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라면 남을 위한 희생이나 헌신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일은 영원히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평생을 독선적으로 살아왔으나 자신 역시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외면하고 밀쳐내도 인간은 상호 작용하는 동물이었다.
‘너는 나와 닮았다.’
라인하르트.
그는 자신과 닮았다.
세상을 증오하면서도 마음 한쪽에선 희망을 품고 있는 모습이.
그래서일까. 그래서 더 지켜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천 년간 봉인되어 인간의 형상이라 할 수 없음에도, 그 정신조차도 이미 마모되어 더이상 살아있다 할 수조차 없음에도······.
‘시간을 거슬러 돌아왔으나 사과할 대상도, 사과받을 사람도 없어졌다.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치 그와 같았다.
마계를 떠돌며 강해져 북방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자신과 어미를 버렸던 자들은 모두 죽어있었다.
이에 폭주하여 폭군처럼 북방을 지배했으나, 정신을 차렸을 땐 너무 많은 이들이 자신의 변덕으로 인해 죽어있었다.
죽은 자에게, 사라진 자에게 사과할 수는 없으니 가프는 자기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인하르트도 같은 경우리리라.
그래서 더 주변을 둘러볼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미워하니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게다.
그 착각을 깨지 않으면 평생이 불우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벽을 넘을 수 없다.
모두가 불행해지는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착각은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깨지 못한다.
끝에 다다라 깨닫고 후회할 수는 있겠으나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지금의 너를 부정하지 마라.’
하여, 가프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천마의 봉인을 깼다.
직접 보여주기 위해.
자신과 무척이나 닮은 라인하르트가, 자신과 다른 길을 가는 걸 보고 싶어서.
“가프.”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쏟아지는 눈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청명한 눈.
“······ 어머니.”
“아름답지 않니, 가프.”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가프는 알지 못한다.
하물며 그녀와 그를 버린 이 눈밖에 없는 북방이 대체 무엇이 아름답다는 것인가.
가프는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 아름답습니다. 무척.”
우수수 떨어지는 눈들이, 마치 꽃잎 같았기에.
*
평화협정단이 성공적으로 북방과의 평화를 가져왔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그 중심에는 황자 라우넬이 있었다.
하지만, 협정을 맺은 뒤에도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협정이 순식간에 진행된 건 라인하르트 덕이다.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
라인하르트가 포션을 주지 않았더라면 일에 난항을 겪었을 것이다. 천하의 카를로스 대공도 지지부진하던 것을 자신이 쉽게 해낼 수는 없었을 테니.
이대로 만족하며 제국으로 돌아간다면 자신이야말로 무능함을 증명하는 꼴이다.
‘적어도 카를로스 대공이 악마교단과 관계되어있다는 증거만이라도······.’
그러나 증거를 찾을 수만 있다면 카를로스 대공을 처단할 수 있다.
물론 찾지 못한다면 결국 카를로스 대공은 법의 망도 빠져나갈 것이다.
그 뒤 일어날 일은 파국이었다. 내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라인하르트는 내게 시간을 벌어준 거다. 그러니, 해내야 한다.’
라우넬은 리치의 던전을 뒤지고 있었다.
자신과 피닉스 기사단이 함께 갇혔던 그곳.
‘이곳에 갇힌 뒤 나를 구하고 리치와 싸운 건 신성군주다.’
꿈인 줄 알았다. 현실이라도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 던전에 들어오니 그때의 기억이 다시 샘솟기 시작한다.
리치와 싸운 건 신성군주일 터였다. 그 뒤 본드래곤에 태워 자신을 제국으로 데려다준 것 역시 신성군주였다.
그런데 왜.
‘라인하르트. 왜 여전히 너의 모습이 보이는 거지?’
휘청.
“으음.”
“괜찮으십니까, 저하?”
“괜찮다.”
기사들의 걱정어린 눈빛에 라우넬이 고개를 저었다.
잠시 현기증이 들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탓이다.
라우넬은 곳곳에 난 전투의 흔적들을 살펴보았다.
그중 하나를 짚은 라우넬이 말헀다.
“이것을 보아라. 벽에 긁힌 검상 중 하나가 정령검 칼리번과 비슷해 보이지 않느냐?”
“얼추 자상의 크기는 비슷해 보입니다만······ 이곳에 칼리번의 흔적이 남아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기사의 반응은 당연했다.
애당초 리치에게 납치되었을 때 칼리번은 제국에 있었다.
하지만 칼리번이 지닌 검의 자상과 흔적이 무척이나 유사했다.
만약 라인하르트가 이곳에서 칼리번을 휘둘렀다면, 이런 자국이 남았을 것 같다.
물론 비슷한 형태를 한 검은 많지만 칼리번은 천 년 전의 무기다. 두껍고 뭉툭하나 검의 손잡이 쪽과 연계되어 돌기처럼 튀어나온 형상은 오직 칼리번만 지닌 고유의 형태였다.
그 흔적이 왜 이곳에 남아 있단 말인가.
‘라인하르트는 이곳에 왔다.’
어쩌면,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이 꿈이나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라인하르트가 이곳에서 리치와 싸웠다.
그렇다면, 라인하르트는 신성군주다.
허나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라인하르트가 신성군주라면······ 북방의 반응도 이해가 된다.’
더욱이 이해가 안 되는 건 북방인들의 반응이다.
고작 포션 하나에 질질 끌던 평화협정을 마무리시켰다.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된 것처럼.
신성군주가 나타난 시기와 라인하르트가 북방에 온 시기도 맞물린다.
‘카를로스 대공의 군대를 지연시킨 것도 라인하르트다. 라인하르트가 병사들에게 지급될 마약을 모조리 태웠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대공이 금지된 마약을 사용했다는 증언은 확보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다만, 라인하르트가 이 일에 깊게 관여했다는 또 다른 증언들도 하나, 둘 확보되어가는 중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만약······ 정말로 라인하르트가 신성군주라면?
‘라인하르트. 무엇을 하고 싶은 거냐.’
감이 잡히지 않는다. 라인하르트의 생각이. 그가 걸어가는 길의 방향이.
황제의 직조차도 포기하고서 기껏 된 게 신성군주라니.
북방을 일통한 그 자리가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에 비하지는 못할 것이건만.
그러나 확실한 건 라인하르트는 스스로 신성군주임을 숨겼다.
이유는 짐작이 갔다.
‘황태자가 북방 야만인들의 신이라는 게 알려지면 반황실파에게 공격받았을 것이다. 카를로스 대공을 잡는 게 목적이라면 당장은 숨기는 게 맞다.’
라우넬은 턱을 쓸었다.
라인하르트가 카를로스 대공을 잡으려고 한 거 분명해보인다.
이것만 해내면 황제의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다.
그런데 그 공마저 자신에게 넘겼다. 평화협정을 이끌어내고, 카를로스 대공을 잡으며, 황제가 되는 길을 양보한 것이다.
어째서?
가만히 있으면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을 텐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나 카잔, 혹은 황비들을 비롯한 대다수 황실의 반대에 부딪히긴 하겠으나 밀고 나가면 그만이다.
그때쯤이면 반대할 명분따윈 사라져있을 테니까.
‘······ 형이라고.’
······ 헌데, 밀고 나가지 않았다.
밀기는커녕 당겼다.
모든 공을 양보한 그 대가가 고작 ‘형’이라 부르는 게 전부다.
뿐만인가.
신성군주라는 정체가 들킬 가능성이 있는데도 자신을 구했다.
제국의 중심부로 향하며 자신을 치료시켰다.
만약 라인하르트가 양보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 사실들을 깨닫지 못했다면?
‘나는 폐인이 됐겠지.’
망가졌을 것이다.
단순한 육체의 망가짐만이 아니다. 정신 또한 망가져서 어떤 짓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 내전을 벌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라인하르트의 이러한 움직임은 자신에게만 국한되어있지 않다.
라인하르트는 2황자 카잔을 치료했다.
3황자 카르몬의 폭주를 고쳤다.
‘마수들의 침략이 있었을 때도 홀로 리온을 구했지.’
그리고 4황자 리온을 마수로부터 구했다.
이게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 형제를, 가족을 지켰다.
‘가족······ 가족이라고?’
라우넬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라인하르트가 걷고자 하는 길.
그 길이 결국 가족을 구하는 길이란 말인가?
‘왜 깨닫지 못했던 거지?’
라인하르트의 행동은 일관됐다.
변했다 생각한 그 순간부터, 그는 오직 가족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피가 흐르는 형제들과 황제를 위해서.
왜 그걸 몰라본 걸까.
변명하자면, 라인하르트가 티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체 무덤덤하게 행동한 탓이다.
모든걸 숨긴 채 조용히 그림자처럼 행동해온 영향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아봤어야 한다.
알아봤어야 하는데.
“하하!”
“······ 저하?”
절로 웃음이 나왔다.
라인하르트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게 가족이라니!
가족을 지키는 걸 최우선으로 삼고 움직인다 생각하면, 모든 게 앞뒤가 맞는다.
그는 지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진심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제야 라우넬은 깨달았다.
그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도, 한 명도 없다.
“참으로 멍청하구나. 그깟 선입견 때문에 진심을 몰라보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누가 라우넬 저하를 멍청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호슨 경. 내가 죽을 위기에 처하면 그대는 나를 구하겠나?”
“예. 저를 포함한 피닉스 기사단 전원이 라우넬 저하를 목숨걸고 지킬 것입니다.”
호슨 경이 표정을 굳힌 채 말했다.
진심이다. 피닉스 기사단 전원은 라우넬 한 명을 위해 전원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 진심을 알기에 라우넬은 투정을 부릴 수 있다.
내일을 그릴 수 있다.
“황태자가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예······?”
“그를 구하겠나?”
“으음······ 최선은 다하겠습니다만······.”
“그럼 황태자를 구할 사람은 누가 있겠는가?”
“황룡기사단······ 이 구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럴까.
목숨을 건다는 건 그만한 유대가 있어야하는 법.
흩어졌다가 이제 겨우 뭉친 그들이 진심을 다해 라인하르트를 구하겠는가.
그것을 알깅 호슨 경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구할 것이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저하께서요······?”
“라인하르트 황태자. 아니, 이제는······ 형님이라 불러야겠구나.”
“······?!”
호슨 경의 표정과 눈이 경악으로 가득했다.
설마 지금 라인하르트 황태자를 두고 형님이라 말한 건가?
무언가 잘못 들은 게 분명한 것 같았지만, 라우넬은 결의에 찬 모습으로 쐐기를 박았다.
“나라도 형님의 진심을 알아봤어야 했다. 뒤늦게라도 깨달았으니······ 더는 후회가 쌓이도록 묵과할 순 없다.”
라우넬은 다짐하듯 말했다.
여태껏 형이라 부른 것도 그의 앞에서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의 진심을 겨우 엿본 지금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더 많은 후회가 쌓이기 전에 그만둬야 한다. 그의 진심을 더 이상 왜곡해선 안 된다.
그는 광인이 아니며, 누구보다도 더 가족을 위하고 있다는 것을.
허나 편견을 깨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자신부터 바뀌어야만 한다.
라인하르트에 대한 인식의 개선을 위해선 말이다.
라우넬은 입술을 깨물었다.
“호슨 경. 나는 황제의 재목이 아니다.”
“······!”
“진짜 황제의 재목은······.”
“엄청난 폭설입니다! 더 쌓이기 전에 빠져나가야 합니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라우넬은 주먹을 쥔 채 던전을 나섰다.
그러자 보였다.
미치도록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북방에 있는 내내 지겹도록 본 눈이다.
누가 봐도 눈썹을 찡그릴 광경이지만.
‘아름답군.’
저 눈들이, 지금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다.
*
‘아······!’
아렐은 심장이 저려오는 걸 느꼈다.
아프다. 하지만 일반적인 아픔은 아니었다.
‘슬픔.’
슬퍼하고 있다. 라인하르트가.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하기 짝이 없는 감정에, 아렐은 가슴을 옥죌 수밖에 없었다.
아렐은 그 즉시 움직였다.
천산에 오른 이후 라인하르트와는 개별행도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렐의 곁에서 아렐을 지키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격동을 느낀 이상 언제까지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디있는지 느껴져.’
아렐은 즉시 방을 나섰다.
라인하르트가 있는 곳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이곳은 천산의 마왕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발을 들이겠다면 죽이겠다.”
거대한 문의 앞에서, 마족들이 그녀를 막아세웠다.
아렐은 그 즉시 검을 들었다. 갈라틴. 갈라틴 드 데바론. 이제 시동을 외우지 않아도 검은 자신의 온전한 힘을 세상에 개방시켰다.
화아아악!
거칠게 쏟아지는 빛의 입자.
“성검······?”
“성검이다!”
순식간에 마족들이 모여들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숫자. 그 하나하나가 강력하기 짝이 없다.
부딪히면 죽을 것이다. 제아무리 그녀가 발키리아라고 해도 이만한 숫자의 마족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므로.
그러나 가슴이 아프다. 슬픔은 계속해서 더 커지고 있었다.
지켜야 한다.
그가 눈물짓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라인하르트의 기사였기에.
슬퍼하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계속 슬퍼하게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멈춰라.”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마왕이 모습을 드러낸건.
“교, 교만이시여!”
“교만을 뵙습니다!”
교만의 델바란.
그가 문을 열고 나와 아렐을 흘겨보았다.
“‘폭식’이 데려온 녀석 중 하나인가보군. 헌데, 성검 사용자라.”
성검.
성스러운 힘을 담은 검.
흉내낸 가짜가 아니라 진짜다.
십이주신의 힘이 담긴 검들은 유사품에 불과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아주 극소수로 ‘성유물’처럼 변하는 무기들이 있었다.
격을 쌓고 쌓아서 마침내 변환점을 맞이한 일종의 ‘특이점’이다.
저 검이 바로 그것이었다.
교만의 델바란이 피식 웃었다.
“주인이 걱정돼서 달려왔느냐? 죽음을 각오하고?”
“······.”
아렐은 답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격.
처음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강하다.
싸운다면 이길 수 없다.
그가 막아선다면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렐은 그저 검을 들었다.
그러자 교만의 델바란이 몸을 비켜섰다.
“그렇다면 들어가 보거라. 나는 차마 만질 수가 없으니.”
교만의 델바란조차도 만질 수가 없다?
대체 무슨 상황이기에?
그가 이어서 말했다.
“허나, 들어가면 너는 죽는다. 그래도 들어가겠느냐?”
휙!
순식간이었다.
델바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렐이 안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그딴 게 천마신공이라니. 하!’
델바란이 질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 마왕(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