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124화 (124/146)

순간 배경이 뒤바꾸었다.

액자에 새로운 그림을 끼워 넣듯이.

이윽고 내 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가프.

북부의 마왕.

철혈, 무적의 군주.

수많은 부족으로 찢어진 북방을 유일하게 통일한 제왕이며 적에게 한 점 자비없는 잔인함을 보였기에 마왕이라 불렸다.

무결점. 약점 따윈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존재.

하지만, 그 누가 알까.

“······ 강해지고 싶었다.”

한없이 약하기만 하였던 그의 어린시절을.

사시사철 내리는 눈. 태생부터 몸이 약했던 가프는 본래 죽었어야만 한다. 약한 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한설의 땅에서 그가 살아있음은 기적과도 같았다.

그러나 워낙에 약체였던 탓에 어미와 함께 부족에서 쫓겨난 그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몸을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하며 아이를 키운 어미는 결국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가프. 북방은 아름다운 곳이란다.

죽기 직전까지 그의 어미는 북방을 옹호했다.

보이는 것이라곤 새하얀 눈밖에 없는 이곳을 아름답다며 끝까지 눈에 담았다.

하지만 가프는 그런 어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북방도, 북방의 인간들도, 이 세상 자체가 그에겐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등졌다.

마계.

넘어서는 안 되는 그 땅으로 향했다.

이 세상이, 이곳의 인간들이 자신을 버린다면 자신 역시 그들을 버리리라 생각하며.

“똑같더군. 인간들의 세계나, 마계나.”

약자는 죽고 강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세상.

하지만 이곳엔 위선이 없다. 어중간한 자비 또한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 마계의 저주를 견디는 건 불가능하다.

가프는 하루가 다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죽을 때가 되어서야 살고싶다는 욕망이 피어났다.

“이곳에서 살아남는다면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들도 두려워하며 기피하는 게 마계다.

이 마계에서 자신이 살아남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는 것이지 않을까.

자신은 약한 게 아니라고.

약해서 버려진 게 아니라고.

그들이 그저 자신의 강함을 못 알아봤을 뿐이다.

그러니 증명해주마.

그때부터 가프는 필사적으로 살았다.

죽은 마족과 마수의 시체를 뜯어먹으며 굶주린 배를 채웠다. 해골 안에 고여있는 물이라도 감사히 마시며 다가오는 죽음을 애써 피해갔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마계의 저주는 더 이상 그를 약하게 만들지 못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몸은 커졌다. 뼈밖에 없던 몸에 살이 붙고 근육이 생겼다. 마족도, 마수도 이제 그를 사냥하려고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도리어 가프는 그들을 사냥하며 하루하루 강해져갔다.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만난 것이다. ‘신군’을.”

정확히는 신군의 시체를.

깊고 좁은 동굴 안에서 그는 쓸쓸하게 죽어있었다.

‘천마신공’이라 적힌 반쪽짜리 책을 들고서.

“천마신공. 신이 될 수 있는 무공. 하지만 반쪽짜리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가프는 천마신공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동굴 안에는 연무를 위한 모든 준비가 다 되어있었다.

셀 수 없이 긴 시간을 동굴 안에서 보낸 다음에야 가프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5년? 아니, 10년쯤 되었을 것이다. 천마신공의 전반부를 익힌 나는 다시 북방으로 향했다. 그곳을 지배해 내 강함을 증명할 생각이었다.”

자신과 어미를 버린 북방.

그 북방을 지배해 그들의 선태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해주리라.

수많은 부족도, 군주들도 가프를 막지는 못했다.

가프의 강함을 숭상하는 부족민들은 들어났고 순식간에 가프는 북방의 패자가 됐다.

“싱겁더군. 그리고 어이가 없더군. 이렇게 약한 인간들이 나를 재단한 건가? 밟으면 터져 죽을 개미 같은 이런 놈들이?”

어미의 말처럼 북방은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다.

사시사철 눈보라가 치는 이런 땅의 어디가 아름답다는 것인가.

북방을 재패하고 지배하며 그는 북부의 마왕이 되어갔다.

“모든 게 재미가 없다고 느낄 때 즈음, 북방의 용이 나타났다. 11번째 위업으로 내가 선정되었다고 말하는데 꽤 강하긴 하더군.”

위업인지 뭔지 별 관심은 없었다.

다만, 오랜 심심함을 달래줄 상대가 나타나 가프는 기꺼워했다.

장장 칠주야를 싸웠다. 북방의 빙해가 수없이 갈라지고 쪼개지며 마침내 가프는 놈의 몸통을 잘랐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긴 기쁨도 잠시, 놈의 몸에서 엄청난 ‘저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놈의 몸통에서 흘러나온 저주는 마계의 그것과도 같았다. 마계의 저주를 농축해놓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 가만히 놔두면 북방의 모든 인간들은 그 저주에 죽을 것이었다.”

가만히 놔두면 북방이 사라질 터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리라.

솔직히 별 상관은 없었다. 이 망할 북방 따위가 사라지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애당초 이곳에서 자란 것도 아니거니와 모두에게 버림받지 않았던가.

―가프. 북방은 아름다운 곳이란다.

······ 어미의 마지막 말만 떠오르지 않았다면.

어미의 마지막 모습만 떠오르지 않았다면, 놔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용의 저주를 온전하게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나도 방대했으며, 그러기엔 아직 가프는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마신공의 전반부만으로도 나는 적이 없을만큼 강해졌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모두를 지킬 만큼 강해지진 못한 것이다.”

결국 가프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 놈의 저주와 함께 스스로를 가두었다.

그렇게 가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북부의 마왕. 수많은 북부인들의 증오를 받는 인물로.

이후 천년.

그는 육체가, 정신이 모두 무너져 있었다.

라인하르트를 만나 반쯤 기생하며 간간히 이성을 찾기는 했지만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진 못할 것이었다.

무너져가는 정신을 애써 붙잡고 있는 이유.

북방의 용조차 죽였으니 더 이상 미련은 없어야할 터이나.

“그동안 너를 지켜보았다.”

······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마치 제 3자처럼. 가만히 그의 세상을 지켜만 보고 있었던 내가 이내 그의 세상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시선을 돌려 가프를 쳐다보았다.

“라인하르트.”

분명히 서고에서 책을 쥐고 있었을 텐데.

정신을 차리자 이곳이었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른 뒤에야, 나는 비로소 나를 자각할 수 있었다.

“비운의 황태자. 모두에게 버림받고 세상을 파멸시킨 광인이여.”

“··· 내가 시간을 되돌아온 사실도 알고 있는 모양이로군.”

알고 있다. 모두에게 버림받고 모든 걸 파괴한 광인의 시절은 과거였으므로.

모든 걸 알고서 내게 말을 걸었다. 왜?

자신이 익히지 못한 천마신공의 후반부가 궁금해서일까?

가프가 웃었다.

“알다마다. 뿐만이겠느냐. 네 머릿속에 들어있는 ‘제로’라는 기물과 ‘박문식 박사’, 그리고 ‘원죄’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한 몸에 같이 있었으니 모르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제로의 가상공간 속에서 벌어진 일조차 알고 있다는 건 예상 외였다.

가프의 다음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죄를 온전하게 가둘 수 있었던 게 오직 그 박사 덕인 줄 아느냐?”

“네가 돕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원죄’는 가둔다고 얌전히 갇힐 놈이 아니다. 최소한 문고리를 지킬 누군가는 필요하지.”

가프는 원죄가 나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문고리를 눌렀다.

튀어나오려고 할 때마다 저지시킨 게 그라는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조용했던 그가,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에 모습을 보인 걸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맙군.”

“······.”

어쨌든 문고리를 잡아둔 게 가프였다면 고마운 건 사실이었다.

아니었다면 원죄에게 몸을 빼앗겼을 테니.

솔직하게 고맙다고 말하자 가프가 멀뚱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곤 크게 웃고 말았다.

“참으로 이상한 놈이다. 보통 자기 몸에서 지켜봤다고 하면 불쾌해해야 정상 아닌가?”

“나는 보통이 아니다.”

“음. 그것도 그렇다. 보통내기였다면 내가 지켜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다.

자신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다.

가프는 고개를 내저으며 이어서 말했다.

“······ 라인하르트. 네가 보기에 이 세상은 아름다운가?”

아름답냐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최악이다.”

이 세상은 겉으로만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그 내부는 썩을대로 썩어있다.

인간세상만이 아니다. 용들도, 저 십이주신이라는 것들도, 심지어 이 행성의 바깥은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곳을 빈말로라도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지키려고 하느냐?”

“이 세상을 내가 왜 지켜야하지?”

이 세상을 지키려는 게 아니다.

그저 저 하늘 위에서 떵떵대는 십이주신들의 꼴이 같잖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프는 그 사실마저도 부정했다.

“지금 너의 행동을 보거라. 북방과 제국, 용들과 마계에까지 닿았다. 이것이 세상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냐?”

“닿는대로 행동할 뿐이다.”

가프가 순수하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네놈은 나와 닮았다.”

죽도록 북방을 싫어했던 가프는 북방을 지키고자 목숨을 내던졌다.

하지만 지금도 솔직히 북방이 아름다운지는 모르겠다.

아직까지도 그는 북방이 혐오스러웠다.

“그렇기에 너는 천마신공의 후반부를 익히지 못할 것이다.”

“······ 왜지?”

“너를 대신해 죽어줄 자가 있느냐?”

“······.”

나를 대신해 죽어줄 사람.

글쎄. 없지 않을까.

생각할 것도 없었다.

황제 데우스도, 라우넬도, 카잔도, 아렐도······ 기꺼이 생명을 내놓을 정도의 사이는 아닐 터였다.

예전보다 더 가까워지긴 했지만······ 그뿐이다.

서로가 필요에 의해 뭉쳤을 따름이지.

돈독한 우애, 생명을 던질 정도의 친화 따위를 쌓기엔 시간이 부족했으므로.

가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없겠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왜인 줄 아느냐?”

“······.”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너의 행보를 되돌아 보거라. 어느 미친놈이 회귀했다 하여 이런 행보를 보인단 말이냐? 얌전히 있으면 황제가 되어 탄탄대로 할 수 있을 것을.”

“그건······.”

“저 십이주신 때문이라고? 아서라. ‘네가 있을 곳’이 어디인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어도 되는 건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방황하는 것이다.”

가프가 마계로 떠났던 것처럼.

정곡을 찔렀다. 대못이 박힌 기분이었다.

파문이 인 내 눈을 가프가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에 내가 비쳤다.

나는 폭군이었다. 내 모습은 과거 대륙을 몰살의 길로 몰아넣었던 그 모습이었다.

아직까지도.

피에 젖은 채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무자비한 광인.

시간을 거슬러 성장한 줄 알았으나, 사실은 제자리였던 것이다.

나는 아직 내가 있어야 할 곳조차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그런 낯간지러운 말이 아니다. 생각보다 너를 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너를 위해 목숨을 던질 이가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그게 누구지?”

“내가 알려준다고 믿을 수나 있겠느냐?”

믿지 못할 것이다.

믿음이라는 건, 목숨을 바칠 정도의 신뢰라는 건 단순한 말로만 생겨나는 게 아닌 탓이다.

하지만 가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보여주려고 한다.

“라인하르트. 천마신공은 지키기 위한 무공이다. 하지만 온전하게 익히기 위해선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지.”

천마신공의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가프의 표정 역시 더없이 진지해졌다.

“신군은 그것을 몰랐기에 온전하게 천마신공을 익힐 수 없었다. 결국 반쪽만 들고 도망쳐버렸지. 후에 깨달았으나, 결국 후회만 남았다.”

신군은 자신의 후회를 적어두었다.

천마신공은 처음부터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지만 천마신공의 전반부를 제외한 후반부를 도저히 익힐 수가 없었다.

아예 후반부의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신군은 제대로 된 전반부만을 갖고 천산을 내려갔다.

허나 후에야 신군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후반부가 잘못 되었던 게 아니다. 그저 숨겨져있었을 뿐이다. 봉인되어 있었을 따름이다.

스아아아아.

가프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시공간이 그의 중심으로 모여들며, 무언가로 변하고 있었다.

그것은 책이었다.

천마신공의 전반부.

“······ 네놈은 나와 닮았지만, 나와는 다른 결말을 맞이하길 바라마.”

라인하르트는 그에게 은인이었다.

북부의 용을 온전하게 죽일 수 있게 도왔으며, 그의 후손과도 만나게 해주었으니까.

리온. 제국의 4황자. 그러니 어찌보면 라인하르트와도 무관한 관계는 아니었다.

이미 다한 목숨. 라인하르트를 위해서라면, 마땅히 던질 수 있지 않겠는가.

천마신공은 천마가 남긴 유지이자 저주다.

그 저주를 풀기 위한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헌신. 희생.

물론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의 희생이어야만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해야만, 공감해야만 이 저주를 풀 수 있다.

곧 가프의 생명을 바탕으로 전반부와 후반부가 합쳐졌다. 그러자 책 위로 새로운 내용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피처럼 붉은색의 글씨가.

《천마신공 : 극(極)》

《천마의 이름을 계승할 진정한 계승자여.》

*

천산서고에 도착한 델바란은 당황한 눈으로 라인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손에 들린 책을.

‘천마신공······?’

분명히 들고 있는 저 책은 천마신공의 후반부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런 글씨도 보이지 않는다. 적혀있어야할 글자가 모조리 사라졌다.

게다가······.

‘뭐냐, 저것은.’

라인하르트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 눈물이 아니었다.

교만의 델바란조차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 마왕(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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