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군림보를 알고 있다?’
천마군림보.
천 년 전 북부의 마왕으로 군림한 가프의 기술이다.
순간적으로 주변 나노머신의 에너지를 방전시키는 양날의 검.
제로는 이것을 전자기펄스(E.M.P)라고 말했다.
헌데 용들조차도 못 알아본 그 기술의 이름을 혈마종이 입에 담은 것이다.
하물며 반응도 예사롭지 않았다.
극에 이른 경악과 당황.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눈빛과 몸짓.
천마군림보를 알고, 더 나아가 그것을 사용하는 내 존재가 혈마종의 입장에선 불가해와 같았기 때문이리라.
“호, 혹시······ 신군(神君)이십니까?”
“······?”
허나 그 불가해를 부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신군이라는 생소한 명칭으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신군. 신군이라. 저런 언행에 대해 나는 제법 익숙한 편이었다.
제멋대로, 자기 편한 대로 나를 ‘오해’하는 모습.
자신의 상식에 껴맞추어 나를 상상하는 자가 보통 저런 식이었다.
그리고 으레 그런 자들은 그 껴맞춘 오해의 모습을 굳이 묻지 않아도 입 밖으로 꺼내놓곤 했다.
“천마신공은 2대 대죄종께서 창안하신 기술. 그 묘리를 깨달은 제자를 ‘신군’이라 불렀습니다. 전설상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 지금처럼.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고 태도마저 바꾸었다.
‘신군’이라는 이름이 칠마종의 위에 있음을 시사하는 바였다.
하지만 나로서도 혈마종이 꺼내놓은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었다.
1대 대죄종은 지금 내가 흡수한 ‘원죄’다.
그리고 2대 대죄종이 바로 ‘천마신공’을 만든 당사자라는 말이다.
혈마종은 2대 대죄종의 제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천마군림보를 내게 알려준 건 가프다. 북부의 마왕이라 불렸던 그가 2대 대죄종과 인연이 있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어쩌겠느냐?”
이왕 이렇게 된 거, 저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작게 미소지으며 시종일관 여유를 관철했다.
천마군림보를 통해 순식간에 제압했지만 그렇다고 혈마종이 약한 것은 아니다. 제대로 맞붙었으면 제압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빠르게 결판을 냄으로써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갔다.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상식 밖의 결과를 내었으니 당황하며 마음대로 오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물어본 것이다.
내가 신군이라면.
그럼 어쩌겠느냐고.
“천죄시여.”
혈마종이 무릎을 꿇었다.
천죄. 이곳 천산의 마족들이 부르짖는 구호였다. 하지만 그것을 나에게 사용했다는 건 더없이 큰 의미가 있었다.
“2대 대죄종, 천마의 제자인 신군이시라면 ‘마왕’의 자격은 이미 충분합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정중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름을 알려달라고?
마족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값진 것.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이름을 잊으면 그들은 악귀나 혈종이 되기 때문이다.
하여 자신이 인정한 자에게만 이름을 알린다.
말인즉슨, 혈마종이 나를 인정했다는 의미다.
교만의 마왕 델바란도 천산에 오르는 걸 허락했을 뿐 이름을 물어오진 않았다. 내가 폭식의 권능을 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심지어 음마령 요호도 내 이름까지 묻지는 않았다.
굴복했을지언정 인정하지는 못했다는 뜻인데.
나는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
혈마종이 내 이름을 되뇌었다.
잊지 않으려는 듯 곱씹었다.
곧 그가 선망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군, 라인하르트시여. 부디 제 이름을 ‘계승’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
‘미친!’
음마령 요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혈마종의 입에서 튀어나온 저 말을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이름을 주고받는 것은 마족들 사이에선 무척이나 명예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혈마종은 현재 천산에 있는 네 마왕들 모두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혈마종은 자신이 진심으로 인정한 자가 아니면 이름을 알리지 않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칠마종 칠마령 대부분이 마왕들에게 잘 보이려는 것과는 상반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방금 그게 천마의 무공이란 거지? 그 천마?’
천마라 불리는 존재는 하나뿐이다.
마계가 태동할 때부터 지금까지 총 세 명의 ‘마신’이 있었다.
하지만 ‘마신’이라는 칭호는 마계 바깥세상에서 대죄종을 부르는 언어.
하여 마족들은 그들을 ‘대죄종’이라 불렀다.
그 셋의 대죄종 중 누가 가장 위대했었느냐 묻는다면 정확하게 답을 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 셋이 이룩한 업적이 너무나도 달랐던 탓이다.
하지만 단순한 ‘무력’을 평하자면 2대 대죄종인 ‘천마’를 언급할 자가 마계의 절반은 넘어갈 것이었다.
‘신군이라니······!’
신군. 2대 대죄종 천마의 직속제자를 신군이라 부른다는 건 천산에 있는 마족이라면 기본으로 아는 상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장 강력하다 여겨지는 대죄종이었기에 그를 우상화하여 따르는 마족 역시 많다.
그중 하나가 혈마종이었다.
‘혈마종은 2대 대죄종 천마의 열렬한 추종자다. 그러니 착각했을 리가 없어.’
천마군림보. 천마신공의 뿌리에서 나온 그 무공을 잘못 봤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신의 무공을 어찌하여 인간이 익힌단 말인가.
믿기지 않지만 현실이라면.
‘매혹이 통하지 않던 이유도 설명이 된다.’
수컷에 대한 서큐버스의 매혹은 절대적이다. 특히 욕망에 가득 찬 인간은 이 매혹을 절대로 뿌리치지 못한다.
그런데 그는 이겨냈다.
이겨냈다 뿐인가?
역으로 자신들을 지배하고 조종했다.
그런 기예가, 기적이 가능하게 하려면 평범한 인간으로는 불가능하다.
정말 신군 정도가 되지 않으면 말이다.
‘천마의 의지와 기술을 이은 신군이라면······.’
꿀꺽!
요호가 침을 삼켰다.
마계에 존재한 세 명의 대죄종.
그들을 살피자면 이와 같았다.
1대 대죄종, 원죄.
태초의 모든 죄악을 품은 마왕이며 마계를 평정한 최초의 신이다. 그러나 중간계를 수호하는 주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원죄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대 대죄종, 천마.
하늘의 마귀. 하늘의 대적자. 마계의 체계를 정립하고 무공을 창시한 절대자. 그가 사용하는 ‘천마신공’은 마계를 경천동지하게 했다.
하늘아래 적수가 없었다고 전해지는 최강자.
하지만 그는 야욕이 없었다. 만약 그가 원죄처럼 중간계로 나가 용과 신들을 배척했다면 충분히 성공했으리란 평이 많다.
3대 대죄종, 야차.
혈종의 주인. 수많은 혈종을 다스리던 그는 절대적인 힘으로 마계를 통치했다. 허나 원죄와 달리 바깥에 대한 욕심도, 천마와 같이 무언가를 정립하거나 만들겠다는 의지도 없었다. 역대 최악의 대죄종으로 꼽힌다.
그리고 지금.
4대 대죄종의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천마의 의지와 기술을 이은 마왕이 나타났다. 폭식의 주인이며, 신녀와 함께 천산을 찾은······.
‘기회.’
그는 기회였다.
최약체인 음마령과 서큐버스들이 ‘주류’에 편입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선수를 빼앗겼다는 점이었다.
천산의 마왕으로 인정받는데 필요한 건 단 두 명의 이름이다.
칠마종, 칠마령, 총 열 넷의 마족 중 두 명의 이름을 계승하면 비로소 천산의 마왕으로 공표된다.
하지만 요호는 아직 그에게 이름을 묻지도,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혈마종은 냅다 싸우더니 빠르게 태세를 전환한 것이다.
그녀가 알던 혈마종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혈마종도, 나도 아직 다른 마왕에게 이름을 계승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칠마종, 칠마령들이 마왕에게 이름을 계승할 수 있는 기회는 한 번뿐이다.
천산에 네 마왕들은 여덟 마종과 마령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비주류인데다 마령의 지위조차 불확실한 음마령의 이름을 계승하고자 하는 마왕은 여태껏 없었다.
혈마종이야 워낙에 외골수이니 그렇다고 쳐도.
“······ 제가 먼저입니다.”
음마령 요호는 생각을 고쳐잡았다.
굴욕이 아닌 기회라고 받아들이자.
혈마종이 확인한 신군이라면 그럴 가치가 있다.
“음? 뭐냐, 이름도 계승하지 못했으면서 따라다니고 있었던 거냐?”
혈마종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비꼬았다.
허나 맞는 말이다.
주변에서 비춰지는 시선이 어떨지는 뻔했으니.
“조금 더 신중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쯧. 네 이름을 계승해봤자 어디다가 쓴단 말이냐? 신군이시여. 마왕을 존중하는 두 이름을 정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음마령과 서큐버스들은 신군의 힘이 될 수 없습니다.”
“일의 선두를 따지자면 제가 먼저 라인하르트님을 뵈었습니다. 그리고 왜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앞으로 치러질 77일간의 전쟁에서 마왕의 뒤를 직접적으로 받치는 두 이름은 강력하고 올곧아야만 한다. 매혹밖에 쓸 줄 모르는 서큐버스 따위가 낄 자리가 아니지.”
빠드득!
음마령 요호가 이를 갈았다.
서큐버스가 매혹밖에 쓸 줄 모른다는 건 편견이다.
정말 그것밖에 몰랐다면 마령의 지위를 받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마종이 마령의 위라고는 하나 이런 비하들을 계속해서 참을 수는 없었다.
“그만.”
······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조율하고자 했다.
음마령과 혈마종은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 둘의 시선을 내게 돌린 채 입을 열었다.
“둘의 이름 모두를 계승하마. 하지만, 조건이 있다.”
“말씀만 하십시오. 신군이시여.”
“받들겠습니다.”
서로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내게 이름을 계승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같아보였다.
나로서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번거롭게 다른 칠마종이나 칠마령을 포섭하지 않아도 되니까.
“내부가 정리되지 않은 전쟁은 무조건 패배한다. 둘이 계속해서 신경전을 벌이겠다면 둘 다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천천히 둘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서로 사이좋게 악수하고 포옹하도록.”
“······!!!”
“······!!!”
음마령 요호와 혈마종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전신이 떨리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기야 이곳에는 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멀리서 지켜보는 수많은 시선들. 천산의 마족들이 나와 이 둘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굳어버린 둘을 향해 나는 쐐기를 박았다.
“그조차도 못하겠다면, 없던 일로 하마.”
“······.”
“······.”
음마령과 혈마종이 서로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단 한 번도 적대적이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다. 원래부터 사이가 나빴다지만 혈마종은 음마령을 무시했고, 음마령 역시 혈마종을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했다.
그런데 둘이 포옹을 하라는 것이다.
그게 이름을 계승해주는 유일한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미쳐버리겠군.’
둘의 생각이 처음으로 합치했다.
정말로, 돌아버릴 일이었다.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지 않은가.
혈마종과 음마령이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
“······ 내가 뭘 잘못 들은 건가?”
교만의 델바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고를 받았다.
“보, 보고한 그대로입니다, 교만이시여.”
마족이 몸을 떨며 입을 열었다.
교만은 왕좌에 앉아있었다.
그으으으.
그의 옆에 선 혈종이 마족을 바라보았다.
혈종의 입에는 피가 가득 칠해져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마족이나 악귀는 모조리 저 혈종에게 먹이는 게 교만의 취미였다.
“음마령과 혈마종이 껴안았다? 그리고 폭식에게 이름을 계승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혈마종이 말하길 ‘신군’이라고······.”
“······ 신군?”
음마령과 혈마종이 이름을 계승시켰다.
즉, 폭식의 주인은 정식적으로 천산의 마왕이 됐다.
마족이 아닌 타종족이 마왕으로 인정받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을 이토록 빠르게 끝냈다. 신군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군이라니.
“천마신공을 이은 후계자 말이냐?”
“예.”
천마신공.
말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상의 무공이다.
천마는 수많은 무공을 창시하고 마족들에게 나누었다.
그러나 천마신공을 이은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신군이라며 포장되고 있지만 천마를 제외한 그 누구도 천마신공을 사용하진 못했다.
애당초 책의 절반이 소실되었는데, 어떻게 익힐 수 있겠는가.
그것도 시작부인 절반이다. 전반부가 소실되어서 아무도 시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설마 천마신공의 전반부를 알고 있단 의미인가?’
후반부는 천산의 마왕만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이름을 계승한 폭식의 주인이 만약 전반부를 알고 있다면, 후반부 역시 보고자 발걸음할 게 분명했다.
“······ 천산서고로 갈 것이다.”
델바란의 표정에 처음으로 다급함이 떠올랐다.
*
“천마신공의 후반부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것을 얻었다.
천산서고.
나는 그 안에서 찢어진 책자 하나를 들었다.
천마신공.
찢겨진 후반부.
전반부가 소실되었다는데, 아무래도 그게 ‘천마군림보’인 것 같다.
‘걷는 법을 알아야 뛰는 것도 가능하니.’
천마군림보는 천마신공의 토대가 되는 무공이다.
천마군림보를 익힌 자만이 후반부 역시 익힐 수있다.
꿈틀!
그 순간이었다.
꿈틀! 꿈틀!
책을 쥔 순간, 내 손에서 가프가 날뛰기 시작했다.
< 마왕(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