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대한 서고.
들어서는 즉시 오한이 들었다.
서고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했지만 정작 책은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오직 천마신공의 보관만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었다. 단 한 권의 책을 지키고자 천산의 광활한 영역에 걸쳐 지어진 요새와도 같았다.
허락받지 않은 이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수많은 저주. 그것이 오한으로 발현되어 아렐의 발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환영. 환각. 환청. 길을 잃게 만들고 영원히 방황하게 만드는 방식.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헤어나올 수 없다.
하지만 아렐은 멈추지 않았다. 라인하르트가 근처에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오직 그 느낌만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렇게 어느 정도를 달렸을까.
“······!”
아렐은 눈을 떴다.
동시에 그녀는 경직할 수밖에 없었다.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라인하르트가 보였다. 그의 주변으로 수놓아진 수많은 ‘손’ 역시 보였다.
일전 말피엘을 상대하며 보였던 그 저주받은 손들이 날개처럼 라인하르트의 등 뒤를 장식하고 있었다.
저것은 닿는 순간 모든 것을 죽이는 저주다. 어지간한 용조차도 기겁하며 도망쳐야만 하는, 그보다도 약한 존재라면 순식간에 시들어 죽고 마는.
어째서 델바란이 손을 대지 못했다는 건지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었다. 차마 만질 수 없다는 건 교만의 델바란조차도 저 저주가 혐오스러웠다는 뜻이다.
“······!”
아렐은 주저하지 않고 뛰어들었다.
영역에 들어서자 피부가 썩어들어간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멎어가는 게 느껴진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아렐은 손을 뻗어 라인하르트를 강하게 껴안았다.
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 아렐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본능에 가까웠다. 슬퍼하는 라인하르트를 보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자연히 손이 나간 것이다.
아렐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이러한 감정을 아렐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은 과거에도 존재했으나 이처럼 있는 힘을 다해 껴안으며 보듬어주고 싶다는 감정이 든 건 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그녀는 발키리아였기에. 감정을 지녀선 안 되는 무기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꽈아악!
말은 필요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슬퍼하지 말라고 해야 할까? 더이상 울지 말라고 눈물을 닦아줘야 하는 걸까?
하지만 지금 라인하르트에게 필요한 게 ‘온기’였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어지는 유대감.
그에겐 유대감이 부족했다.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고 어설펐다. 하지만 그의 감정과 진심은 항상 일관되어왔다. 그저 표현하지 못할 뿐.
그것을 알기에 아렐은 그저 라인하르트를 꽉 껴안을 뿐이었다. 저주가 자신을 헤치더라도, 설령 죽이더라도 이 감정을 부딪치는 것 외에 아렐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지금 그는 울고 있었다. 우는 아이와 같았다. 중요한 것을 상실하여 헤매는 어린 양이었다. 겉으로는 온갖 강한 척을 하지만, 그 속은 누구보다도 여렸다.
“쿨럭!”
라인하르트가 붉은 피를 토했다.
곧이어 흐렸던 눈이 정상으로 되돌아오고 날개 역시 움츠러들었다.
이윽고 라인하르트와 아렐의 눈이 마주쳤다.
“······ 좀 떨어져라. 아프다.”
“아······.”
정신을 되찾은 아렐이 당황한 채 급히 라인하르트에게서 떨어졌다.
‘내가 무슨 짓을?’
앞뒤 안 가리고 뛰다가 생긴 일이었다. 솔직히 전후가 어떻게 진행된 건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 너무 강하게 안은 것 같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은데.”
“죄, 죄송합니다.”
“나를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냐?”
아렐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죽일 생각이었냐니!
“겨, 결코 그런 생각은······.”
“농담이다.”
“아······.”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건 농담이 아니다만.”
“죄송합니다······.”
의기소침해진 아렐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라인하르트가 손을 올리곤 기침을 해댔다.
“쿨럭! 걸어서 나가진 못하겠구나. 이를 어찌한다.”
“제, 제가 업어드리겠습니다.”
아렐은 내심 자신의 머리를 몇 차례나 두드렸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무슨 짓을 한 건가.
급히 라인하르트를 업은 아렐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이전에도 라인하르트를 업고 산을 올랐던 기억이 있는데······.
두근! 두근!
당황해서인가?
그때보다 심장의 박동 수가 유난히 더 빠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가프가 자신을 희생하여 천마신공을 완성시켰지만, 문제는 원죄였다.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사라진 즉시 원죄가 존재를 일으킨 것이다.
―지긋지긋한 놈. 드디어 사라졌구나!
문을 열고 나오려는 원죄와 놈을 막으려는 나의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그러나 가프가 내 안에서 사라졌다는 그 공허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치 반쪽이 떨어져나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놈에게 반쯤 주도권을 넘기고 말았다. 그것을 본 교만의 델바란은 반쯤 튀어나온 원죄를 ‘천마신공’의 여파로 착각하며 혐오하곤 바깥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참으로 멍청한 녀석이다. 이런 놈을 위해 자신을 포기할 줄이야.
원죄는 가프를 비웃었다. 그가 죽으면 원죄는 기회를 얻는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가프는 굳이 자신을 희생했다.
그야말로 멍청하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너의 몸도, 천마의 무공도 모두 나의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마신이 되어주마!
1대 대죄종, 원죄.
그가 보기에도 천마신공은 엄청난 보물이었다.
이런 무공을 만든 놈이 어째서 바깥의 가짜 신들을 때려잡지 않은 건지 의문이 갈 정도였다.
하지만 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몸과 천마의 무공마저 자신이 갖는다면 전무후무한 마신이 탄생할 것이다.
······ 탄생할 것이었다.
놈의 슬픔으로 인한 공백을 파고들어 주도권을 빼앗던 원죄는 다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놈이 순식간에 공백을 없애고 도리어 원죄를 조여오기 시작한 탓이다.
―이, 이게 무슨?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감정이 채워지며 이전보다 강렬하게 빛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 따위가 어찌 원죄를 압박할 수 있겠는가.
감정을 넘어서는 무언가.
이건······.
―깨달음!
깨달음을 얻어, 각성하고 있다.
한차례 벽을 뛰어넘은 것이다.
스스로 정해두었던 한계를 지금 깨트렸다.
―아아······!
원죄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럴 수는 없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어찌 이렇게 짧은 시간만에 ‘공백’을 채울 수 있단 말인가.
원죄는 그 이름처럼 감정에 파고드는 괴물이다. 불안정한 감정에 더 크게 반응하며 순식간에 몸을 빼앗는 괴물.
그런데 빼앗을 수가 없다.
다시 갇혀버린 것이다.
‘졌으면 얌전히 찌그러져 있거라.’
놈을 가둔 뒤 놈에게 말했다.
원죄는 이미 한 번 패배하여 떨어진 놈이다. 그런 놈에게 몸을 내어줄 순 없지 않겠는가.
이제 직접 놈을 다룰 것이었다.
목줄을 채우고 짐승처럼 다뤄주어야 다시는 이와 같은 짓을 벌이지 못할 테니.
“아······.”
정신이 되돌아온 직후,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의 아렐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아렐이 아니었다면 정말 빼앗길 뻔했다.
‘가프는 이것조차도 꿰뚫어 보고 있었을까.’
자신이 손을 놓으면 원죄가 날뛸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렐이 달려오리라는 것 역시 알았을 것이다.
그는 내가 회귀한 사실조차도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혼자가 아니다.’
과거엔 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자가 없었다.
내가 죽으면 도리어 기뻐할 자만 넘쳐났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예전과 같은 길을, 나는 걸을 생각이 없다.
가프 역시 그것을 바랄 것이었다.
그와는 다른 길을 내가 걷기를 바라며 스스로를 희생했으리라.
게다가 아렐의 당황한 눈을 보니 어쩐지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은데.”
“나를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냐?”
“겨, 결코 그런 생각은······.”
없었겠지.
나도 안다.
‘나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군.’
알지만, 여전히 장난은 치고 싶었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도 사실이었고.
“농담이다.”
“아······.”
농담이라 말하니 안심하는 분위기다.
당연히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건 농담이 아니다만.”
“죄송합니다······.”
아렐의 얼굴이 다시 사색이 되었다.
원래 이렇게 감정변화가 있는 녀석이었나?
··· 생각보다 재밌다.
“쿨럭! 걸어서 나가진 못하겠구나. 이를 어찌한다.”
“제, 제가 업어드리겠습니다.”
한 차례 각혈하자 아렐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아니, 창백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크엘프인 아렐의 얼굴이 하얘질 순 없으니까.
아렐의 등에 업혀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를 보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혔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귀엽다?’
생각해보니, 누군가를 귀엽다고 느낀 적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개나 고양이한테나 얼핏 느꼈던 감정이니. 그거랑은 좀 다른가?
아무튼,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다.
동생들에겐 단 한 번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
라우넬도, 카잔도, 카르몬도, 리온도.
왠지 받았으면 더욱 큰일일 것 같지만.
‘그나저나.’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상쾌하다. 이런 상쾌함 또한 처음이다.
여유가 생겼다.
이전과는 다른, 심적인 여유가.
가프의 희생은 슬프지만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북방으로 가거든 그와 그의 어머니를 위한 제를 지내야겠다.’
허나 북방의 의식에 따라 죽은 자를 기리는 제를 지내리라.
그러기 위해선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종지부를 찍고, 마계를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천산의 마왕들과의 경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도 않다.
특히 이제부턴.
‘원죄의 힘에 기대는 건 지양해야 한다.’
원죄에게 목줄을 채웠다.
원한다면 이전보다 원죄의 힘을 더욱 끌어다 쓸 수 있다.
그러나 교만을 비롯한 마왕들을 이기려면 이건 정답과 거리가 멀다.
특히 원죄의 힘을 끌어다 쓰는 순간 내 가능성은 딱 원죄의 수준까지만 가능해질 것이었다.
강제로 놈의 힘을 빼앗으면 당장은 강할지언정 결국 패배하리라.
알파와 베타와 같은 주신들의 멱살을 잡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원죄는 오래전에 패배했는데, 이제는 주신들의 숫자도 열 둘이나 있었다.
‘원죄를 완전하게 굴복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천마신공이 필요하다.’
굴복시킨 뒤라면 모를까.
그러기 위해선 천마신공을 완전하게 익힐 필요가 있었다.
이후 놈을 꿇리면 4대 대죄종도, 더 나아가 저 주신들까지도 위협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게 있었다.
‘··· 천마의 계승.’
원죄도, 델바란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건 바로 내가 천마의 이름을 계승했다는 사실.
마족은 자신의 이름을 룬으로 남길 수 있다.
룬은 마정석같은 것보다 더한 에너지의 집합체다.
순수하기 짝이 없는 그 힘은 감히 견줄 게 없다고 한다.
오십여 마족이 내게 계승한 이름, 그 룬으로 발록마저 깨우지 않았나.
용과 같은 존재에게도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게 룬이다.
그럴진대.
‘천마의 룬이라.’
마계에서 가장 강력했다 전해지는 천마.
그 천마가 내게 이름을 계승했다.
당연히, 그 룬도 내가 이어받았다는 말이다.
< 마왕(9)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