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로 뒤덮인 마계.
이곳은 불모지(不毛地)였다.
멀쩡한 생명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장소!
하지만 풀 한뿌리 없는 이런 곳에도 적응하는 존재는 있기 마련.
마(魔)의 종족이라 칭해지는 마족들이 그러한 경우였다.
태초, 신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그들은 이곳 마계로 쫓겨났다.
강력한 땅의 저주. 굶주림으로부터 살아남고자 그들은 동족을 포식했다.
더 강한 피와 살, 뼈를 얻은 마족은 겨우 생존할 수 있었으나 그러한 ‘동족 포식’은 저주와 뒤얽혀 큰 부작용을 낳았다.
‘자신을 잃은 자는 악귀가 된다.’
자신의 이름을 잃은 자.
존재 자체를 잊어버린 자는 끝내 악귀가 된다.
몸을 부풀려 거인의 형상이 된 악귀는 그저 증오만을 담고 있다.
이성은 사라지고, 기억조차 마모된 흉신의 악귀.
이에 대응하고자 마족들은 ‘이름’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설령 자신의 이름이 아닐지라도 ‘포식’한 동족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마족들이 대부분이다.
‘자신을 잃지 않은 자를 우리는 네임드라고 부른다.’
빌헬름처럼.
자신을 잃지 않은 자는 네임드로 불리며 마족들을 이끈다.
다른 동족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마족은 지능을 비롯한 모든 게 퇴화하는 탓이다.
비록 악귀는 되지 않지만 제어하지 않으면 본능대로 살아가는 짐승과 다를 게 없다.
그래서 네임드들은 벽을 뚫고 중간계로 넘어가, 신과 대적할 방법을 찾는다.
하지만 벽을 넘어간 네임드 중에 생환한 이는 없었다.
오랫동안.
억겹의 시간 지나도록.
단 한 명도······ 없었다.
결국 마족들은 제어할 수 없는 악귀를 탑을 쌓아 가두기 시작했다.
마치 무덤과도 같은 탑들이 마계 곳곳에 있는 건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러던 중 마계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 순간부터 악귀를 다룰 수 있는 네임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네임드 중에서 특수한 능력을 개화한 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악귀를 다루는 자들은 하나같이 ‘벽’을 넘었으며 무척이나 강력하였기에 마족들은 그들을 이렇게 불렀다.
‘마왕.’
마족을 이끄는 지도자, 마왕으로.
마왕들은 무질서한 마계에 나름대로의 질서를 세웠다.
희망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불모지의 땅에 희망을 가져왔다.
‘하지만······ 마왕들 역시 악귀가 되고 말았지.’
하지만 희망은 길지 않았다.
강력한 마왕들도 끝내 자신을 잃고 악귀가 됐다.
그들은 일반적인 악귀와 비견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혈종.’
마왕이 악귀가 된 것을 마족들은 혈종이라 불렀다.
혈종은 재해 그 자체였다. 나타나면 항상 마계에 피바람을 불러왔다. 악귀를 다루는 마왕들조차도 혈종을 부릴 수는 없었다.
오직 ‘천산의 마왕’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하지만 천산의 마왕들이라고 모든 악귀와 혈종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조차 다루지 못하는 악귀와 혈종들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마의 지대.
간악하며 증오스러운 용들이 틀어막은 장막의 바로 옆에.
조종이 불가한 악귀와 혈종들을 탑을 세워 가두었으나 언제 터질지 모른다. 하여 이곳을 지키는 마족들은 시한부와 다름이 없었다.
주로 주류에서 떨어진 마족과 네임드들이 이곳을 지킨다.
마계 중심부로 저 괴물들이 유입되지 못하도록.
차라리 용들이 만든 번개의 장막 속으로 내던져지도록 감시하는 게 이들의 임무였다.
그리고 빌헬름도 그중 하나였다.
“혈종을······ 어떻게 인간이?”
그런데 아무도 다루지 못해서 억지로 가둬둔 혈종을 저 인간 계승자가 부리고 있었다.
이지를 상실하여 그저 파괴밖에 모르는 혈종을 얌전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멈춰 세운 걸로도 모자라 혈종은 다음의 지시를 기다리듯 가만히 저 인간 계승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걸 혈종이라고 부르나보군.”
인간 계승자가 말했다.
단순히 네임드들의 이름을 이었을뿐 아니라 혈종을 다루기까지 한다.
빌헬름은 지금 이 상황이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혈종을 다룰 수 있다면, 그는 마왕의 자격을 갖춘 셈이다.
“혈종은 어지간한 마왕들도 못 다루는데······.”
설명은 되지만 여전히 납득은 가지 않았다.
“그래봤자 이곳의 저주를 이기지 못하고 변형한 악마 아닌가?”
“··· 틀린말은 아니로군. 그런데 아까부터 거슬린다만, 우리는 악마가 아니다. 마를 품은 신의 대적자일뿐 ‘악’에 물들지는 않았다.”
악마와 마귀는 다르다.
그들은 신의 대칭점에 존재하기에 스스로를 마족이라 불렀다.
마를 품고 힘을 행사하기에 마족일 뿐이다.
하지만 모두가 악에 물들지는 않았다. 스스로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악마’라는 호칭은 다소 불편한 것이다.
“흠.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하다. 앞으로는 마족이라 부르도록하지.”
인간의 입장에서야 악마나 마족이나 똑같아 보이지만, 종이 한 장 차이라도 차이는 차이였다.
빌헬름은 인간 계승자와 신녀, 그리고 다크엘프를 번갈아 쳐다봤다.
중간계의 타종족이 벽을 넘어 마계로 들어오는 건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조합은 처음봤다.
만약 저 인간이 ‘계승자’가 아니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천산의 신녀라는 말도, 저 혈종을 다루는 능력조차도.
“계승자여. 혹시 다른 혈종이나 악귀들도 다룰 수 있는 건가?”
인간 계승자가 고개를 저었다.
“저 혈종만 내게 반응했다.”
초거대형의 혈종.
저 혈종은 이곳에 있는 혈종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오래도ᅟᅤᆻ다.
모든 마왕들이 다루기를 포기해 방치된 혈종이다.
그것이 왜 하필 저 인간에게 반응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가··· 아무튼 먹히지 않게 조심해라. 저만한 혈종을 다룰 수 있다는 게 알려지면 다른 마족이나 마왕들이 네 몸을 탐낼 테니.”
“조심할 필요가 있나? 저 혈종을 타고 가면 될 것 같은데.”
“그건 위험하다. 아무리 혈종을 다룰 수 있다고 해도 언제 폭발하고 공격해올 지는······.”
“손.”
스으으윽.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혈종이 손을 내밀었다.
거대한 손 위에는 몇 명이 올라가도 너끈했다.
더욱 놀라운 건 그 다음 벌어진 일이다.
혈종의 손 위로 인간 계승자가 올라간 것이다.
“이대로 이동하면 될 것 같군.”
“······.”
빌헬름은 할 말을 잊었다.
마왕들이 악귀나 혈종을 다룰 때에도 초반에는 어느 정도 저항하기 마련이다.
키우는 개마냥 저토록 자연스럽게 따르게 할 수는 없었다.
헌데 모두가 포기해버린 혈종을 순식간에 따르게 만들다니.
‘어이가 없군.’
이 사실이 알려지면 마계가 발칵 뒤집힐 것이었다.
천산의 마왕들 역시도.
*
혈종.
마족이 거대화한 괴물.
농도 짙은 방사성 물질과 마족 자체가 가진 특수한 성질이 만나 이런 기현상을 만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게 달려온 혈종을 마주한 순간 ‘원죄’가 반응했다.
‘원죄와 관련된 혈종이다.’
원죄.
혹은 칠대 죄악을 지닌 마족이 변형한 게 저 혈종이 아닐는지.
그래서 다룰 수 있었다.
순식간에 인식하고 인지하여 명령을 내린 것이다.
쿵.
쿠우우웅.
발을 옮길 때마다 대지가 울린다.
덕분에 쉽게 마계를 이동할 수 있었다.
혈종을 발견한 마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도망치기 바빴다.
“··· 내 안내는 필요없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빌헬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만한 급의 혈종을 다룬다면 천산까지 가는 길에 장애물은 없을 것이다.
일반 마족과 악귀들도 본능에 따라 혈종은 피하기 마련이었으니.
“아니, 덕분에 일이 쉬워졌다.”
허나 나는 정정해주었다.
빌헬름이 아니었다면 주변의 마족들을 모조리 도륙냈을 것이다.
그러면 일이 훨씬 꼬였을 테고 쉽게 나아가지도 못했으리라.
빌헬름은 말이 통하는 마족이었다.
네임드. 자신의 이름을 잃지 않은 정통성있는 마족이라서 더욱 그렇겠지.
“본래라면 천산으로 향하기 위해선 다섯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된다만······.”
“혈종이다!”
“도망쳐!”
“······ 관문을 지키는 자들도 도망치기 바쁘군.”
천산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다섯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는데, 지나치는 족족 관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이다.
모두 혈종의 위엄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만한 초거대형의 혈종은 거의 없었으니.
‘이렇게 쉽게 천산이 열릴 줄이야.’
어이가 없었다.
일반적인 마족은 절대로 천산에 오르지 못한다.
선택받은 자들만이 천산에 오를 수 있고, 네임드들 조차도 모든 관문을 통과하는 게 쉽지 않았다.
마계에서 천산은 그런 의미다.
마계 유일의 성지(聖地).
그곳에 있는 대죄교와 마왕들은 마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었다.
천만에 달하는 마족이 대죄교와 그곳의 마왕들을 떠받든다.
‘천산이······.’
보인다.
거대한 영맥이 흐르는 산.
마족의 피와 살이 흐르는 산.
저 산은 악귀로 만들어졌으니.
“멈춰라.”
마지막 관문을 앞에두고 한 남자가 천산에서 내려왔다.
그 역시도 초거대형의 혈종을 부리고 있었다.
남자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뚜렷한 이목구비, 꽃망울 같은 눈매와 기다란 검은 머리칼은 한폭의 그림 같았다. 어지간한 여인자다도 아름다운 남자였다.
하지만 빌헬름은 그를 앞에두고 몸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마왕 델바란!’
천산의 마왕 중 하나이자 마왕들 중에서도 강력하기로 손에 꼽히는 최강자였다.
교만의 델바란으로도 불리며 수천년을 살아온 거물.
하물며 그가 다루는 혈종은 최강이라 불렸던 고대의 다섯 마왕 중 하나가 이름을 잃고 변형된 존재였다.
“혈종 아수라를 다루는 게 누구더냐?”
그런 그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라인하르트를 노려보았다.
혈종 아수라!
정식적인 명칭은 아니다.
허나 저 혈종은 혈종들 중에서도 상당히 유명했다.
모든 마왕들이 탐냈으나 실패한 게 바로 저 혈종 아수라였던 탓이다.
하여 마의 지대에 가둬둔 채 봉인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혈종을 다루는 자가 나타났다.
심지어 관문을 돌파해 천산에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나조차도 다루지 못한 게 혈종 아수라였거늘.’
물론 그렇다고 그가 다루는 혈종의 급이 떨어진다는 건 아니지만 감히 자신이, 교만의 델바란이 다루지 못하는 혈종을 그 누가 다룬단 말인가.
칠대천사라고 불리며 대죄교의 마왕으로 군림한지 수천년.
그 시간 동안 저 혈종 아수라는 깨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혈종 아수라가······ 지금 눈앞에 있다.
봉인된 것도 아닌 깨어난 채로.
말인 즉, 누군가가 저 녀석을 지배하는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빌헬름?’
게다가 그 혈종 아수라의 손 위에 빌헬름이 있었다.
벽을 지키고 있어야할 녀석이 왜 이곳 천산의 입구에 있는가.
심지어 벽 바깥의 존재들을 데리고서.
‘저게 마왕인가보군.’
······ 그리고 나 역시도, 새로이 나타난 마왕을 마주보고 있었다.
마왕.
대죄교의 일곱 죄악들 중 하나를 잇는자.
하지만 분노와 폭식은 마계 바깥에 있었다.
분노는 실버팽이, 폭식은 천년 전 북부의 용을 봉인한 가프가.
그리고 나는 그 두 가지 힘을 모두 이었다.
“빌헬름, 네가 혈종을 부린 것이냐?”
“제, 제가 아닙니다, 델바란님.”
“그럼······?”
빌헬름도 아니라면 누가?
“나다.”
내가 사실대로 말하자, 그가 웃어보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인간이 혈종을 다룬다고?”
웃기는 소리다.
차라리 마족이라면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혈종을 다룬다고?
그것도 자신도 다루지 못했던 아수라를?
킁, 킁.
델바란이 냄새를 맡았다.
그러곤 인상을 구기며 다시 말했다.
“아니······ 잠깐. 뭐냐, 네놈은. 왜 이렇게 진하게 죄악의 냄새가 나는 거지?”
약간은 당황한 것 같은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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