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115화 (115/146)

드래곤 로드.

태초부터 존재해온 최강의 존재.

가장 강력한 용이라 칭해지며, 용혈회의 수장으로서 이 회의를 주관하는 자였다.

‘그녀는 데이터를 읽어드릴 수 있다.’

무엇보다 위험한 건 그녀가 나노머신에 쓰인 데이터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포장되고 있었다.

용들의 과거를 읽고, 데이터를 기반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것.

고집 많은 용들이 그녀를 따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강한 것도 강한 것이지만 그녀의 ‘예측력’ 때문이 아니겠나.

마치 신과 같은.

혹은, 신보다 더 대단하다고 추앙되는 능력의 본질.

‘의심하는군.’

그녀의 시선은 정확하게 내게서 멈춰섰다.

다른 용들에게조차 별 관심이 없는 그녀가 나를 쳐다보는 이유.

“의식은 북부의 용이나······.”

의심이다.

나 역시도 그 이유를 예측해보았다.

‘발록의 신체 탓이겠지.’

그리고 머지않아 내 예측과 같은 말이 로드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몸은 다른 용의 것이구나, 북부의 용이여.”

······ 역시나.

발록의 모든 걸 제어할 수 있게 되었지만, 북부의 용과 발록의 괴리감에 대해 그녀는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데이터가 일치하지 않으니 의심할 수밖에.

나는 의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문제가 되나?”

당당하게.

무엇이 문제냐며 역으로 되물었다.

그런 내 말투와 태도가 거슬렸는지 몇몇 용들이 나를 흘겨보았다.

뭐, 괜찮다.

이미 미친놈으로 낙인찍혔으니까.

제정신이 아닌 놈으로 사는 건 익숙했다.

어차피 이곳에서 나보다 더 이런 상황이 익숙한 자는 없을 테니.

게다가 용이 용을 먹는 건 흔한 일이다.

북부의 용은 봉인되며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다른 용의 몸을 차지할 명분도 있고, 그게 크게 문제 될 것은 아니다.

“몸을 바꾸면 부작용이 나온다. 조정을 위해 ‘혼령의식’을 하지 않으면 붕괴되어가지.”

혼령의식?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북부의 용이 가진 데이터 상에도 없는 단어였다.

로드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내일 의식을 치러주마. 북부의 용이여.”

“······ 이제 막 입회한 용에게 그 의식은 너무 큰 사치가 아닙니까?”

용들이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 다른 용들보다도 더 광적인 눈빛으로 로드를 바라보던 녀석이 말했다.

아무래도 저 ‘혼령의식’이라는 게 용들도 받고싶어하는 축복 비슷한 것인 듯싶었다.

하지만 ‘조정’이라는 단어가 묘하게 거슬린다.

“‘특이점’이 출현했다. 무슨 수작을 부려올지 모르니, 용혈회의 용이라면 마땅히 대응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로드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녀가 직접 ‘특이점’을 언급하며 그 위험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한 것이다.

저 혼령의식 역시 특이점을 대응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며.

용들에게조차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특이점’이기 때문일는지.

‘좋지 않군.’

로드가 직접 의식을 주관하며 ‘조정’한다는 것.

나사를 조이는 그런 간단한 일은 아닌 터이다.

나노머신과 A.I의 데이터를 읽을 수 있는 게 로드.

그와 반대로 ‘덮어 씌우는’ 것조차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니, 가능할 것이다.

다른 용들의 태도를 보아하면 저들 역시도 조정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었으므로.

‘내가 직접 닿는다면 모르겠지만.’

물론 내가 직접 닿는다면 제로에 의해 방비하고, 더 나아가 킬코드를 삽입할 수도 있겠지만······ 이 몸은 내 본체가 아닌 발록의 것이다.

제로의 본체 역시 이곳에 있지 않았다.

만약 발록의 해킹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면 내 존재 역시 발각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그 뒤의 일은 상상하기도 싫다.

최악의 경우 발록을 해킹한 로드가 나를 죽이고 제국을 멸할 것이다.

그러니, 발록의 신체에 로드가 닿는 건 최대한 피해야만 한다.

“더 이견이 없다면 회의를 시작하마.”

나를 포함한 열 여섯의 용.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강력하기 짝이 없는 그들이 모여, 마침내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 첫 번째 의제는.

“마지막 위업의 시기가 확정됐다”

······ 인류의 멸망에 대한 내용이었다.

12번째 위업.

세계의 리셋!

이미 열 두 번 실행되었고, 그럴 때마다 인류는 문명을 잃어왔다.

“앞으로 100일 후. 마지막 위업을 실행하마.”

인상이 구겨지려는 걸 억지로 참는다.

고작 100일 뒤라니?

‘빠르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과거의 기억과도 분명히 다르다.

과거엔 말피엘이 선동해 전쟁을 더 크게 부풀렸다. 그것도 앞으로 2년은 족히 더 있어야 벌어질 일이었다.

나 역시 전쟁을 멈출 수 없었고, 인류는 그렇게 멸망해갔다.

허나 100일 뒤는 아니다.

추측하건대 말피엘이 마지막 위업을 고지받은 시기 역시 2년 전후일 것이었다.

그리고 시기에 대한 의문은 나만이 느끼는 게 아니었더 모양이다.

의아함을 담은 눈으로 알렉이 물었다.

“로드시여. 아직 ‘힘의 균형’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힘의 균형.

인류가 성장한 정도를 뜻하는 것이리라.

천년 전 9서클 마법사가 상당히 많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현재 그 수준의 마법사와 기사는 없었다. 있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할 터.

“아니, 힘의 균형은 이미 무너졌다.”

그러나 로드는 고개를 저었다.

“특이점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다. 특이점은 특이점일뿐. 힘의 균형을 붕궤시키진 못하니라.”

“그럼 왜 이렇게 서두르는 겁니까?”

“세계수가 잡아내지 못한, 균형을 어그러트리는 존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

용들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세계수가 무엇인가.

그들에게 있어선 절대적인 존재다.

모든 균형을 포착하고, 용들에게 제거를 지시하는 게 바로 세계수였다.

그런데 그런 세계수조차 잡아내지 못한 ‘어그러짐’이 있다고 한다.

“존재해선 안 되는 존재가 나타났다. 세계수는 모든 ‘존재하는 것’의 균형을 잡지만,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은 파악할 수 없다.”

“그런 존재가······ 무엇입니까?”

로드가 직접 언급할 정도의 무언가.

특이점과도 비교할 수 없는.

더욱 무섭고 두려우며 경계해야할 존재.

곧, 로드는 천천히 그 존재에 관해 말했다.

“‘제로’다.”

······ 정확히 제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 어떤 생명체와도 ‘닿지 마라’. 그 ‘역병’은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으니. 절대로 닿아선 아니 된다.”

그 무엇과도 닿지 말라는 경고.

심지어 제로의 사용법마저 알고 있는 눈치다.

하지만······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박문식 박사의 말에 따르면, 제로가 깨어난 적은 없다.

제로가 가동 된 데이터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드래곤 로드는 정확히 제로의 이름과, 제로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역병’이라고 칭하며 혐오하는 모습마저 보였다.

“로드시여. 제로가 정확히 어떤 존재입니까?”

“천적이다.”

“십이주신이 간혹 만들었던 그 ‘대체품’을 말하는 겁니까?”

대체품.

용을 대신해 만들었던 강력한 신수들을 뜻하는 것이다.

예컨대 얼음새와 같은.

하지만 경쟁에서 도태됐다. 용을 대체할 정도로 강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로드가 말했다.

“제로는 이 세상을 초기화하는, 세계의 천적이니라.”

모든 것을 없애버리기에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것.

그게 바로 ‘제로’라고.

*

특이점, 그리고 제로에 관한 사안을 이야기한 후 ‘역할분담’이 시작됐다.

“‘주인공’의 역할을 맡을 용을 추천해보거라.”

주인공.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

마지막 위업을 주도적으로 끌고 갈 이를 뜻하는 것이다.

곧 알렉이 입을 열었다.

“‘한니발’을 추천합니다. 이미 인간들의 사이에서 ‘신성교 교황’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으니 마지막 위업을 이끌어갈 주인공으로 충분합니다.”

신성교의 교황?

나는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교황이 인간이 아니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용이었을 줄이야.

한니발이라 칭해진 용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다른 용들도 이견은 없었다.

인류의 멸망을 주도할 주인공의 역할로 그만한 적격자는 또 없었던 탓이다.

“아돌프. 누구를 추천하겠느냐?”

하지만 다른 용들이 확인하지 못한 자가 있었다.

아돌프. 존재감을 완전히 지운 그를 향해 로드가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아돌프가 정확히 나를 바라보았다.

“··· 북부의 용을 추천합니다.”

“이유는?”

“그는 제국의 황태자로서 이미 유희 중입니다.”

내 정체가 탄로나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돌프는 정확히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콜로세움에서 라우넬과 싸우기 전부터, 아돌프는 나를 용혈회에 입회시키고자 유심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유희라는 말로 얼버무렸지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이곳에 있는 모든 용들이 내 진짜 신분을 알게 된 것이다.

“광인 라인하르트?”

젠장.

한니발은 정확히 내 이름까지 거론했다.

교황인 그가 제국의 황태자를 모르는 건 말이 안 되긴 하였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내심 앞이 막막해졌다.

하······.

“······ 제국의 황태자로 유희 중이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이미 알고 있는 자들 앞에서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없느 노릇.

내 정체를 알고 난 한니발이 한 발 물러섰다.

“로드시여. 저보단 그가 ‘주인공’의 역할에 적임자일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신성교는 국지적인 전쟁을 일으킬 순 있을지언정, 인간들을 대혼란으로 빠트리진 못합니다. 허나 제국의 황제라면 능히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겁니다.”

“황태자라고 하지 않았나?”

“황제야 죽이면 되는 일.”

잠깐.

설마 지금 데우스를 죽이겠다고 공언한 건가?

‘데우스를 죽이고 나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겠다?’

그리고 세계를 대혼란에 빠트리는 역할로 내가 나서라는 것이다.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 게다가 이전 과거에서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이다.

그나마 달라진 점이라면 카를로스 대공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용들의 꼭두각시가 된다는 것인데.

“그 자리, 거절한다.”

제정신이라면 받아들일 리 없었다.

대혼란의 주역이 될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주인공의 역할을 부여받게 되면 물러설 곳이 사라지지 않겠는가.

내 목표는 저들의 장단에 맞추는 척 실리를 챙기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니발이 물었다.

“마지막 위업을 진행하는데 필수적인 역할이다. 너한테도 나쁠 건 없을 텐데?”

젠장.

틀린 소리는 아니다.

내가 진짜 ‘용’이라면 말이다.

“이제 막 용혈회에 입회한 내가 그런 중책을 맡을 수는 없다.”

“허나 방아쇠의 역할로 황제보다 더 적합한 존재는······.”

쿠르르릉!

그때였다.

갑자기 세상이 비틀리듯 땅이 울기 시작했다.

곧이어 용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로드 역시 마찬가지다.

“······ 번개의 장막이 걷혔구나.”

마계와 중간계를 막는 번개의 장막.

그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번개의 장막이 사라졌다는 건.

쿠오오오오오오오오-!

크롸아아아아아아!

마계의 문이 열리며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을 멸하거라.”

회의가 중단됐다.

용들은 성을 벗어나, 마계의 입구로 향했다.

‘······ 성공했군.’

나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모든 용들이 모이는 회의장.

그 틈을 타, 아렐과 헬라가 번개의 장막을 끄는데 성공한 것이다.

< 용들의 회의(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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