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산의 다섯 관문을 통과하는 자는 모두 영수로 몸과 영혼을 씻어내야만 한다.
모든 걸 비우고 털어낸 뒤에야 온전히 천산에 입산(入山)할 수 있다.
······ 라는 말은 사실 구실에 불과하다.
‘환술에 걸려들었구나.’
서큐버스 요호가 미소를 머금었다.
몽롱하게 풀린 눈.
폭식의 주인, 새롭게 천산에 입산하는 마왕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요호와 서큐버스들의 환각에 그는 매료되고 말았다.
제아무리 마왕이라도 수컷이다.
수컷이라면 서큐버스의 매혹을 버틸 수 없다.
‘죽이진 않아. 우리의 노예로 만들 뿐이지.’
천산은 마계의 중심이다.
칠죄교를 따르는 마족들은 그 종류와 형태가 다양했고, 서큐버스 역시 여러 축 중 하나를 담당하고 있었다.
또한 칠죄교는 철저한 약육강식이다.
아무것도 모를 채 천산에 오르면 제아무리 마왕의 인자를 지녔다고 할지라도 잡아먹히는 건 당연한 일.
그리고 요호는 폭식의 주인을 매료해 노예로 만들 생각이었다.
‘멍청한 녀석. 내가 서큐버스인지도 몰라보다니.’
마족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게 분명했다.
하기야 폭식의 주인은 중간계에서 넘어온 인간이었다. 인간이 마족의 종류와 생리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허나 누굴 탓하랴.
그 무지함으로 인해 정신을 지배당하고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다.
자신의 멍청함을 탓해야겠으나, 이 작업이 끝나면 그마저도 할 수 없으리라.
‘그래도 혈종 아수라의 주인이라면 범상치 않은 자인 건 확실해.’
혈종 아수라!
마왕들이 다루는 혈종은 제법 많이 봤지만 그 정도로 큰 혈종은 거의 없다.
혈종은 크면 클수록 강력하니 그만한 혈종을 다룬다면 그 주인의 격도 범상치는 않을 것이다.
폭식의 주인을 노예로 다루면 천산에서 서큐버스의 지위도 수직으로 상승할 터.
“조금씩 마나를 머금어라. 무리하면 환술이 깨지니 부드러운 구름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할 것이다.”
“예, 음마령(陰魔令) 님.”
서큐버스들이 온천수를 머금고 몸에 흩뿌리자, 곧 그의 전신에서 하얀 수증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천산에서 흐르는 마나는 특별하다.
마계의 중심지. 영험한 천산의 마나를 머금은 온천수는 신체에 닿으면 마나를 가파르게 순환시키는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가만히 있으면 선순환하면 신체의 마나를 단련시켜주지만 이때 ‘생명의 마나’라고도 불리는 ‘원기(元氣)’가 함께 튀어나오는 부작용이 있었다.
이 원기를 서큐버스가 섭취하면 상대를 노예처럼 부릴 수 있게 된다.
원기를 흡정당한 존재는 본래 죽어야되나, 서큐버스 특유의 능력으로 인해 원기를 저장한 채 상대를 부리는 게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아아.”
“하아아아아아-.”
서큐버스들의 볼에 홍조가 깃든다.
그의 몸을 핥고 훑으며 원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폭식의 주인이 아니다. 서큐버스의 노예일 뿐이다.
허나 이상한 일이다.
수많은 마족과 강력한 자들의 원기를 흡정해본 서큐버스들이다.
이만큼이나 황홀하다는 듯 격정하는 경우는 없었다.
‘내, 내 몸이······ 왜 이러지?’
그리고 그것은 음마령인 요호도 마찬가지였다.
서큐버스 퀸인 그녀가 고작 인간의 원기에 취할 리 만무하건만.
“아······!”
황홀함은 곧이어 고통으로 뒤바뀌었다.
“아악!”
“끄으으으으!”
그의 원기를 흡입한 모든 서큐버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요호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뭐?’
그제야 요호는 그가 환술에 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몽롱하던 눈이 어느덧 정상으로 되돌아와있었기 때문이다.
뿐만인가.
“재미있군.”
두 눈은 냉기가 느껴질만큼 차가웠다.
“어, 어떻게? 매료된 게 아니었나?”
요호는 당황했다.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료가 된 걸 확인했다. 확신했다.
이미 걸려든 매혹을 자의로 풀어낼 수는 없다.
“된 척 해봤다. 무슨 수작을 부릴지 궁금해서.”
“아무리 그래도······ 원기를 빨렸을 텐데······!”
백보 양보해서 그게 가능하다 할지라도.
상당한 양의 원기를 빼앗겼으니 제대로 서있는 것조차 불가능해야 정상이건만!
모든 생명체는 원기를 지니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지닌 그 기운, 그 마나는 나이가 먹을수록 줄어들기 마련이다.
하물며 인간이라면 그 양은 조악하기 그지없다.
“고작 그 정도로 말이냐?”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기라고 부르는 나노머신. 아마도 원래부터 내가 체내에 지니고 있었던 것들을 말하는 것일 테다.
오직 내게 맞춰진 순수한 나노머신 말이다.
하지만 제로에 의해 내 몸에 있는 모든 나노머신이 그와 같이 변했다.
지금 흡수한 것에 100배를 가져가도 별 타격은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을 좋다고 빨아갔으니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타인의 나노머신을 온전하게 흡수하고 저장하는 능력.’
아마도 저 음마령을 비롯한 서큐버스들의 능력일 터였다.
상대의 가장 중요한 나노머신을 흡수해 저장하고 다루는 힘.
에픽이나 용에게나 있을 법한 능력이지만 도리어 자충수가 됐다.
“아아악!”
“아파!”
제 스스로 제로의 제어권에 들어갔으니.
무덤을 파도 거하게 파버린 셈이었다.
“이게······ 무슨······?”
요호의 두 눈이 커졌다. 그녀 역시 전신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이가 악물렸다.
원기를 빼앗겨도 멀쩡하고, 심지어 원기를 빼앗아간 그녀들이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살고 싶으면 내가 묻는 말에 답해야할 것이다.”
요호의 두 눈이 떨렸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일.
인간이라고 얕보았다가 반대로 족쇄가 채워졌다.
그의 두 눈을 본 순간, 요호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잘못 걸렸구나······!’
잘못 걸려도 제대로 잘못 걸렸다.
요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다른 마령들에게 양보했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아무리 그녀라도 견디기 힘들 수준으로 고통이 몰려들었다.
“다, 답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좋다.”
툭.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통이 사라졌다.
동시다발적으로. 마치 처음부터 아프지 않았던 듯이.
지금껏 꿈이라도 꾼 기분이다.
요호와 서큐버스들은 두려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보아하니 이게 진짜 천산의 시험인 것 같다만. 맞느냐?”
“마, 맞습니다.”
과연.
천산에 오르기 위한 진짜 관문이 지금 이것이라는 의미다.
앞의 다섯 관문은 보여주기 용도에 불과했다.
“자세히 설명해봐라.”
“천산에 오르는 자들을 대상으로 ‘칠마령’ 중 하나가 시험을 치릅니다. 시험에 통과한 자만이 천산의 궁에 오를 수 있습니다.”
“칠마령이 무엇이냐?”
“칠죄교에 있는 일곱 마령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칠죄교의 교주이자 신이신 대죄종과 칠마왕, 그리고 그 밑에 칠마종, 칠마령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칠마령 중 하나인 음마령입니다.”
대충 칠죄교의 족보가 그려졌다.
대죄종과 칠죄악을 지닌 칠마왕, 칠마종, 칠마령.
‘7이란 숫자를 어지간히도 좋아하는군.’
하여간 상당히 조직적이다.
이곳에 올라온 직후 시작되었으니 아렐과 헬라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험을 치르고 있을 것이었다.
델바란은 욕망을 감추지 않았으나 적대적이진 않았다.
나를 폭식의 주인으로, 그리고 헬라를 신녀로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무슨 수작을 부릴지 지켜보고자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천산의 의식은 어떤 방식으로 치러지지?”
“천산의 의식이요? 서, 설마 ‘신녀’께서 찾아왔다는 게 진짜였습니까?”
“델바란이 말 안 해줬나?”
“아······! 천죄시여!”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하늘을 향해 양 손을 펼쳤다.
다른 서큐버스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30초가량을 그러고 있다가 격한 표정으로 내게 다시 말했다.
“··· 신녀께선 천굴에서 ‘77일’간 신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후 천산의 마왕들 중 한 명만이 신녀를 신부로 받아들여 대죄종이 될 수 있습니다.”
헬라가 77일간 신을 받고, 이후 칠죄악을 이은 마왕 중 한 명만이 그녀를 신부로 받아들여 대죄종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의구심이 생겼다.
“원죄의 선택을 받아야 대죄종이 되는 거 아니었나?”
“원죄······ 이곳 천산에 존재했던 최초의 대죄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대죄종이 여럿인가?”
“원죄라 불렸던 대죄종께서 이곳 칠죄교의 시조이십니다.”
“그러니까······ 대죄종이란 칭호는 천산과 칠죄교의 주인을 뜻하는 거로군.”
“맞습니다.”
칠죄교의 시조.
최초의 대죄종.
그게 원죄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원죄는 지금 내 안에 있었다.
죽은 뒤 마음에 드는 몸을 찾지 못해 억겁을 떠돈 망령.
“왜 신녀와 결혼해야 대죄종이 될 수 있는 거냐?”
“신녀는 ‘그릇’입니다. 이곳 천산은 ‘최초의 생명’이 잉태된 장소. 최초의 죄악 역시 이곳에서 탄생했으니, 그 기운을 담아낼 수 있는 건 신녀밖에 없습니다.”
“산의 기운을 받아서 부부가 되면 그 힘이 이전이라도 된다는 건가?”
“아닙니다. 먹어야지요.”
“먹는다니?”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요호가 말했다.
“마왕이 신녀와 연을 맺고 신녀를 먹으면 대죄종이 될 수 있습니다.”
*
시험을 끝낸 후 궁에 오르자 헬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헬라는 신녀였기에 따로 시험을 받지 않은 듯싶었다.
‘아렐과 빌헬름은 아직인가보군.’
내가 들어오자, 헬라의 두 눈에 반가움이 스쳤다.
“······ 왜 이렇게 늦었어? 한참을 기다렸네.”
입꼬리가 웃고 있다.
설마 내가 떠났다고 생각한건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계속 여기서 지낼 생각인가?”
“실버팽은 여기가 내 진짜 집이라고 했어.”
집. 집이라.
요호에게 사실을 듣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곳은 그녀의 집 같은 게 아니다.
헬라는 다짐한 듯한 눈빛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아직 어색하지만, 여기가 내가 있어야할 곳이야.”
평생을 함께했던 실버팽이 자신을 지키려다가 죽었다.
그가 이곳을 집이라고 했으니 익숙해져볼 생각이다.
그런 헬라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나는 재차 물을 수밖에 없었다.
“‘천산의 의식’을 받겠다고?”
“당연하지. 대죄종이 되려면 그래야되는 거 아니야?”
대죄종이 되겠다.
헬라는 이곳 칠죄교의 주인이 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듯싶었다.
“의식이 끝나면 너는 이곳의 마왕들 중 하나에게 먹힐 거다.”
순간 헬라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대죄종이 되는 게 아니라, 너를 먹은 마왕이 대죄종이 된다는군.”
“······.”
헬라가 고심하는 얼굴로 입을 꾹 닫았다.
알아들었다면 이곳이 자신이 그리던 집이 아니라는 것쯤은 깨달았을 것이다.
이곳은 집이 아니라 사육장이다.
먹히기 위해서 길러지는 장소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떠나는 게 맞다.
잠시 후 숨을 크게 들이마쉰 헬라가 말했다.
“··· 실버팽과의 약속을 지켜줘서 고마워. 이제 네가 있어야할 곳으로 돌아가.”
“너를 두고 가란 말이냐?”
“응. 지금부턴 내 싸움이야.”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나 싶었으나,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헬라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너도 이곳에서 언제까지 머물 수는 없잖아. 지켜야할 게 많으니까.”
여기까지 데려다 준 것만으로도 헬라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용들의 눈을 피해 이곳까지 데려다주는 것 자체가 엄청난 도박이었을 텐데.
아무리 그가 죄악의 힘을, 대죄종과도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지만, 그가 있을 곳은 마계가 아니었다.
헬라는 라인하르트와 함께 지내며 계속해서 그를 지켜보았다.
제국.
가족.
그 모든 게 마계가 아닌 중간계에 있다.
인간들의 세상에 있었다.
그들의 곁에서 라인하르트는 행복해질 수 있다.
웃을 수 있다.
가족을 위해, 지켜야할 것들을 위해 라인하르트는 최선을 다한다.
어떤 모욕도 감내하며 보란듯이 이겨낸다.
하지만 이곳에 그가 지켜야할 것은 없었다.
모두 포기한 채 마계에 있어달라는 건 욕심이다. 이기적인 짓이다.
게다가 라인하르트가 홀로 완성되었듯, 그녀라고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부터는 오롯이 그녀의 싸움이다.
헬라는 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라인하르트.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절대 잊지 않을게. 그러니까···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 마왕(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