌든 교만의 델바란이었다.
나는 델바란을 향해 말했고.
“······ 마신전의 진행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지.”
결국 델바란은 나를 포함한 마신전의 논의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
델바란은 이를 갈았다.
“천마 이자백의 이름을 이은 게 확실하단 말이냐?”
“예. 확실합니다.”
혹시 몰라 따로 확인을 위해 다른 외눈족을 불렀다. 외눈족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비슷한 기능을 가진 마족들을 불러모아 확인했다.
그 결과, 천마 이자백의 이름을 이은 게 확실해졌다.
‘번개의 장막이 꺼진 것도 사실이다.’
작은 허점이라도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해봤지만 모두 사실이었다.
특히 최근 마계와 중간계를 잇는 가장 큰 장벽인 ‘번개의 장막’이 꺼졌다는 것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폭식이 들어온 시기와 같았으며, 혈종 아수라를 그곳에서 얻었다는 증언 역시 확보했다.
놈이 말한 모든 게 진실이라면 남은 건 마신전에서의 경쟁뿐이었다.
‘인간과 경쟁이라니. 하물며 대죄종의 자리를 건 경쟁이지 않은가.’
대죄종은 마계의 주인이다.
얼굴이며, 모든 것이다.
그 중요한 자리를 걸고 경쟁하는게 인간이라는 걸 델바란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 권역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권역에 들어온 인간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튕겨냈다.
그만한 힘을 지녔거나 특수한 권능을 가졌다는 의미다.
적어도 모든 게 허세임은 아니라는 거다.
‘허세가 아니라고?’
적어도 논쟁이 된 발언을 확인했을 땐 모두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둘을 데려갈 수 있다는 그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발언도 사실이란 말인가?
그만한 강자의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천마의 이름을 계승했다면······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가 교만의 심기를 건드렸다.
0.0001%의 가능성이라도 가능성이지 않은가. 그 가능성조차 불허하는 게 교만이어야만 하건만.
모든 걸 위시하고, 무시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그에게만 있었다.
그럴진대 그 자격을 폭식이 가져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종잡을 수가 없군.’
교만은 턱을 쓸었다.
마신전이 시작되면 어차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천산의 규율상 쉽사리 건들 수 없으나 만약 허세였다면 처참하게 박살나리라.
‘그래도 놈은 마족이 아니다. 천산의 규율을 모두 지킬 수는 없을 테지.’
물론, 그 전에 끌어내릴 수 있으면 그렇게 할 생각이다.
천산에 존재하는 만 가지가 넘는 규율.
그중에는 마왕이라도 지켜야할 규율이 있다.
인간인 그가 모두 지키는 건 불가능한 규율들이.
신목의 그림자를 30초 이상 밟아서는 안 된다거나, 천산의 물을 남용해선 안 된다는 규율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의 규율이라도 어기면 걸고 넘어지리라 생각해서 감시자를 붙여놓았다.
“······ 흠을 잡을 게 없다고?”
“예.”
“단 하나의 규율도 어기지 않았다고?”
“그렇습니다. 10여일간 지켜봤지만, ‘폭식’은 단 하나의 규율도 위반하지 않았습니다.”
교만은 인상을 찌푸렸다.
천산의 마왕들도 모든 규율을 지키진 못한다.
알게 모르게 넘어가는 거지. 그런데 폭식은 모든 규율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규율첩에 적힌 걸 전부 외우지 않는 이상에야?’
만 사천개가 넘는 규율들을 모조리 외워도 실행하는 건 다른 이야기다.
이 짧은 시간에 그 모든 걸 해낼 수 있는 생명체가 정말로 존재하다니.
‘그래도 규율첩에 적혀있는 게 전부는 아니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적혀있지 않은 암묵상의 규율.
너무나도 당연하기에 굳이 적을 필요가 없는 것들.
예컨대.
‘천산 경배의 날. 천산의 모든 마족이 참가해야하는 그 특수한 날이지. 과연 시간에 맞춰 준비할 수 있을까?’
7년에 한 번, 천산과 역대 대죄종들을 기리는 날이다.
더불어 신녀가 77일간의 기도에 들어가는 날이었다.
설령 혈마종과 음마령이 그날에 대해 말해줬더라도 준비하기엔 시간이 늦다.
그날을 위해 모든 마족이 최소 몇 달을 준비해야하는 건 기본이었다.
특히 마왕이라면 준비할 게 더더욱 많았으니.
고작 30일도 안 되는 사이에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순한 의복 제작만 해도 족히 30일이 넘게 걸릴 터.
‘천산의 모든 마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창피를 당하겠지. 그날 인정받지 못한다면 반쪽짜리 마왕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마족들의 전통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결국 종족의 차이에 대한 불만이 나올 테고 폭식의 주인, 라인하르트는 반쪽 마왕이 되어 제대로 된 의식을 치를 수조차 없어질 것이다.
보아하니 규율을 달달 외우느라 모든 신경을 써버린 것 같은데.
외운 것에서 그치지 않고 행실까지 바르게 하려면 상당한 심력을 소비할 수밖에 없다.
그 상태에서 천산 경배의 날까지 신경쓸 여력이 남아있겠는가?
교만의 델바란은 천산 경배의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그 당일날.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폭식, 라인하르트를 바라보는 교만의 얼굴은 잔뜩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 마왕(1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