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127화 (127/146)

교만, 탐욕, 질투, 그리고 나태.

네 명의 마왕은 천산의 주인이며 마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 지배자다.

그들의 군림은 수만년간 변치 않았다.

새로운 권력층이, 또 다른 칠죄악의 마왕이 등장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저 넷이 구축한 거미줄같이 촘촘한 영향력의 사이로 들어갈 순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불편한 눈초리로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 마신관에 들어올 수 있는 자는 오직 천산의 마왕으로 인정받은 자 뿐이건만, 새로운 자리에 또 다른 자가 들어온 것이다

일곱 개의 자리.

그중 하나, 폭식의 위치에서.

솔직히 무시하면 될 일이다. 폭식 따위야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하지만 문제는 폭식의 주체다.

인간이라니!

역대의 모든 천산의 마왕들 중에 인간이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 조건은 부합하는군.”

교만이 말했다.

물론, 인간은 천산의 마왕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은 없었다.

칠죄악 중 하나의 권능을 이었으며, 칠마종과 칠마령 중 두 명의 이름을 계승할 것.

이 두 가지 조건에 부합하면 종족을 불문하고 ‘천산의 마왕’으로 인정해온 것이다.

하지만 칠마종과 칠마령은 모두 마족이었다.

하물며 각 종족의 대표격인 자들이 인간에게 자신의 이름을 계승한다?

“혈마종 그 외골수와 음마령의 이름을 계승했다고? 이 짧은 시간에?”

탐욕이 말했다.

그는 매우 흥미로운 눈초리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마령은 차치하더라도 혈마종은 여태껏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마왕에게 계승한 적이 없건만.’

흡혈귀들의 우두머리인 혈마종.

열렬한 2대 대죄종인 천마의 추종자로서 단 한 번도 다른 마왕에게 자신의 이름을 계승한 적이 없다.

1대 대죄종 원죄나, 3대 대죄종 야차의 의지를 잇는 마왕은 있지만 천마를 따르는 자는 이곳 천산에서 혈마종이 유일했다.

‘천마의 제자라던 신군은 사라졌고, 천마신공이라는 것도 완전치 않으니, 이곳 천산에서 천마의 유지를 이을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계 전역에서 천마의 이름은 드높지만 그뿐이다.

원죄나 야차의 의지나 힘 따위를 이은 마왕은 있어도 천마의 것을 가진 마왕은 없다. 그가 이곳 천산에 제대로 남긴 게 아무것도 없는 탓이다.

무공이라는 것도 완성된 존재들에게는 필요 없다. 약자들이나 배우는 공부로 치부하여 마왕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래서일까.

혈마종은 공공연하게 천마의 의지를 따르는 자가 아니면 자신의 이름을 계승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 덕택에 미운 털이 잔뜩 박혀 있었는데, 난데없이 새로 나타난 폭식의 주인을 따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로 인해 모든 마왕의 머릿속에서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정말로 천마를 잇는 자란 말인가?’

혈마종이 이름을 계승했다면 그 이유는 하나뿐이다.

2대 대죄종, 천마.

모든 대죄종 중 가장 강력했다고 전해지는 존재.

그러나 이야기뿐이다. 그가 남긴 ‘무공’이라는 것도 약자들이 조금 강해지게 해주는 정도이지 그들에겐 별 도움이 안 됐다.

천산서고에 있는 천마신공의 후반부?

뜬 소리만 적혀있을 따름이다. 그대로 배웠다간 마나가 뒤얽혀 죽고 만다. 그야말로 애물단지였다.

반면이 1대 대죄종 ‘원죄’와 3대 대죄종 ‘야차’는 어떤가.

그들이 남긴 것들은 이곳 천산에 빼곡하다. 예컨대 탐욕은 야차의 힘을 이어 무수히 많은 혈종을 다룰 수 있었다. 그중 ‘흑야차’와 ‘백야차’는 마계 전역을 뒤져봐도 견줄 대상이 없을 만큼 강한 혈종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질투와 나태는 원죄의 권능을 어느 정도 잇고 있었다. 교만을 제외하면 천산의 마왕들은 적든 많든 이전의 대죄종들과 연관이 있다는 뜻이다.

오직 천마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 천마의 의지를 잇는 자가 나타났다.

천산서고에 들어가 천마신공의 후반부를 취하고, 혈마종의 이름까지 계승했다면 이만한 증거는 없는 셈이다.

“혈종을 다루고, 칠죄악을 이었으며, 혈마종과 음마령의 이름을 계승했으면 천산의 마왕으로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긴 하지~”

나태가 말했다.

천산에 새겨진 규칙.

그 규칙과 조건에 모두 부합하는 자를 마왕으로 여기지 않을 순 없다.

이러한 기본적인 규율들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마계는 진즉에 파멸했으리라.

“하지만 ‘폭식’이 ‘마신전’에 참가한 전례가 없다.”

교만의 델바란이 무심하게 말했다.

칠대죄악 중에서도 폭식은 최약체로 평가받는다.

그래서일까. 3대 대죄종이 배출 될 동안 폭식이 이 ‘마신전’에 참가한 전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전례가 없다뿐이지 폭식이 참가하면 안 된다는 규율은 없잖아?”

나태가 되받자 델바란은 고개를 저었다.

“‘마신전’에 참가하려는 천산의 마왕은 다른 죄악을 해치는 모든 행위를 금지한다는 규율 또한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대죄종을 선별하는 마신전. 혹은 계승전이라고도 부르는 이 의식에는 더욱 엄격한 규율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다른 죄악의 소유자를 해치지 말 것’이라는 조항이다.

만약 그 규율이 없다면 천산은 전투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마신전이 시작되기 전에 마왕이 하나만 남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하여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해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한다.

천산에 오른 마왕은 서로 공정하게 경쟁해야만 했다.

“그게 왜?”

“그는 ‘분노’를 먹어치웠다. 마계로 향하여 이곳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건 모두 ‘분노’의 힘을 폭식의 권능으로 먹어치운 덕분이지.”

델바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천산의 규율은 만 가지가 넘는다. 이 짧은 시간에 모든 걸 숙지할 순 없었을 테지. 마신전에 관한 규율은 더더욱.’

천산에 존재하는 규율들은 오랜 시간 쌓이고 쌓인 것이다.

이제 막 천산에 오른 폭식이 그 많은 규율을 숙지했을 리 만무했다.

불가능한 일이다.

느닷없이 정곡을 찔렸으니 폭식이 마신전에 참가하는 일은 없으리라.

이곳에서 폭식이 마신전에 참가할 수 없음을 못 박는다. 이 자리를 벗어나면 기존의 4명의 마왕들만이 마신전을 치르게 될 것이다.

‘과연. 이런 수작질을 부리려고 나를 초대했군.’

······ 다른 마왕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모든 조건을 통과했으니 천산의 마왕이 되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마신전’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해선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분노, 실버팽을 해쳤기 때문에.

이로써 확실히 알겠다. 교만의 델바란은 내가 같이 경쟁하는 걸 꺼리고 있다. 탐탁지 않아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천산서고를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느닷없이 이곳에 나를 초대한 이유도 알겠다.

일종의 심문을 위한 자리인 셈이다.

알아서 포기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말에 어폐가 있군.”

허나,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곳 마신관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내가 ‘천산의 마왕’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같은 자격으로 그들에게 말할 권리 또한 분명히 있을 터.

“어폐가 있다?”

델바란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분노를 해친 적이 없다.”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지?”

믿을 수 없다. 사실을 말해도 증거가 없다.

교만의 델바란은 우겨서라도 이곳에서 결판을 내려고 하고 있다.

어쨌든 증거가 없으니 내가 ‘분노’를 해친 게 분명하다고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미리 살펴보길 잘했군.’

이곳에 오기 전 나는 이미 ‘천산의 규율’에 관한 모든 사항을 숙지했다.

마족의 종별로 세분된 것까지 합쳐 정확히 14,621가지에 달하는 ‘규율’을 모두 제로에게 저장시킨 것이다.

그중 내 자격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사안 몇 가지에 대해 미리 준비를 해놓기도 하였다.

“헬라. 그녀가 나를 증언해줄 것이다.”

“헬라······ 신녀 말이냐? 하지만 신녀는 ‘신녀관’에 있을 텐데?”

신녀관은 천산의 오지에 있다. 그녀를 따로 분리해둔 이유는 다른 마왕이나 마족의 부정을 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애당초 천산에 오를 때 신녀를 본 교만의 반응을 이해했다면, 신녀를 이곳에 데려오는 위험한 짓 따위는 하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런 그녀를 이곳 마신관에 데려왔다?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

‘내가 이 부분을 물고 늘어질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교만의 델바란은 어이가 없었다.

이윽고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드르륵.

문이 열리며, 흰 소복을 입은 헬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음!”

모든 마왕이 침음을 삼켰다.

오직 신녀만이 낼 수 있는 매혹의 향기.

하지만 마왕들은 극한의 인내심으로 버텨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기에.

“이곳에 자리한 이유가 뭐지? 그가 분노의 주인을 해치지 않았다는 증언을 해줄 생각인가?”

“필요하다면, 그럴 생각이야.”

교만의 물음에 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만의 델바란이 눈썹을 찡그렸다.

“미리 말을 맞춘 것 아닌가? 세뇌를 당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지 않은가?”

“나는 그가 와달라고 해서 왔을 뿐이야.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들은 건 아무것도 없어.”

헬라는 그저 걸음 했을 뿐이다.

분노를 해치지 않았다는 증언? 그런 건 사전에 들어본 적도 없다.

입을 맞춘 적도 당연히 없다.

“원한다면 ‘천산 신목’에 내 영혼을 걸고 고해도 좋아. 내가 진심만을, 진실만을 말할 것을.”

천산의 신목.

거대하기 짝이 없는 그 나무는 이곳 마계에서 ‘영혼의 안식처’라고도 불린다.

그 앞에서 영혼을 걸고 말을 하겠다는 건 목숨을 바친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었다.

교만의 델바란은 내심 이를 갈았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부를 위한 거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좋다. 한 번 들어보마.”

“‘분노’의 주인은 나를 키운 아버지야. 이름은 실버팽이고, 고귀한 자이언트 울프족이었지. 아버지께선 용과 싸우다 큰 상처를 입으셨는데 그가 대신 복수를 도와줬어.”

“······.”

“돌아가시기 전에 나를 이곳에 데려다 달라고 그에게 부탁한 것도 내 아버지야. 그 조건으로 권능을 넘기셨지. 그는 인간임에도 수많은 용의 포화를 뚫고 마계를 넘어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어.”

“용을 죽이고, 용들의 포화마저 뚫었다는 말이냐?”

용.

신의 절대적 하수인인 그들을 좋게 보는 마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천산의 마왕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인간임에도 용을 죽였다면 마땅히 칭찬해야할 일이었다.

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의 가장 큰 장벽이 바로 ‘번개의 장막’이라고 들었어. 그는 그곳을 정면으로 돌파했어.”

“번개의 장막을?”

“그건 불가능한 일인데?”

“‘용혈회’가 가만히 당해줬을 리가?”

마왕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들조차도 번개의 장막을 건너는 건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직접 그곳을 뚫고 들어왔다고?

“번개의 장막을 꺼트렸어. 잠깐이었지만, 마계로 넘어오는 데에는 충분했고.”

“잠깐. 번개의 장막을 꺼트렸다······?”

번개의 장막.

빌어먹을 용들과 로드가 설치한, 마계의 가림막이다.

거대한 장벽과도 같은 그곳을 뚫고 살아서 중간계로 나간 마족은 없다.

간혹 발생하는 ‘공간의 균열’을 통해서 극소수로 나갈 따름이지.

순간, 교만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정말로 번개의 장막을 꺼트렸단 말이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

“대체 어떻게?”

“그 방법을 내가 말해줘야 할 이유가 있나?”

없다.

하지만 번개의 장막을 꺼트린 건 사실이다.

그것을 없애버리는 게 모든 마족들의 숙원아닌가.

“거짓말을 하는군.”

“거짓말이 아니야. 아마 같이 온 빌헬름이라면 알 거야.”

거짓말로 치부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역시 헬라가 부정했다.

결국, 마신관에 빌헬름이 들어오고 나서야 이 소란은 일단락되었다.

“장벽의 관리자라고?”

“마, 맞습니다, 교만이시여.”

“‘외눈족’이 관리자라. 장벽의 상황도 좋지는 않나 보군.”

빌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외눈족은 7마종, 7마령에 속하지 않은 소수 부족이다.

주류에 편입하지 못한 부족, 종족의 마족은 마족으로 취급받지 못하며 장벽에서 평생을 노역한다.

장벽의 관리자는 많다. 빌헬름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다만, 전투력이 낮은 외눈족이 장벽의 관리자가 된 게 신기한 것이었다.

“거짓말을 할 경우 너의 부족 전체가 사라질 것이다. 오직 사실만을 말해야 할 터.”

“사, 사실만을 말하겠습니다.”

“정말로 번개의 장막이 꺼졌느냐?”

빌헬름이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지만, 번개의 장막이 사라졌습니다. 그로 인해 장벽 부근에 있던 악귀들이 미쳐 날뛰었습니다.”

“왜 나는 그 정보를 처음 듣는 거지?”

“······ 천산의 마왕들께서 장벽에 관심이 없기 때문은 아닐는지요.”

천산은 수많은 관문과 의식을 통해서야만 오를 수 있다.

극도로 폐쇄적인 장소라는 것이다.

이곳은 낙원과도 같지만, 마계 전역은 지옥 그 자체였다.

특히 장벽은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번개의 장막이 사라졌다는 초유의 사태조차도 아직껏 모르고 있는 게다.

“번개의 장막을 인간이 꺼트리고, 넘어왔다······ 주신 쪽의 끄나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군.”

교만의 델바란이 나를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모든 증명을 했으나, 그 증명이 가능한 게 인간이라는 점이 걸리는 모양이다.

자신의 상식선에서 불가능한 일. 그 일을 해냈으니까.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어떻게든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다분해보인다.

“그, 그는, 그분은 주신 쪽의 인간이 아닙니다.”

그때였다.

빌헬름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그걸 확신하는 이유는?”

“저, 저희 외눈족의 능력을 교만께선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계승한 이름을 세세하게 볼 수 있는 능력 말이냐?”

알고 있다.

그다지 쓸모도 없는 능력이라는 것도.

전투적인 능력도 적으면서, 계승자의 이름을 보는 게 전부인 그 쓸모없는 능력을 가진 탓에 장벽으로 몰린 것이었다.

하지만 빌헬름은 이번만큼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분은······ 라인하르트께선 천마의 이름을 계승했습니다.”

순간, 교만의 델바란이 굳었다.

교만의 델바란 뿐만이 아니다.

모든 마왕들이 숨을 죽였다.

“······ 그게 무슨 소리냐?”

침을 꿀꺽 삼킨 빌헬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마 이자백. 그분께서 계승한 이름은, 분명히 천마의 이름입니다. 천마의 이름을 계승한 존재가 주신의 끄나풀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 마왕(1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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