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122화 (122/146)

천목이라 불리는 거대하기 짝이 없는 나무 아래에 연구소가 있다.

하지만 이곳은 마계였다.

인간들이 사는 중간계와 달리 정화되지 않은 방사성 물질로 만연한 장소.

평범한 인간은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사망에 이를 만큼 수치가 높은 곳이다.

나와 아렐은 제로에 의해 방사성 물질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리고 헬라는 자체적으로 방사성 물질에 면역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박문식 박사를 비롯한 연구소의 일원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정도로 방사성 수치가 높은 곳에서 굳이 연구를 진행할 이유는 없다. 할 수도 없다. 방사성 물질이 세상에 퍼진 건 제로가 만들어지기 전이니까.

‘옮겨놓은 건가?’

그렇다면 왜 연구소가 마계의 중심부인 천산에 있는 걸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옮겨놓은 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뜻인데.

게다가 이 천목이라는 것도 묘하게 눈에 거슬린다. 그 이유를 곧 제로가 설명했다.

[나무에서 특수한 방사성 물질이 분비되고 있습니다.]

방사성 물질이 방사성 물질이지, 특수한 방사성 물질은 뭔가.

피폭되는 순간 순식간에 변이를 일으키고 생명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저주가 바로 저것이다. 천목은 그러한 방사성 물질을 쉴 새 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천산에 있는 마족 역시 셀 수 없이 많다. 마왕을 비롯한 그들이 이 방사성 물질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특수한’이라는 단어에 귀추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특수하다는 것이냐?’

[생체와 결합하며 분열하고 있습니다. 방사성 물질 그 자체가 생명체를 진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연구소의 내부를 확인해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사성 물질이 진화를 촉진한다는 말이냐?’

[급속도로 팽창하고, 커다랗게 만듭니다. 이 ‘천목’을 비롯하여 마족들이 ‘악귀’, 혹은 ‘혈종’처럼 거대화하는 이유가 그러한 영향일 수도 있습니다.]

여태까지 방사성 물질은 해악이었다.

그 해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박문식 박사는 나노머신을 개발했다.

나노머신들은 방사성 물질을 먹어치운 이후 스스로 분열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간계라 일컬어지는 세상의 절반은 방사성 물질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이 됐다. 적어도 피폭당해 죽을 일은 좀처럼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마계’는, 천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대량의 방사성 물질은 생명체와 결합하여 진화를 촉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거대화’하는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이 마계가 유지되는 이유가 바로 저 천목에 있는 듯싶었다.

‘끊임없이 방사성 물질을 뿜어내니 정화하질 못하는 것이로군.’

왜 아직도 세상의 절반이 정화되지 않았는지 의문이었다. 십이주신이 이곳을 마계로 지정하고 오염된 채 놔두는 건 여러모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 의문이 이제야 풀린 것이다.

[‘천목’이 내뿜어내는 특수한 방사 물질은 그 아래에 있는 연구소와 관련이 있다고 추측됩니다. 연구소와 관련된 소실된 데이터 역시 보존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천목. 그리고 천목의 아래에 있는 연구소.

소실된 데이터를 살피면 모든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적어도 마계와 중간계가 분리된 이유나, 하다못해 이 천목이 자라게 된 원인 정도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으리라.

어째서 아직까지 ‘신호’가 살아있는 건지 확인하는 것도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풀릴 터.

[신호의 발신지는 이곳으로부터 지하 1,538m 지점입니다.]

문제는 연구소의 위치다.

대뜸 산을 팠다간 마족이나 마왕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혹시 지하로 향하는 길이 있지는 않을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음마령,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 혈마종님.”

음마령 요호의 표정이 굳었다.

혈마종. 칠마종 중 하나.

날카로운 이빨과 창백한 안색을 지닌 마족. 그는 흡혈귀였다.

서큐버스가 원기를 흡정해 매혹하는 존재라면, 흡혈귀는 피를 통해 지배하는 존재였다.

그가 요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에게 굴복한 건가?”

“······.”

“눈 뜨곤 볼 수가 없을 지경이군.”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그를 보며 요호가 입술을 깨물고 몸을 잘게 떨었다.

하지만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갔다. 패기롭게 의식을 진행하겠다며 나섰다가 서큐버스들 전체가 폭식의 주인에게 먹혀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이 퍼지면 모든 마종과 마령들의 비웃음을 사겠지.

차라리 비웃음으로 끝나면 다행이다.

“고작 반나절도 안 되어서 굴복하다니. 그러고도 네가 ‘마령’이라 할 수 있나? 그러니 다른 마령들도 음마령, 너를 파면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다.”

파면.

천산에서의 퇴출을 의미하여 주류에서 밀려난다는 의미였다.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고 고통이다. 파면되면 쫓겨나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서큐버스라는 종 자체가 부랑자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녀로선 듣기 힘든 말이었다.

“······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십시오.”

“후후, 발끈하는 거냐? 아무리 끈이 떨어졌다고 해도 이제 막 천산에 오른 폭식의 주인에게 빌붙는 건······ 이걸 염치가 없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

“네가 붙는다고 해도 그가 ‘마왕’으로 인정받으려면 한 명이 더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으리라 믿으마. 물론, 아무도 찬성하지 않겠지만.”

아예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었다.

온갖 굴욕적인 언행을 맛본 음마령 요호의 볼이 붉게 울었다.

그런 요호를 향해 말했다.

“사이가 안 좋아 보이는군.”

갑자기 내가 끼어든 탓인지 요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차라리 조용히 있는 게 돕는거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요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예.”

“그래? 그런데 칠마종, 칠마령 모두 각기 다른 종으로 이루어진 건가?”

“그··· 천산에 있는 ‘열네 종’만이 정상적인 마족으로 인정받습니다.”

칠마종, 칠마령. 도합 열넷은 각각의 종을 대표하는 대표자들이었다.

하기야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차별하는 게 인간들이다. 마족도 다르진 않아보였다.

“인정받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

물론 가만히 있어달라고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다.

이에 요호도 반쯤 포기했는지 제대로 답해주었다.

“종 전체가 ‘장벽’으로 몰려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거나, 노예처럼 취급됩니다.”

말로가 썩 좋지는 않았다.

여기서 쫓겨나면 종 자체가 몰락한다는 의미다.

마계로 넘어올 때 보았던 무수히 많은 마족들. 그들 대부분이 인정받지 못한 마족의 종이었다. 그래서 마계의 끝으로 내몰린 것이다.

“‘마왕’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건 무슨 말이냐?”

“그게··· 칠마종, 혹은 칠마령 중 둘 이상이 ‘진명’을 보이며 인정해야만 제대로 된 마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거로군.”

천산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마왕’임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칠대죄악의 힘을 이었다고 천산의 마왕이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다른 죄악의 마왕들은커녕 그 밑의 마종에게도 무시를 받는 걸 보면.

뭐, 상관은 없었다.

“허리에 찬 게 장식은 아닌 듯한데, 한 판 붙지.”

인정을 받는 방법이야 뻔했으니까.

더 강하면 되는 거다.

싸워서 이기면 그만인 것이다.

막 자리를 뜨려는 혈마종을 향해 도발하자 혈마종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나한테 하는 말이냐?”

“그럼 음마령에게 하는 말일까?”

“······ 하.”

가소롭다는 듯 웃고 말았다.

죄악의 주인이 아니기에 마왕이 아닐뿐, 흡혈귀들의 왕이 바로 혈마종이었다. 서큐버스들과 달리 오직 실력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게 그였다.

스릉.

혈마종이 검을 뽑았다.

마검. 피를 머금은 그 검은 피보다 더욱 붉은 새빨간 색의 오러를 내며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죄악의 주인이라도 그래봐야 인간이다. 고작해야 ‘폭식’의 주인인 인간. 아무리 강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입산의 의식을 통과했다고는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큐버스 따위로는 제대로 걸러낼 수 없었겠지.’

서큐버스가 행하는 의식이야 안 봐도 뻔했으니.

제대로 된 의식을 치렀다면 저 인간은 천산을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검이라. 그럼 나도 검으로 싸워주지.”

“제정신이 아니군.”

어이가 없어하는 혈마종을 무시했다.

곧이어 내 뒤로 검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혈마종의 눈이 좁혀졌다.

“허(虛)의 공간······?”

아공간을 알아본다. 이름은 다르지만.

아공간을 마족들은 허의 공간이라고 부르는 듯싶었다.

“인간이 어떻게 허의 공간을 다루는 거지?”

아공간 역시 드워프의 기술이다.

말인 즉, 마족과 드워프들 간에 왕례가 있었다는 의미다.

나는 아공간에서 칼리번을 꺼내들었다.

이후 혈마종에게 겨누며 말했다.

“내가 이기면 ‘진명’을 받아가겠다.”

“······ 내가 이기면 네 목숨은 없다.”

죽이겠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음마령 요호는 복잡한 눈빛을 지어보였다.

‘천산의 마왕이 아닐뿐, 혈마종은 어지간한 마계의 마왕들과도 쌍벽을 이루는 강자인데.’

천산의 칠마왕은 죄악의 힘이 없이는 될 수없다.

그래서 칠마왕이 한 시대에 존재한 경우는 없었다.

현재도 세 자리가 공석이었고, 그중 한 명인 폭식이 오천년 만에 천산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런 규율이 없었다면 혈마종이 칠마왕 중 한 자리를 차지했을 수도 있었다.

물론 현재 천산에 있는 네 마왕은 일반적인 마왕들과도 ‘궤’를 달리하는 최강의 괴물들이 맞다.

다만, 그렇다고 혈마종을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다.

반면에······ 폭식의 주인은 인간이다.

심지어 혈마종을 검으로 이길 수 있는 자는 이곳 천산에 없었다.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말려야 하지만, 인간이 죽으면 ‘제약’도 사라지지 않겠는가.

굴욕을 끝낼 절호의 기회였다.

“······ 폭식이시여. 그만 두는 게 좋습니다.”

“오호라. 나를 걱정하는 게냐?”

하지만, 혈마종이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는 게 더 싫었다.

폭식을 죽이는 순간 혈마종은 자신을 끌어내리고자 할 것이다. 폭식을 죽인 혈마종의 의견에 모두가 동조할 것이고 그러면 서큐버스들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차라리 폭식에게 굴욕을 당하는 게 낫다.

적어도 마령의 자리에서 파면될 일은 없을테니까.

요호가 필사적으로 폭식을 매혹시키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마령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걱정하지 말거라. 나도 검술 실력이라면 뒤떨어지지 않으니.”

“······.”

인간의 기준에서 그렇겠지요.

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고작해야 백년도 못 사는 게 인간이다.

반면 혈마종은 수천년간 검만 연구해온 검의 달인이었다.

검에 대한 이해도가, 차원이 다르다.

단순히 검만이 아니다. 모든 무술을 섭렵하고 발전시켜온 게 바로 그였다.

하지만 폭식의 저 자신감은 말리지 못할 것 같았다.

음마령 요호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죽으면······ 나와 서큐버스들이 살 길을 찾아봐야겠구나.’

혈마종에게 죽으면 폭식에게 굴복한 음마령은 파면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탐욕의 마왕에게 자신을 바치면 파면은 면할 것이다.

그는 항상 그녀를 탐내왔으니까.

‘눈 깜빡할 사이에 끝내주마.’

혈마종이 자세를 잡았다.

세 번의 호흡, 세 발자국 안에 끝낸다.

그가 수천년의 시간을 들여 마침내 완성한 ‘파황천혈검’의 기본 골자였다. 그 안에 죽이지 못할 적은, 없다.

‘합신(合身)하고 합검(合劍)하면 합신(合神)하리라.’

몸을 합하고, 검을 합하면, 신이 된다.

혈마종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날개처럼 돋아났다.

신이 되면 세 발자국 안에 죽이지 못할 적이 없으니, 지금의 혈마종은 감정 없는 무기 그 자체였다.

이윽고 혈마종이 공간을 격해 뛰어넘은 그 순간이었다.

쿠르릉!

“······?!”

화르르륵!

피가 바닥으로 쏟아진다.

순환하던 마나가, 찰나 동결된다.

주변의 모든 기운들이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얼어붙었다.

혈마종의 두 눈이 당혹감으로 가득했다.

단 한번이었다.

단 한 번의 발구름으로 이런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건 공간을 격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검을 들이댄 것이었다.

폭식의 주인이 내민 검은 어느덧 혈마종의 목에 닿아있었다.

“내가 이긴 것 같군.”

창졸지간에 일어난 일.

아무리 봐도 이건 사기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작 한 번의 발구름으로 ‘파황천혈검’의 기운이 깨졌다.

그게 가능한 기술은 하나뿐이었다.

“천··· 마··· 군림보······!”

혈마종은 경악했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천마군림보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사라진 기술.

2대 대죄종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분실된 천마신공!

“이, 이 기술을 네가 어떻게······ ?!”

그 천마신공의 기술 중 하나인 천마군림보를 어떻게 인간이 흉내낼 수 있단 말인가?

< 마왕(5)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