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116화 (116/146)

―거기서 오른쪽 모퉁이로 돌아라.

목소리가, 들렸다.

아렐은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그래?”

헬라가 되묻자 아렐이 답했다.

“가까이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나다. 라인하르트. 원격으로 보내는 것이니 놀라지 마라.

“······!”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마치 머릿속을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에 아렐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차분함을 되찾았다. 어쨌든 이 또한 라인하르트의 수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허나 의문은 의문이었다.

‘마법의 유효거리도 넘어갔을 텐데······?’

마법으로 목소리를 전하는 건 아무리 길어도 2km 남짓이다.

마나의 유효사거리 안에서만 마법적인 작용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라인하르트와 그녀의 거리는 그보다도 멀었다.

라인하르트는 성 바깥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물론 발록이 성안으로 들어갔지만, 그게 라인하르트는 아니지 않나.

‘여기는 어디고, 발록은 왜 성안으로 용들과 함께 들어간 걸까.’

뭐 하나 제대로 알 거 같은 게 없었다.

애당초 이곳은 어딘가.

마계와 중간계의 경계라는 건 알겠지만 왜 그 경계에 이런 거대하기 짝이 없는 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곳을 어떻게 알고 라인하르트가 찾아왔는지도 모르겠고, 발록은 또 왜 다른 용들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간 건지도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세상의 중심······.’

이곳이 바로 세상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의뭉스럽지만, 라인하르트가 이상한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 그러려니 하였다.

게다가 리겔 왕국에서 구출된 이후부터 아렐은 라인하르트에 대한 이상 현상을 겪고 있었다.

‘감정이 공유된 것 같아.’

라인하르트가 격한 감정을 느끼면 그 감정을 아렐도 공유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콜로세움에서 카잔이 휘슬에게 패배했을 때.

휘슬이 카잔을 상대로 굴욕을 주고 있을 그때, 라인하르트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도 같은 감정이 들 정도였다.

마치 자신의 분노처럼 그녀는 감정을 이입했다. 감정의 동요가 적은 평상시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황제를 대할 때의 심장이 조여오는 감정도, 라우넬을 비롯한 동생들을 대할 때 왠지 모르게 미안해하는 감정도······ 전부 느낄 수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신체 능력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지.’

하루가 다르게 신체의 기능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는 중이다.

이 역시 상식적인 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모든 게 구출 직후에 벌어진 일이다. 라인하르트가 그녀를 구출한 이후 아렐은 극적인 변화를 맛보는 중이었다.

라인하르트가 자신에게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리라.

헬라는 듣지 못하는 이 목소리도 그로 인해 가능해진 것일 테고.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뭐 해? 빨리 안 가?”

“아.”

아렐이 얼굴을 좌우로 털었다.

지금은 생각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계로 향하기 위해선 저 번개의 장막을 걷어내야만 한다.

―앞으로 이십보, 왼쪽으로 이십보.

······ 여전히 적응은 안 되지만.

아렐은 라인하르트의 지시대로 힘차게 걸어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더 지났을까.

성의 지하.

로드의 방과 이어진 지하로 향하자, 또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 이것들은 다 뭐야?”

헬라가 기겁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렐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게······.

‘알?’

셀 수 없이 많은 커다란 흰색의 알들이 빽빽하게 지하를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

번개의 장막.

그것은 마계와 중간계를 나누는 경계다.

로드의 권능이며 동시에 절대적인 보호막이다.

하지만 저런 고도의 에너지를 역 겹의 시간 동안 계속해서 출력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비효율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상적이다. 비효율적이다.

저 정도의 에너지로 나노머신을 다룬다면 마계의 방사능을 진즉에 걷어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위성으로 바라본 마계는 안개로 가득했다. 내부를 살펴볼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방사성 물질이 전역에 펼쳐져 있었다.

장막으로 막아둔 채 아예 손을 안 썼다는 의미였다.

‘로드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드래곤 로드가 정말 신에 가까운 능력자라 할지라도, 저 비정상적이고 비효율적인 에너지의 출력을 무한하게 이어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에너지 출력을 돕는 무언가가 성안에 있다는 뜻이다.

[‘고출력 에너지원’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감지되었습니다.]

그런 내 생각을 뒷받침하듯 번개의 장막을 탐지한 제로가 말했다.

번개의 장막을 유지하는 에너지원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성에 있다고.

그래서 작전을 짰다.

회의가 진행되는 사이 저 에너지원의 작동을 중지시키는 것.

물론 위험한 도박이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성에 들어간다면 그 즉시 용아병에게 들킬 터였다.

하지만 용아병을 비롯한 성의 병사들은 ‘용’에게 반응하지 않는다.

하여 아렐과 헬라에게 ‘용’의 데이터를 지닌 나노머신을 투입했다.

이는 제로가 북방의 용의 데이터를 표면의식에 올려 다른 용들의 의심을 차단한 것과 같은 원리였다.

‘장막을 유지하는 장치는 그 방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회의가 길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빠른 시간 내로 승부를 봐야만 했다.

‘제로. 에너지의 흐름을 추적해라.’

[네, 마스터.]

허나 저만한 에너지를 유지하는 일이다.

분명 이어지는 통로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성공률이 희박했지만 둘은 보란 듯이 성공했다.

“허.”

장막이 걷히며 보이는 광경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성공은 했다만······.’

번개의 장막이 꺼지자마자, 안개를 꿰뚫고 나타난 괴이한 존재들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괴이하다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신을 부정하는 듯한 거인(巨人)들.

두 장의 날개를 지닌 거인들이 창을 들고 등장했다.

구오오오오오-!

기아아아아아!

그리고 그 거인들이 용과 싸우고 있다.

진짜 신화나 전설의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하지만 그 위용도 얼마 가지 못한다.

이곳 용혈회에 모인 용들은 ‘진짜’ 괴물이었다.

순식간에, 마치 한 끼 식사거리인 마냥 거인들을 학살하고 있다.

‘이럴 때가 아니다.’

멍하니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 사이에 저들을 뚫고 마계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으므로.

“가지.”

성을 빠져나온 아렐과 헬라를 향해 말했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미리 물색해둔 길을 통해, 용과 거인들의 시선을 피하며 빠르게 달려나갔다.

*

번개의 장막이 꺼졌다.

갑작스럽게.

역겹의 시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드래곤 로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장막의 에너지원을 차단시킬 키는 내가 가지고 있거늘.’

번개의 장막.

그녀의 권능과 지하의 에너지원들이 합쳐져 만들어낸 결과다.

헌데 장막으로 향하는 공급이 끊겼다.

외부의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공급을 끊었다.

하지만, 어떻게?

성 내의 수많은 용아병들도 반응하지 않았다.

이상한 기척이 있었다면 그녀부터가 먼저 알았을 것이다.

‘용.’

이 성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용뿐이다.

회의에 모인 열 다섯의 용들.

자신을 포함한 열 여섯 용만이 자유를 보장받았다.

당연히 다른 용이 들어왔다면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알아차리지 못했다.

‘회의에 참석하는 용들의 기척을 흉내내어 들어온 것이다. 내가 이상함을 느낄 수 없도록.’

용아병들이 움직이지 않은 이유도,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하지만 공교롭다.

너무 공교로웠다.

하필이면 회의가 진행될 시간을 정확히 노려서 진행했다.

회의시간을 알고 있는 내부자의 소행이라는 의미다.

‘회의에 참석한 용들 중, 가짜가 있다.’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 이 성에 용의 기척을 흉내내는 가짜가 들어와 있다.

그것도 자신을 속일만큼 정교하고 대단한.

‘특이점. 제로. 십이주신······.’

저들, 혹은 저들과 연관 된 무언가가 이곳에 있다.

특이점. 대죄종이라면 마계와 연관이 있다.

십이주신 중 누군가가 개입했을 가능성 역시 없지 않다.

마지막으로 제로······.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번개의 장막을 껐다면 목적은 뻔하다.

마계의 출입구를 열려는 것일 테다.

들어가는 게 목적인지, 누군가를 빼내는 게 목적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대로 침입자를 찾고자 시간을 허비하는 게 오히려 그들의 노림수일 터.

‘뜻대로 놔두지 않겠노라.’

그녀가 번개의 장막을 재가동시켰다.

*

마계.

악마들이 사는 곳.

중간계를 침범하려는 마왕들이 기거하는 장소.

인류에 있어서 마계는 ‘악의 소굴’ 정도로 여겨졌다.

간혹 마계에서 튀어나온 악마들은 인간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했던 탓이다. 대악마라 칭해지는 악마들은 수십, 수백만 구의 시체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이 마계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없다.

200년 전 제국을 호령하던 여제가 마계 또한 정벌하겠다며 대규모의 병사들을 보낸 기록은 있으나 생환하여 돌아온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마계라.’

나 또한 마계가 미지인 것은 마찬가지다.

위성을 통해서도, 제로나 용들의 데이터 내에서도 ‘마계’에 관한 정보는 전무했다. 심지어 드워프조차 모르고 있었다.

『위대한 고대의 기술을 지닌 자여, 부디 우리와 시야를 공유해다오. 』

『마계의 정보와 기술력은 저 거대한 악들의 손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그것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보다 더 위대해질 것이다.』

마계로 진입하기 전.

흥분한 것만 같은 목소리로 드워프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저들과 손을 잡지 않았다. 아직 내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로. 드워프와 시야가 공유되는 통로를 차단해라.’

[네, 마스터.]

드워프와 연결 된 시야가 차단됐다.

그러자 탄식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저곳은 우리가 탐구해야할 진정한 신비이거늘.』

『위대한 고대의 기술을 지닌 자여, 정녕 이렇게 나올 것인가?』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 거냐고 묻는다.

나는 애써 무시했다. 지금은 마계로 들어가는 데에 집중해야할 때였다.

뿌연 안개의 벽.

저 벽 너머에, 마계가 있다.

미지의 세계.

대죄교, 모든 악마들의 고향!

촤아아악!

하지만 대지에 전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막대한 에너지가 대지를 좀먹고 있었다.

‘흔적을 쫓지 않는다고?’

나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시간을 끌고자 이곳저곳에 흔적을 남겨두었다.

마계로 넘어갈 때까지 드래곤 로드가 침입자를 찾는데 정신을 쏟게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꼼수에 드래곤 로드는 넘어가지 않았다.

내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 곧장 번개의 장막을 재가동시킨 것이다.

이대로는 마계로 넘어가기 전에 저 에너지에 잡아먹힐 가능성이 컸다.

『······ 번개의 장막이 다시 재가동되고 있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약간의 시간을 지연시키는 것뿐.』

『그녀가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겠으나, 위대한 고대의 기술을 가진 자여.』

『그대의 현명한 선택을 기다리지.』

치직. 치지지직!

번개가 들끓고 다시 사라지길 반복한다.

드워프가 손을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오래 버티지는 못하리라.

전력을 다해, 있는 힘껏 내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마계.’

마계의 벽을, 넘었다.

< 마계(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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