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아미르 추기경. 그리고 자스민 성녀. 둘 다 오랜만이군.”
데우스가 신성교를 대표해 찾아온 두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두 여인 중 아미르 추기경은 제국과 가장 인연이 두터운 여걸이었다.
나이를 먹었지만 주름살 하나 없이 뽀얀 피부.
30년 전과 비교해도 얼굴이 변하질 않는다.
신성교의 ‘고위 성직자’들은 대게 세월을 빗나가곤 하였다.
게다가 1년에 몇 번씩 얼굴을 마주하기에 사실 오랜만에 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데우스의 시선은 오직 자스민 성녀에게 박혀있었다.
‘리겔 왕국의 왕녀이자, 신성교의 성녀. 어릴 때 이후 처음이로구나.’
십 년도 더 전에 리겔 왕과 함께 본 기억이 남았다.
당시의 자스민은 어렸지만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후계자의 구도 자체가 바뀌었을 만큼.
‘그래··· 결국 성녀가 되었던가.’
신성교의 성녀라면 어지간한 왕국의 왕과 맞먹는 자리다.
리겔 왕이 동부의 패자라고 하더라도 성녀라면 무시하진 못할 터.
“소문을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대악마가 부활했습니다.”
아미르 추기경이 고개를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리겔 왕국에서부터 퍼져나가는 소문.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악마교단의 전신 말인가?”
“예. ‘칠죄종’의 수장인 대죄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칠죄종이라······.”
칠죄종.
일곱 개의 죄악을 품은 일곱 존재를 뜻하는 말이다.
과거 악마교단을 소탕할 때 자신을 칠죄종이라 말하는 악마를 처단한 적이 있었다.
그때 희생된 병사의 수만 수만에 달한다. 단 하나의 악마를 잡기 위해 죽은 숫자가 그 정도였다.
그런데 칠죄종의 우두머리인 대죄종이 나타났다니.
“소마 성녀가 대죄종과 싸우며 죽었습니다. ”
“소마 성녀라면 교 내에서도 상당한 강자로 분류되지 않나?”
“예. 그래서 제국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악마교단을 처단하는 일이라면 협조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데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과 달리 내심 편하지가 않았다.
‘라인하르트의 말이 걸리는군.’
신성교 내부에 악마교단의 끄나풀이 있다는 말.
저 둘이 그 악마교단의 끄나풀일 수도 있었다.
궁 내에서 라인하르트의 암살을 계획했던 악마교단을 그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폐하.”
그때 침묵하던 자스민 성녀가 품에서 긴 도화지 한 장을 꺼냈다.
“혹시 이 사람을 아십니까?”
도화지 안에는 한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갸름한 턱선과 굵은 눈썹. 검은 머리칼과 특유의 퇴폐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익숙한 얼굴이다.
······ 라인하르트.
왜 자스민 성녀가 녀석의 얼굴이 그려진 도화지를 내미는 것인가.
“글쎄, 짐이 알고 있어야만 하는가?”
“이번 일과 관련되어 ‘핵심인물’일 가능성이 큰 자입니다. 제국 수도에서 수소문한 결과, 황송하오나 라인하르트 전하와 매우 닮으셨다고 합니다.”
“헛소리로군.”
즉답.
데우스는 저 말도 안 되는 말을 헛소리로 치부했다.
‘라인하르트를 악마교단과 엮으려고 하는구나.’
카를로스 대공과 악마교단은 라인하르트를 노리고 있다.
아예 라인하르트를 악마교단의 대죄종, 혹은 수괴로 낙인찍어버릴 작정이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다.
의도가 뻔히 보인다.
‘카를로스가 옥에 갇히니 이런 수작질을 부리는구나.’
데우스는 분노했다.
카를로스 대공이 옥에 갇히자마자 저들이 제국으로 달려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달려와선 저 그림을 내미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만에 하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황태자 전하를 저와 직접 대면하게 해주시면······.”
“닥쳐라.”
“······!”
자스민 성녀와 아미르 추기경의 눈이 커졌다.
성왕으로 이름이 드높은 데우스가 욕을 했다.
수십 년을 봐온 아미르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데우스의 분노는 진짜였다.
“듣자 하니, 감히 짐의 앞에서 황태자를 모욕하는 것이냐?”
그것을 알기에 아미르 추기경이 다급히 첨언했다.
“저, 전하. 그럴 의도가 아닙니다.”
“의도? 그럼 무슨 의도로 저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게지?”
“황태자 전하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입니다. 모든 의혹을 떨쳐낸 후 악마교단을 처단하는데 선봉장으로서······.”
“처단, 처단이라고.”
“화, 황태자 전하를 처단한다는 말이 아니라······.”
“닥쳐라. 제국이 신성교와 협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데우스가 잔뜩 굳은 얼굴로 계속해서 말했다.
“짐의 귀와 눈을 불편하게 하였으니 쉽게 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아미르 추기경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곤 전혀 상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결점이 남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황제 데우스라면, 당연히 모든 의혹의 해소를 위해 황태자와의 대면을 추진할 줄 알았다.
‘황제가 황태자를 총애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사람은 라우넬이다.
그게 최근 라인하르트로 바뀌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황제를 보아온 아미르 추기경은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라인하르트 황태자를 두둔하는 걸 단 한 번도 못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저, 저희는 신성교의 사자입니다. 이런 법은 없습니다.”
“제국의 국교는 신성교가 아니다. 그리고 이곳에선 짐이 곧 법이니.”
스릉.
기사들이 검을 뽑고 다가왔다.
순응하지 않으면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제야 아미르 추기경은 자신의 실수를 자책했다.
‘설마 1년 사이에 황제가 이토록 변했을 줄은······.’
황제가 변했다.
1년 전과 같은 사람이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여기서 저항했다간 정말로 목이 잘릴 것이다.
황제는 신성교와 척을 지는 것을 이제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감이 붙었다. 적을 만드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너무 성급했다.’
후회해봤자 늦었다.
아미르 추기경과 자스민 성녀는 포박된 채 죄인처럼 끌려갔다.
그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데우스는 혀를 차고 말았다.
“라인하르트가 악마교단과 연관이 있다니,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헛소리도 이런 헛소리가 또 없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였다.
데우스가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어디로 간 게냐. 이 망할 녀석 같으니.”
*
마계.
짙은 안개가 자욱한 그 내부로, 마침내 들어갔다.
학살당하는 거인들을 뒤로한 채 들어온 마계의 내부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수많은 괴물이 우글거리며 반겨줄 줄 알았건만.
‘악마.’
장막 바깥의 거인들보다는 작지만 날개를 지닌 악마들이다.
순식간에 악마들이 주변을 둘러쌌다.
“‘마의 지대’를 넘어오다니, 너희는 뭐냐?”
“인간? 인간과 다크엘프의 냄새가 나는데. 그리고 하나는······ 흠?”
“맛있겠군.”
그들은 군침을 흘리며 나를 비롯한 아렐과 헬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먹이 그 이상으로 안 보는 것이다.
헬라는 주변에 모여든 악마들을 바라보며 허리춤에 손을 얹고는 말했다.
“여기가 마계야?”
“먹잇감이 말을 하는군. 신선하다는 증거겠지.”
“대죄교로 안내해 줘. 너희한테는 볼 일 없으니까.”
“천산(天山)으로 안내해달라니, 몸은 신선해도 머리는 고장난 멋잇감인가보군.”
악마들이 웃었다.
다짜고짜 대죄교로 안내해달라는 먹이의 말이 가소롭기라도 하다는 듯이.
“어떻게 마의 지대를 넘어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선한 먹잇감은 이백년만이다.”
“눈을 내꺼다!”
“심장은 내가 먹겠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악마들은 오랜시간 굶주린 듯 해체하여 먹을 부위를 나누고 있었다.
그 숫자가 족히 수백에 달했다.
“잠깐.”
그때 외눈박이의 악마가 눈을 오므린 채 비집고 다가왔다.
그가 나를 한참 훑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는 ‘계승자’다.”
악마들이 흠칫했다.
“계승자라고?”
“그래. 그것도 오십여개에 가까운 ‘이름’을 이었다. 심지어 모두 ‘네임드’들이다.”
“네임드······!”
악마들은 술렁였다.
아무래도 소마 성녀를 죽일 때 나타난 악마들의 룬을 말하는 것 같았다.
룬 자체는 발록에게 먹였지만 그 이름의 가호는 내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네임드라니.
“네임드가 뭐지?”
내가 묻자 외눈박이 악마가 말했다.
“벽을 허물고 거짓된 신들을 죽이고자 선별된 선지자들. 우리는 그들을 네임드라고 부른다. 그리고 너는 그런 네임드의 이름을 계승하고 있다.”
마계에서 넘어온 대악마들.
인류의 해악이라 규정된 그들을 이들은 선지자라 말한다.
거짓된 신을 죽인다는 건 12주신을 죽인다는 것이겠지.
내가 그들의 이름을 계승했다는 게 알려지자 악마들의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그들은······ 어떤 최후를 맞이했나.”
어떤 최후를 맞이했느냐고?
소마 성녀에게 죽었다. 죽이고, 먹혀서, 능력을 빼앗긴 채 농락당했다.
허망하고 처참하기 짝이 없는 최후다.
“최선을 다해 싸우고, 전사답게 죽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을 계승하며 그들의 감정 역시 느꼈지 않았나.
그들의 죽음을 폄하한다면 이름을 계승할 자격이 없다.
“그런가······.”
외눈박이 악마가 침음을 삼켰다.
“이만한 숫자의 이름을 계승한 계승자라면 필시 우리를 구원할 구원자일 것이다. 벽 너머에서 직접 찾아왔으니 먹잇감도, 적도 아니다.”
“빌헬름.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알겠다.”
악마들이 수긍했다.
빌헬름. 외눈박이의 악마가 이곳에 모인 악마들 중에서 가장 직급이나 위치 따위가 높은 악마인 듯싶었다.
그들이 물러나자 빌헬름이 다시 내게 말했다.
“벽 너머에서 온 자여. 천산으로 향한다는 말이 사실인가?”
“대죄교가 천산이라는 곳에 있다면, 그렇다.”
“천산의 마왕들은 인간종을 좋아하지 않는다. 네임드를 계승했대도 보자마자 죽일 거다. 그런데도 천산으로 향하는 이유가 뭐냐?”
천산의 마왕?
대죄교의 칠죄종을 말하는 건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천산. 대죄교에 대한 악마들의 인식은 썩 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대죄교에 헬라를 데려가는 게 일차적인 목표였다.
실버팽과의 약속이기도 했고.
“내가 ‘대죄악의 신부’니까.”
대답을 한 건 헬라였다.
빌헬름의 표정이 굳었다.
“‘대죄악의 신부’······ 천산의 신녀를 말하는 거냐?”
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그 신녀야.”
“······ 사실인가, 계승자여?”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해주었다.
그러자 빌헬름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마계가 다시 한 번 요동치겠군. 벽 너머에서 찾아온 천산의 신녀와 계승자라니······ 그럼 그대는 신녀를 호위하는 무사 같은 건가?”
“얼추 비슷하다.”
대죄종의 본체인 원죄를 흡수했다고는 말하면 믿지 않을 분위기다.
딱히 말을 할 생각도 없었다. 긁어 부스럼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대죄교의 상태나 상황을 살펴보고 밝혀도 늦지 않다.
‘그다지 강해보이지는 않는다만.’
빌헬름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장막을 넘어왔는 지는 모르겠지만 계승자치곤 약해보인다.
느껴지는 마나도 그다지 특출날 게 없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강하지만 자신들의 기준으로 보자면 갓난아기와 같았다.
“하아, 좋다. 내가 안내하겠다. 그게 아니라면 중간에 수없이 습격을 받을 테니.”
그래도 정말 신녀라면 천산까지 데려다줄 필요는 있었다.
허약한 인간들끼리 천산으로 향했다가는 가는 길에 백중 백 죽을 것이니, 별 수 있겠는가.
*
빌헬름은 악마들 사이에서도 꽤 유망한 자였다.
그를 알아본 악마들은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궁금한 건 참을 수가 없었다.
“벽 너머의 거인들은 너희와 같은 악마인가?”
“악마라······ 같은 종이냐고 묻는 거라면, 맞다. 굶주림과 욕망 따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폭주하는 ‘네임드’들이지.”
네임드가 폭주하면 거대화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폭주한 네임드들은 번개의 장막이 걷히자마자 이성을 잃고 달려와 용들에게 사냥당했다.
“폭주한 네임드는 ‘악귀’의 상태가 된다. 악귀는 오직 살생만을 위해 존재하는 무기다. 이지가 없기에 절대로 다룰 수 없고 그래서 벽쪽으로 몰아넣어 둔 것이다.”
빌헬름은 착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곳곳에 놓인 ‘탑’들.
두꺼운 벽으로 쌓은 탑의 안에 악귀들을 가둬두었다.
가둔 상태에서는 정지되어 있어야 정상이지만 몇몇 악귀들이 탑과 벽을 부수며 난동을 피웠다.
“‘마의 지대’에 있는 번개의 장막이 왜 걷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악귀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우선 이곳을 수습하는 게 먼저다. 그러니······.”
구아아아아아아!
쿠르릉! 쿠아아아아!
순간 광음이 사방에 수놓였다.
“젠장.”
두터운 벽을 부수고 악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인의 형상을 한 악마.
그것도 다른 악귀들보다 두 배 이상 큰 녀석이다.
족히 20m는 될 것 같은 초거대형.
빌헬름이 이맛살을 구겼다.
“하필이면 ‘혈종’이 깨어나다니······! 조심해라.”
혈종이라 불린 악귀가 함성을 내지르며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악!”
“막아!”
다른 악마들이 막아섰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크기와 힘의 차이에서 이미 상대가 되질 않았다.
곧 빌헬름의 전신에서 검은색의 오러가 술렁였다. 오러는 빌헬름의 전신을 부풀리고 신체를 갑옷처럼 감쌌다.
“크으읍!”
그 상태로 혈종과 부딪힌 빌헬름이 겨우 혈종의 다리를 잡고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혈종.
마계에서도 흔치 않은 이 초거대형의 악귀는 오랜시간 잠들어있었다.
장막이 걷힐 때도 조용하던 놈이 갑자기 깨어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막을 수 없다.
놈이 날뛰면 이 주변은 초토화될 것이다.
“계승자여, 도망······.”
“멈춰라.”
뚝!
그 순간이었다.
빌헬름의 눈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계승자. 그가 멈추라고 말하자, 정말로 혈종이 멈춰섰기 때문이다.
악귀는 폭주한 네임드다. 절대로 다룰 수 없다는 게 정설이었다.
심지어 혈종은 그 악귀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괴물이었다. 재해였다.
그런 괴물이, 저 인간의 말에 멈춰섰다.
‘뭐?’
순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이다.
‘용언?’
용언인가?
말의 힘을 다룰 수 있는 건 증오스러운 용뿐이다.
하지만 계승자는 분명히 인간이었다.
인간이 어찌 용의 힘을 사용한단 말인가.
그것도 혈종을 멈춰세울 정도의 힘을.
‘악귀는 용언이 통하지 않을텐데.’
무엇보다 악귀는 용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
혈종이라면 어지간한 용도 씹어먹을 정도로 강력하다.
애당초 혈종은 마왕이 폭주하여 악귀가 된 존재였다.
또한 악귀를 다루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 했지만, 극소수로 있기는 있었다.
악귀를 다루는 자가.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이렇게 불렸다.
‘마왕······.’
< 마계(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