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한다.”
“······ 왜?”
헬라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거절한다니.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내 거취를 결정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다.”
“······ 이곳은 네가 있어야할 곳이 아니라니까?”
자신이 있어야할 곳을 결정하는 건 본인 몫이 맞지만 이곳은 마계다. 그것도 마계의 중심지인 천산이다.
라인하르트는 인간이었다.
대죄종과도 같은 힘을 지녔으나 그가 있어야할 곳은 마계가 아닌 인간들의 품이다.
그와 함께 있었던 시간은 길지 않지만 그녀가 직접 보고 들은 게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헬라는 확신할 수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대죄종이 아니야.’
죄악의 힘을 이었을지언정 마왕도, 대죄종도 아니다.
그는 인간이다.
누구보다도 인간이고 싶어했다.
그러나 대죄종이 되려면 인간임을 포기해야만 한다.
인간인 채로는 마왕이, 대죄종이 될 수 없었다.
인간과 마왕은 서로 상극인 탓이다.
결코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는 그 자격을, 그녀 자신의 욕심 때문에 포기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자신의 반려로, 반쪽으로 여기긴 했지만······ 마계에 도착하고 난 다음에야 알았다.
서로가 있어야할 장소가 다르다는 걸.
그녀는 마계에, 그리고 라인하르트는 인간계에 있어야하는 존재이니.
“죄악의 권능을 두 개나 이었으니 나 역시 마왕이다. 당연히 이 의식에 참가할 자격이 있다.”
“······ 대죄종이 되겠다는 거야?”
“당연하지 않느냐.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좋은 기회라고?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대죄종이 되겠다는 건 마계의 주인이 되겠다는 뜻이야. 이곳에 머물겠다는 뜻이라고! 그리고 아무리 네가 강해도 이곳의 마왕들은 격이 달라.”
라인하르트는 강하다.
언제나 예상 외의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곳의 마왕에 비하면 부족하다.
교만의 델바란. 그를 보자마자 헬라는 경악하고 말았다.
말피엘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수준의 강자.
번개의 장막이 사라지자 나타난 고룡들만큼이나 강할 것 같았다.
교만의 델바란 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강자가 이 천산에는 몇이나 있다.
그 밑에 마족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라인하르트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너······ 죽을거야.”
“그건 죽을 때 가서 생각하도록 하마.”
“왜 그렇게 무모해? 죽는 게 두렵지 않아?”
라인하르트는 생명의 은인이다.
실버팽의 의지를 이었으며, 이미 한 번 위험을 무릅쓰고 마계로 넘어왔다.
만약 여기서 라인하르트가 죽는다면 헬라는 죽어서도 그를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았다.
“이미 한 번 죽어봤다.”
“······ 그게 무슨 소리야?”
사실대로 말했다.
그래봤자 믿을 리 없다는 걸 알지만.
헬라를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이 선택은 온전히 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다음에야 후회가 들더군. 조금 더 무모해지고, 조금 더 겁 없이 굴었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지.”
내 이전의 삶은 후회로 점칠됐다.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었다.
정해진 길이라는 생각에 수많은 잘못된 선택을 자행했으며.
그로 인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대신해 죽어나갔다.
만약 내가 조금 더 무모하고 겁이 없었다면 미래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안주한 순간 지옥의 입구에 발을 디딘 것과 같았다.
‘멈춰있는 것이야말로 내게는 지옥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
도전하지 않는 삶은 그 자체로 지옥이다.
헬라의 말마따나 위험한 도박이다.
하지만 내가 진정한 대죄종으로 거듭날 수만 있다면······ 많은 게 달라질 것이다.
내가 서 있을 위치도, 저 용혈회나 마지막 위업의 구도 자체를 바꿔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회귀할 당시 했던 마음가짐을 입에 담았다.
“그래서 이번 생에는 내 마음대로 살기로 했다.”
내 마음대로 살 것이다.
하지 못했던 것, 할 수 없었던 것, 그런 제약이나 제한 따위를 두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거나, 패배자의 마음가짐으로 살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이 역시 내 마음대로 정한 일이니 너야말로 개의치 말거라.”
“······ 뭐라는 거야.”
헬라는 정말로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헛소리를 늘어놓는 광인과 다를 게 무엇인가.
불꽃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이다.
하지만, 그렇지만······.
‘내 마음대로 살기로 했다.’
마음가는 대로 살겠다는데 더 이상 무슨 구실로 막겠나.
마왕들과 경쟁해, 자신을 먹겠다는 말이다.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이곳조차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면 차라리 라인하르트에게 먹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헬라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
“‘폭식’의 인자를 지닌 자가 신녀와 함께 나타났다······.”
“예언대로 다음 대죄종이 탄생할 시기가 되었는가?”
너른 공동.
네 명의 마족들이 한데 모여있었다.
죄악의 인자를 마왕들.
이곳 천산의 주인이며 마계를 좌지우지하는 거인들이었다.
“교만이여. 그대가 보기에 ‘폭식’은 어떠했나?”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단 마왕, 탐욕이 물었다.
혀와 코, 턱을 뚫고 황금빛의 찬란한 보물들을 수놓은 그는 누가 보더라도 탐욕적인 존재였다.
탐욕의 물음에 교만 델바란이 답했다.
“그다지 강해 보이진 않더군.”
“하긴, ‘폭식’의 약함이야 예로부터 그랬으니.”
칠대 죄악이란 이름으로 묶여있지만 죄악간에도 순위가 있었다.
그중 폭식은 가장 최하위의, 최약체의 죄악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주인이 바뀌어왔다.
반면 이곳에 있는 네 명의 마왕은 최소 수천 년 이상 천산의 마왕으로 군림하며 절대적인 힘을 지닌 죄악으로써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교만, 탐욕, 질투, 그리고 나태.
그들은 권능을 취하고 그 권능마저 넘어선 자들이다.
그러나 분노와 색욕, 폭식은 그들에게 있어선 나약한 존재로 여겨져 왔다.
“혈종 아수라의 주인이라면서? 우리도 못 한 걸 해냈는데 사실 강한 거 아니야~?”
바닥에 몸을 눕힌 채 잠을 자듯 눈을 감고 있던 나태가 말했다.
천산의 마왕들도 모두 실패한 게 혈종 아수라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듣도보도 못한 인간이 해냈으니 약자로 생각할 순 없다.
질투, 선홍빛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 나태의 말을 받았다.
“맞아. 마족이 아닌 ‘이방인’이잖아? 이방인은 죄악의 힘을 제대로 못 다뤄서 장벽은 못 넘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넘었잖아?”
일곱 죄악의 힘은 그 주인이 죽으면 다른 생명체에게서 깨어난다.
중간계와 마계를 가리지 않으며 그렇게 죄악의 힘을 지니게 된 생명체는 세계를 혼란케 만든다.
하지만 마족이 아닌 타종족, 이방인들이 죄악의 힘을 지니면 본래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죄악의 힘을 지닌 ‘인간’이, 장벽을 넘어 아수라를 끌고 천산까지 왔다.
심지어 신녀까지 대동한 채로.
이곳에 모인 마왕들은 모두 마족이었다. 죄악의 힘이 돌고 돌아 마족에게 전이되었을 때, 그들은 각성하며 천산에 올라 마왕임을 선포했다.
“천산에 오른 죄악 중에 인간은 최초로군.”
“확실히··· 이방인이 없던 건 아니지만 인간은 처음이지.”
탐욕과 나태가 동감했다.
죄악의 권능을 지닌 채 장벽을 넘어온 이방인이 없었던 건 아니다.
엘프나 오크, 심지어 미노타우르스까지 있었지만 인간은 처음이었다.
“인간이기에, 입산 의식에서 걸러질 거다.”
허나 델바란은 비웃었다.
혈종 아수라의 주인, 그리고 분노를 먹기까지 했다고는 하나······ 결국 인간이었다.
“입산 의식? 그러고 보니 누가 절차를 진행하고 있지?”
“음마령이다.”
“아아, 음마령이라면 확실히. 인간 수컷이라면 그녀의 매혹을 견딜 수 없겠군.”
델바란의 대답을 듣곤 다시 한 번 탐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마령. 그녀의 매혹을 견뎌낼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게다가 수컷이라면 그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노예가 되거나 정을 빼앗겨 죽으리라.
“그렇다면 우리 넷 중의 한 명이 ‘대죄종’이 되는 건가?”
역시나 가장 중요한 사안은 신녀였다.
천산의 신녀는 만 년 주기로 한 번씩 나타나게 되어있다.
칠죄교의 시조인 ‘원죄의 마신’을 시작으로 여태껏 신녀는 세 번 등장했다.
세 명의 대죄종······ 마신(魔神)은 이곳, 천산의 지배자다.
그리고 천산의 지배자는 마계의 주인과도 같았다.
교만의 델바란이 말했다.
“규칙은 모두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칠죄교의 교리에 적혀있는 규칙에 따라 최후의 마왕이 선발된다.
칠죄교의 교리를 따르는 건 마왕이라면 당연한 의무사항이었기에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규칙은 아래와 같았다.
1. 신녀가 천산의 정기를 받는 77일간 최후의 마왕을 선발한다. 기본요건을 충족한 마왕만이 최후의 마왕이 될 자격이 있다.
2. 기본요건 하나. 칠대 죄악의 권능을 이은 마왕일 것.
3. 기본요건 둘. 최소 둘 이상 마종과 마령의 이름을 계승할 것.
3. 기본요건 셋. 하나 이상의 혈종을 지배하고 있을 것.
세 가지 요건을 만족해야만 최후의 마왕이 될 후보로 나설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 모인 네 마왕은 당연히 그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두 번째 요건인 ‘둘 이상의 마종, 혹은 마령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에 대해서도 각자 파벌이 있으니 어렵지 않은 주문이다.
칠마종과 칠마령은 마족에게서 뻗어나온 열 네 종을 뜻하는 것이다.
그중 두 명.
단순히 수치만 보면 칠대 죄악 모두가 참가할 수 있지만, 저중 둘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참가할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한다.
만에 하나 폭식의 주인이 입산 의식을 통과한다고 하더라도, 인간 따위가 마종과 마령의 지지를 받을 수나 있겠는가.
천산의 마왕은 될 수 있을지언정 대죄종은 되지 못할 터.
애당초 논외의 대상이다.
‘물론 입산도 못하겠지만······.’
교만의 델바란이 작게 웃었다.
음마령 선에서 폭식은 정리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폭식은 돌고, 돌아 세상을 떠도리라.
그 순간이었다.
“······ 방금 전 ‘폭식’께서 입산의 의식을 통과했습니다.”
문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
이곳에 모인 모든 마왕들의 추측을 단번에 깨버리는 내용이었다.
마왕들이 침음을 흘렸다.
“으음.”
“음마령의 실력도 예전만 못한 모양이군.”
폭식의 주인이 천산에 입산했다.
음마령의 유혹을 이겨냈다는 뜻이다.
“봐봐~ 만만한 놈은 아닌 것 같다니까?”
나태의 빈정대는 소리에 교만의 델바란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닥치고 잠이나 쳐 자라, 나태.”
*
마음을 정했다.
이곳, 천산의 주인이 되겠다고.
자격이 있는데도 도전하지 않는 건 무능한 것이다.
나는 마왕으로서의 자격도, 대죄종이 될 자격조차도 모두 지니고 있었다.
또한, 마음에 들었다.
천산의 마왕들.
칠대죄악이라 불리며 마계에 군림하는 강자들이지만 생각보다 놈들은 ‘규칙’을 중요시 여겼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아비규환의 지옥을 떠올렸으나 현실은 상당히 달랐다.
그 의도가 어떻든 의식을 행해 통과하자, ‘라이벌’이 될 수도 있는 나를 별 다른 제지 없이 천산에 풀어둔 것이다.
자격을 지니고 의식을 통과한 자를 저지하지 않는 것.
규칙이 있다.
나름대로의 신념도 엿보였다.
‘군림할만 하다.’
이성이 없고 본능만을 중시하는 놈들이었다면 군림할 가치도 못느꼈을 것이다.
꼭대기에 서봤자 제대로 통제도 되지 않을 놈들이라면 오히려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북방의 신성군주가 된 것도 파간을 존중한 결과였다.
적어도 스스로의 몸을 내던져 북방을 지켜낸 파간이라면 그 위에 군림할 가치로는 충분했으니까.
규칙도 있고 나름대로의 신념도 있는 놈들이라면 적어도 내가 적법하게 대죄종이 되었을 때 뒤통수를 때리진 않을 것이다.
도리어 그들을 따를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면 더할나위가 없다.
“이 나무는 뭐지?”
“천목(天木)입니다, 폭식이시여.”
내 물음에 음마령이 답했다.
제로의 나노머신을 흡입한 음마령은, 서큐버스의 그 특이한 능력 때문에 도리어 약점을 잡힌 신세로 전락했다.
이후 내게 천산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엔 거대하기 짝이 없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천산의 중심부.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 나무는 거룩하기 그지 없었으니.
[지하에서 특수한 신호를 포착했습니다.]
[연구소 ‘제로’······, 제가 탄생한 연구소의 신호입니다. 마스터.]
이맛살이 절로 구겨졌다.
제로가 탄생한 곳?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박문식 박사의 연구소가 왜 천산에 있는 걸까?
그리고 엄청난 시간이 지났을 텐데 어떻게 아직도 신호가 살아있단 말인가?
< 마왕(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