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119화 (119/146)

장막을 넘어온 거구의 거인들.

용혈회의 용들은 그들을 장난감 다루듯 찢어발겼다.

이후 번개의 장막이 다시 가동되자 남아있던 수백의 거인들이 순식간에 불에 타 사라졌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발록은 진한 호승심을 느꼈다.

하지만 참았다.

라인하르트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벽을 넘거든 한동안 그곳에서 ‘얌전히’ 기다려라.

용들이 거인들에게 신경이 팔려있는 사이, 라인하르트와 일행은 마계로 넘어갔다.

이곳에 남은 건 발록뿐이다.

발록은 이곳에 남아 라인하르트가 다시 넘어오길 기다려야만 했다.

얌전하게.

“북부의 용, 너는 처음 보았겠군.”

성으로 돌아온 한니발이 말을 걸었다.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신성교의 교황’ 노릇을 하고 있다던가.

그가 거대한 동체를 한차례 털어냈다.

그러자 피부에 묻은 살점과 핏물들이 주변으로 튀었다.

“‘악귀’들이다. 마계의 전쟁병기지. 놈들에겐 용언도 통하지 않으니 직접 목을 잘라야 멈춘다.”

친절한 설명에 발록이 말했다.

“용혈회는 저런 악귀들이 넘어오지 않도록 지키고 있는 건가?”

“저런 것은 애들 장난 같은 것이다. 5m 이하의 악귀는 고기 방패나 다름없으니. 정말 귀찮은 건 10m 이상의 ‘혈종’이라 불리는 괴물들이다.”

악귀, 그리고 혈종.

생소한 단어들에 발록은 고개를 갸웃했다.

“혈종?”

“악귀보다 배이상 크고, 열 배 이상 강하지. 목을 잘라도 순식간에 재생하고, 용언은커녕 어떤 마법도 통하질 않는다.”

“그럼 어떻게 죽이지?”

“재생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파괴하면 된다.”

이걸 방법이라고 말해주는 걸까.

장벽을 넘어온 수백의 악귀들만 하더라도 상당히 강력했다. 헌데 그보다 최소 열 배는 더 강한 게 혈종이라니.

그런 발록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에 한니발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어서 말했다.

“뭐, 어지간하면 볼 일은 없겠지만··· 만약 만나게 되면 두 눈을 파내라. 악귀와 혈종은 앞이 보이지 않으면 얌전해지니까. 그 뒤에 혈종을 조종하는 마왕을 죽이면 된다.”

“그렇군.”

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니발은 용들 중에서도 제법 말이 많은 축에 속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친절하다는 의미다.

왜 그런 건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일종의 ‘동질감’을 가지고 대하는 것 같았다.

같이 인간인 척 ‘유희’를 하고 있는 동지를 대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다른 용들은 유희를 어린 용의 장난 쯤으로 여기니, 이곳 용혈회에서 제대로 유희를 하고 있는 건 그간 한니발밖에 없었다.

그런데 북부의 용이 제국의 황태자로 유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나름의 친밀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제국의 황태자로 유희를 하고 있는 거냐?”

역시나.

왠지 물어볼 것 같았다.

한니발의 물음에 발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래라면 라인하르트가 직접 제어해 움직여야하지만 마계로 넘어간 뒤 연결이 일시적으로 끊겼다.

결국 발록 스스로 대답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뻔히 쳐다보는 한니발의 눈빛.

하는 수 없이 발록은 입을 열었다.

“그럼 너는 왜 신성교의 교황을 선택한 거지?”

“그야······ 재밌으니까.”

“재밌다?”

“인간들은 나약한 종족이다. 무언가를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나는 그들의 구세주가, 신이 됨으로써 그들을 구원하는 역할이다.”

한니발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미리 신이 되는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용들은 ‘유희’를 쓸데없는 것, 창피한 것으로 규정짓고 자제하지만 단순히 용의 삶만을 탐구하면 진정한 신이 될 수 없다. 신이란 만물을 다루고 지배해야만 하는 존재이니.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래서 제국의 황태자를 선택한 것 아닌가?”

“······.”

유희에 진심인 용이었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된 발록도 이 한니발이라는 녀석이 용들 사이에서 꽤 별종 취급 받는다는 건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별종이, 같은 취미를 나누고 공유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그렇다.”

“오! 너와는 상당히, 아주 말이 잘 통할 것 같군. 처음 볼때부터 그럴 것 같더라니.”

사실 유희가 아니고, 그다지 진심이지도 않다는 걸 알게되면 적잖이 분노하겠지만······ 당장 우호적인 용 하나를 둬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이곳은 발록에게 적지와도 같았다.

사이좋게 지내면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터.

“역시 네가 ‘주인공’을 맡아라. 내가 교황의 직위에서 도와주지. 황제를 죽이고 즉위한 뒤 신성교와 제국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거다. 수백만, 수천만의 인간이 그 과정에서 죽어나갈거다. 후후.”

······ 친하게 지내는 건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한니발은 인간을 개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개미처럼 갖고 놀다가 눌러 죽여도 그저 재밌을 뿐.

고약한 취미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로드시여.”

그때였다.

번개의 장막이 걷힌 이후 사라졌던 드래곤 로드가 다시 나타났다.

“갑자기 어떻게 된 겁니까?”

알렉의 물음에, 로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열 다섯.

로드를 포함한 열 여섯의 용이 한 곳에 모였다.

이후 로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이곳에 모인 용들 중 마계의 ‘협력자’가 있다.”

“협력자······?”

용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하게 변했다.

마계의 협력자라니.

용혈회는 마계의 위협으로부터 중간계를 지키는 수호자들이다.

그런데 변질자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험악해질대로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서, 로드가 재차 입을 열었다.

“‘협력자’를 찾아내기 전까지 회의는 보류한다. 내일부터 한 명씩 ‘심층’을 훑을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그 말을 남기고 로드가 다시 모습을 감췄다.

그녀가 사라지자 용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마계와 내통하는 협력자가 우리 중에 있다고?”

“허, ‘특이점’이 있다는 말보다 더 충격적이군.”

유일하게 못 알아들은 건 발록밖에 없었다.

발록이 한니발에게 물었다.

“‘심층’이 뭐냐?”

“로드께서 직접 접촉해 너의 모든 걸 보겠다는 거다. 내키지는 않지만, 변절자가 있다면 어쩔 수 없지.”

한니발의 말을 듣고 발록의 얼굴이 굳었다.

라인하르트가 남긴 마지막 경고가 떠오른 탓이다.

―절대로 ‘드래곤 로드’와는 접촉하지 마라. 절대로.

*

델바란은 인상을 찌푸렸다.

“··· ‘폭식’이라고?”

“아아. 폭식의 대죄주교다.”

나는 그게 놀라운 일이냐는 듯 자연스럽게 말했다.

원죄의 힘을 흡수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 힘을 전부 내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만에 하나 그 힘을 노리고 대죄교의 마왕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폭식의 권능을 지녔다는 말도 거짓은 아니었다.

어쨌든 가프의 권능을 이은 건 사실이었으므로.

“폭식 따위가 이정도로 진한 죄악의 냄새를······?”

“분노를 먹었기 때문이겠지.”

“두 개의 죄악을 지녔다······ 과연, 그래서 이런 냄새가 나는거로군.”

겨우 납득한 델바란이 혈종 아수라와 나를 번갈아가며 훑었다.

폭식의 권능 자체는 보잘것이 없지만 그 대신 다른 죄악을 먹어치울 수 있었다.

다른 죄악을 먹어치워야 겨우 1인분을 하는 그런 권능이 폭식이었다.

당연히 칠대죄악 중 최하위이며, 그래서 폭식의 주인은 끊임없이 바뀌어왔다.

“폭식이 천산으로 돌아온 건 오천년 만이다. 이번 폭식의 주인은 그래도 꽤 강한 모양이군.”

델바란은 고개를 주억였다.

어쨌든 폭식의 주인이 천산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혈종 아수라를 이끌고서.

죄악의 주인들 중 ‘아주 강력한 극소수’의 존재만이 천산에 닿을 수 있다.

말인 즉, 저 인간도 죄악의 주인이 되기에 충분한 강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무리 강해도 이곳은 천산이었다.

진정한 마왕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증명해야 한다.

“헌데······.”

맡아진 냄새는 진한 죄악의 냄새만이 아니었다.

델바란의 시선이 헬라에게 넘어갔다.

헬라 역시 델바란의 존재감에 바짝 얼어있었다.

마왕 델바란은 그녀가 일찍이 만난 용보다도 훨씬 강했다.

말피엘을 상회하는 최강자.

그 무력의 깊이가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뼛속까지 느껴질 수준이었다.

질질질.

그 순간이었다.

“침이······.”

침이 뚝뚝 떨어진다.

델바란의 입에서.

절제가 안 된다.

헬라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의 전신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델바란은 헬라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너는 대죄종의 신부······ 신녀로군.”

그는 교만을 이은 죄악의 주인이었기에 헬라를 보곤 끌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것이다.

대죄종의 신부. 신녀에게 일곱 죄악이 끌리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으니.

도리어 신부를 옆에 두고 멀쩡한 저 폭식이 이상한 것이었다.

“이건······ 참을 수가 없군. 이런 황홀함이라니. 수만년을 살아오며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분이다.”

동공이 풀린다.

델바란의 두 눈에 탐욕이 깃들었다.

구오오오오.

그에게서 뻗어나오는 검은색의 마나가 주변을 잠식해나갔다.

어마어마한 양의 나노머신이다. 용혈회의 용들과 비견될만큼의, 어쩌면 그보다도 더 많은 것 같은 나노머신이 델바란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흐읍!”

“······!”

아렐과 헬라가 경직됐다. 빌헬름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나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혈회의 용들과도 비견되는 힘.

만에 하나의 사태에서 반격하고자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주루룩.

그 순간, 델바란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주먹을 쥔 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성을 잃지 않고자 혀를 깨물고, 상처가 생길만큼 강하게 주먹을 쥔 탓이었다.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나노머신들도 다시 그에게 되돌아갔다.

이후 겨우 정신을 되찾은 델바란이 말했다.

“······ 천산에 오르는 걸 허락하마.”

*

헬라를 천산에 데려가는 건 실버팽의 부탁이었다.

이후 이름을 이은 마족들에게 최후를 전하는 게 이곳 마계에서 내가 해야할 마지막 일이었다.

‘아무래도 그냥 떠날 수는 없겠군.’

하지만 이곳에 헬라를 두고 떠나면 그 끝이 좋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천산의 의식 속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죄악이, 진정한 대죄종이 된다.’

천산에 오르며 델바란이 한 말이 계속해서 걸린다.

진정한 대죄종이 된다는 말.

하지만 대죄종의 원류인 ‘원죄’는 나한테 있다.

그럼 원죄 없이도 대죄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천산의 의식······.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일곱 죄악의 권능을 지닌 자들끼리 경쟁하는 것일 터다.

이곳 천산에 있는 마왕들 중 한 명만이 의식을 치러 대죄종이 된다는 의미였다.

대죄종이 되어 더 강한 힘을, 권능을 얻는다는 뜻.

“영수로 몸과 혼을 깨끗하게 씻어내야 합니다.”

촤아악.

물이 첨벙대는 소리와 함께 사고가 멈췄다.

수증기 가득한 온천.

델바란을 따라 천산에 오른 이후 정신을 차리자 이곳 온천의 중심부였다.

온천에는 나체의 여인들이 즐비했다.

그것도 하나같이 빼어난 미모의 여인들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저희에게 몸을 맡기세요.”

스르륵.

이윽고 내 옷을 벗긴 여인들이 온천수를 입에 머금고는, 내 몸에 입술을 대고 천천히 온천수를 흘리며, 나긋한 손길로 육체를 씻어내기 시작했다.

< 마왕(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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